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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리뷰] <파리의 연인> 세련된 품새에서 보이는 ‘올드함’의 정체는? [No.104]

글 |정수연(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겸임교수) 사진제공 |컴퍼니 다 2012-05-16 5,083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다름 아닌 판타지와 리얼리티의 절묘한 조화.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지기까지는 리얼리티의 세계지만, 용왕의 왕비가 되어 연꽃 타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심청이는 완벽한 판타지의 주인공이다. 기생의 딸이 정경부인의 자리에 오르는 춘향이의 로망이나, 강남 제비의 선물로 그야말로 대박 터진 흥부의 성공 스토리는 우리 선조들이 꿈꿨던 제일 완벽한 드라마였던 셈이다. 리얼리티에서 시작하지만 판타지의 아름다움으로 끝맺는 이야기의 진짜 작가는 아마 대중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의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이 바로 오늘날의 드라마일 터.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드라마의 비결은 판타지의 완성에 있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드라마 <파리의 연인>은 독특했다. 가난한 캔디와 재벌 왕자님의 달달한 사랑 이야기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홀려놓고서는 마지막에 한다는 소리가 ‘이거 다 뻥이에요!’였으니, 현실에서 출발해 판타지로 마무리하는 다른 드라마의 진행 경로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거다. 판타지를 완성해야 하는 순간에 다시 리얼리티로 돌아간 셈이다. 시청자들은 작가의 상상력이 이토록 빈약할 수 있느냐며 공분했지만 어찌 보면 이런 결론은 작가의식의 부족이 아니라 오히려 작가의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신데렐라가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이야말로 리얼리티의 세계 속에서 판타지를 가능케 하는 통로가 아닐까. 여주인공 강태영의 직업이 시나리오 작가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뮤지컬적인 무대 언어로 재탄생

뮤지컬 <파리의 연인>이 돋보이는 지점도 바로 이것이다. 드라마를 소재로 삼은 많은 창작뮤지컬이 있지만, <파리의 연인>이 출발하는 지점은 같은 장르의 다른 작품들이 보였던 행로와는 다른 길 위에 있다. 드라마나 영화의 콘텐츠를 뮤지컬 창작의 젖줄로 활용하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작품의 방점을 원작의 재현에 두는 경우가 많았다. 드라마의 제목을 들으면 바로 연상되는 장면이나 대사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보통이요, 때로는 공연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원작의 내용과 전개를 복사하듯 옮겨놓는 바람에 죽을 만큼 지루했던 작품도 여럿 있었으니, 드라마 소재의 창작뮤지컬에 작품으로서의 호기심이 동하지 않았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파리의 연인>은 이 점에서 여타의 작품과 확연히 다르다. 이 작품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라마’가 아니라 ‘뮤지컬’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20부에 이르는 드라마의 내용을 어떻게 따라잡을까에 급급하기보다는 뮤지컬다운 표현 어법을 풍성하게 만듦으로써 드라마의 질감과는 다른 공연만의 미덕을 얻고자 했음이 도드라진다. 드라마의 축약이 아닌 독립적인 뮤지컬로서의 분명한 자기 인증을 작품 스스로 하고 있는 거다.

 

이러한 자기 인증은 작품 전체에 걸쳐 골고루 나타난다. 크게 시각적인 부분과 청각적인 부분으로 나누어보자. 공연의 막이 오르는 순간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시원하게 트인 무대의 환상적인 색감이다. 파리라는 이국적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용한 무대 언어로 효과적이었던 것은 무대 중앙의 분수대라기보다는 오히려 무대 뒷면을 채우는 조명의 분위기였다. 드라마를 소재 삼은 창작뮤지컬의 무대에서 시각적인 요소에 이토록 공을 들인 작품은 드물다. 대극장인 만큼 공간 또한 넓은지라 앙상블의 활용도 도드라졌다. 이 작품에서의 앙상블은 단순히 군무를 위한 집단이 아니라 극 속에서 분명한 역할을 가지고 장면마다 등장한다는 점에서 좀 더 극적이다. 드라마 소재의 창작뮤지컬에서 이렇게 많은 앙상블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더랬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뮤지컬로서의 자기 인증을 하고 있음이 확연히 드러나는 지점은 다름 아닌 음악이다. 다른 드라마 소재의 창작뮤지컬이 나름의 성과를 거둠에도 불구하고 뮤지컬로서의 매력이 떨어지는 큰 이유는 바로 음악적인 완성도 때문이었다. 귀에 꽂히는 음악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입에 흥얼거리게 되는 넘버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많은 작품의 경우 기대하기 어려운 욕심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극적 상황의 반복과 점층을 표현한다든지 또는 밖으로 드러나는 사건과 연결되는 내면의 변화를 담아내는 등등 음악의 극적 활용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대다수의 작품에서 음악의 이런 면모 또한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 <파리의 연인>은 이 지점에서 여타의 비슷한 다른 작품과 구별된다. 이 작품의 음악은, 예를 들어 ‘셸 위 댄스’ 같은 노래가 대표적인데, 선율적으로나 극적으로나 꽤 높은 완성도와 활용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파리의 연인>은 뮤지컬로서의 만듦새가 세련돼 보인다. 이렇듯 드라마 원작에 토대를 두면서도 그로부터 독립적인 면모를 보일 수 있었던 이유에는 연출인 구스타보 자작을 비롯해 해외 창작자들이 작업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원작으로부터 자유로우니 아무래도 드라마보다는 자신들이 익숙한 뮤지컬의 문법에 맞추어 작품을 만들 여지가 많았을 터다. 이희준도 일단 뮤지컬 각색에 익숙한 사람이고 각색이 아닌 자기 작품을 쓸 때는 분명한 자기 색을 드러내는 작가인 만큼, <파리의 연인>은 드라마 소재의 창작뮤지컬로서는 뮤지컬다운 옷을 확실히, 그리고 나름대로의 완성도를 갖춰 입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뮤지컬의 헌옷을 입다

