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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No.71] 김재범과 함께 한 <나쁜 자석>

사진 |김호근 정리|정세원 2009-08-19 6,128

 

  변해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아쉬움

 

 

 

 

 

김재범과의 데이트를 약속한 날, 하늘이 구멍이라도 난 듯 하루 종일 굵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낮에는 <날 보러와요> 연습으로, 저녁에는 <마이 스케어리 걸> 공연으로 빡빡한 일정을 보내고 있는 그였기에, 약속을 미루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날 보러와요>에서 그는 지금까지 연기한 캐릭터들 - <마이 스케어리 걸>의 사랑에 목마른 대우,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소심한 재봉사 모들, <김종욱 찾기>의 어리바리 소심 청년 김재범,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던 <빨래>의 솔롱고 등 - 과는 다른 모습으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정신이상 병력을 지닌 남자와 변태 성욕자, 멀끔한 회사원 같지만 어딘가 모를 비밀을 간직한 남자 등 세 명의 용의자를 연기할 예정이다. 극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행여 옷이라도 젖어 있으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 그가 로비에 나타났다. 예상과 달리 너무나 뽀송뽀송한 모습에 조금 놀랐다. 알고 보니 그는 대학로 악어 극장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살고 있는 동네 주민이었던 것. 비 오는 날 창문을 열어놓고 빗소리를 들으며 만화책 읽기를 좋아하는 순수 청년 김재범과 함께 한 편의 동화 같은 연극 <나쁜 자석>을 관람했다.

 

 

 

부끄러운 고백부터 하자(절대 웃지 마시기를 바란다). 공연을 보기 전까지 나는 <나쁜 자석>이 ‘에잇~! 나쁜 자석(자식의 사투리 버전)’인 줄 알았다. 남자 네 명이 출연한다고 해서 그들 모두 불효자들인가 보다 싶었다. 공연 관람을 앞두고 정보 검색을 하면서 얼마나 부끄럽던지! <나쁜 자석>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었지만, 진한 여운을 남기는 이 작품이 왜 계속해서 무대에 올려지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쁜 자석>은 스물아홉의 민호, 은철, 봉구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 원석의 죽음을 회상하는 과정을 통해 같은 극의 자석처럼 서로 밀어낼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그려낸다. 공연은 보는 사람 마음대로, 문자는 받는 사람 마음대로 해석되는 것. <나쁜 자석>은 한 편의 어른 동화를 읽은 느낌을 주면서도 ‘이게 현실이구나’ 싶은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져오는 작품이었다. 극중에서 배우들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아홉 살, 열아홉 살, 스물아홉 살의 모습으로 무대에 선다. 아홉 살의 민호, 은철, 봉구는 자기만의 보물을 타임캡슐에 묻기 위해 비밀장소를 찾았다가 서울에서 전학 온 원석을 만나 친구로 받아들인다.
세상에 아무 거리낄 것 없이 팔짝거리며 뛰어 노는 아홉 살의 친구들을 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민호의 수퍼맨 복장과 아이들의 모습에서 만화 『20세기 소년』이 떠오르는 것은 나뿐이었을까? 폐교를 찾은 아홉 살의 민호, 원석과 스물아홉의 봉구가 오버랩 되는 장면에서는 특히 더 그랬다. 공연을 본 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나도 아홉 살의 친구들을 보면서 어린 시절의 내가 생각났다.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내성적인 아이였던 것 같다. 극중에서 닮은 캐릭터를 찾으라면 원석이 아닐까(물론 중증은 아니다). 비 오는 날이면 집으로 가는 길에 혼자 비를 맞으며 뛰어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따뜻한 방 안에서 몸을 녹일 때의 노곤한 기분을 무척 좋아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 전까지 깊게 사귄 친구가 별로 없었던 터라, 함께 소방차 춤을 추며 마냥 행복해 보이는 극중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원석의 동화 <하늘 정원>과 <나쁜 자석>이 나머지 세 배우에 의해 극 중 극으로 재현되는 장면도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우리’가 될 수 없음을 슬퍼하는 네 명의 친구들 그리고 우리네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듯한 여운을 남긴 아름다운 우화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누구나 그렇듯이 봉구가 만든 설치물이 꽃비를 무대 가득 쏟아내던 마지막 장면이다. 원석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진,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세 사람의 관계를 보면서 ‘이게 사는 거지’ 싶어 어깨도 무겁고 마음도 무거워졌다. 변해가는 모든 것들에 아쉬움이 남는 순간이었다. 아름다운 광경을 이루던 꽃비가 금방 다 떨어져버렸을 땐 허무하고 우울해졌다. 마치 로미오가 죽자마자 줄리엣이 깨어났을 때처럼, 맥이 탁 빠지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이 서로에게 남긴 상처 사이에 남은 원석의 동화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싹을 틔워줄 수 있을까.
원석의 죽음 이후 십 년 만에 다시 만난 민호, 은철, 봉구가 그에게 받은 영향이 좀더 명확하게 보여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그마치 한 달 동안 폐교에 틀어박혀 그를 추억하기 위한 설치물을 만들면서 원석에게 밴드에서 나가달라고 얘기했던 것을 미안해하는 봉구의 마음은 알겠다. 하지만 열아홉 살 이후 아직까지도 원석을 잃은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민호는 그렇게까지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어야만 했을까. 그가 왜 그렇게 원석에게 집착하는지, 왜 그가 살아있다고 믿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아주 잠깐이었지만, 극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출판사에 다니는 은철을 보면서 ‘내가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배우이다 보니 나도 어쩔 수 없이 나쁜 캐릭터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그 전에 먼저 <날 보러와요>의 세 명의 용의자를 통해 나쁜 남자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마이 스케어리 걸> 뉴욕 공연을 제외하고 2009년에 마지막으로 참여하는 작품인 만큼 최선을 다해 나쁜 연기를 펼쳐 보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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