그런데 말이다. 공연이 진행될수록 처음에 가졌던 기대감의 크기가 점차 작아졌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배우들의 연기에는, 주·조연을 막론하고 희극적 타이밍을 살리지 못하는 것이나 인물의 입체적인 모습을 살려내지 못하는 것 등등 아쉬움이 있다. 첫 장면에서부터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라며 캔디의 정체성을 밝힌 방진의의 씩씩하고 사랑스러운 ‘강태영’이 돋보였을 뿐. 그래도 이것이 기대감이 반감되는 결정적인 이유라고 할 순 없다. 그럼 2시간 40분이라는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엮이지 않은 이야기의 짜임새 때문일까? 20부작에 이르는 이야기를 압축시키기란 어려운 일이기도 하거니와 이런 헐거움은 이미 비슷한 부류의 다른 작품에서도 빈번한 일이라 그다지 새로운 이유가 아니다. 그래도 이 작품에는 그 성근 이음새를 메우는 시청각적 장치가 있잖나. 그렇다면 <오페라의 유령> 장면의 삽입 같은 패러디의 재치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을뿐더러 앙상블을 비롯한 인물들의 등퇴장을 평면적으로 구성하는 등 극적인 조율이 아쉬웠던 연출의 빈틈 때문일까? 조금씩의 아쉬움은 있어도 이들 각각의 이유가 전적인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파리의 연인>의 아쉬움은 바로 작품의 정체성 설정에 있다. 원작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그리고 뮤지컬이라는 작품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한 자기 언어의 설정. 이러한 덕목이 한편으로는 이 작품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파리의 연인>이 선택한 뮤지컬의 화술은 브로드웨이 주류 뮤지컬의 문법과 너무나 비슷하다. 이 작품이 풍기는 이국적인 느낌은 파리라는 시공간의 특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오래되어 익숙한 브로드웨이풍의 어법에 한기주, 강태영이라는 이름이 낯설었기 때문일 거다. 가운데 공간을 비운 채 무대 양옆의 공간을 기둥 형태의 구조물로 채워 공간을 설명하는 방식이나 앙상블을 활용하는 방식, 오해와 갈등의 허술한 배치, 드라마의 갈등이 구축되기도 전에 인물들의 자기반성으로 간단하게 해결되는 방식 등은 오히려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 자주 봤던 고전적 화술에 다름 아니다. <파리의 연인>의 신선함이 진부한 동어반복으로 지루해지는 순간이다. 작품으로서의 아쉬운 부분이 새로운 무대 화법을 찾기 위한 창작의 과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어왔던 주류 뮤지컬의 빈틈이 반복되는 것이라면, 이러한 세련됨은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퇴행의 징후일 수 있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양상은 해외 창작 팀이 참여한 적잖은 공연들이 밟았던 전철이기도 하다.

 

뮤지컬 <파리의 연인>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창작뮤지컬이라는 맥락의 리얼리티 속에서 드라마적인 완성도를 보완해 나감으로써 진화된 창작 공연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할 것인지, 아니면 이 작품이 많은 부분 이어받은 요소, 즉 낡아 보이긴 해도 오래되어 익숙한 브로드웨이의 고전적 화술을 강화시켜 무대 위의 판타지에 더 집중할 것인지 말이다. 모든 선택은 고민스러운 법. 하지만 리얼리티와 판타지는 서로 함께 갈 때 가장 빛난다. 정답은 항상 뻔하다.

 

※외부 필자의 기고는 <더뮤지컬>의 편집 방침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4호 2012년 5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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