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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아리랑> [No.143]

글 |정수연(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겸임교수) 사진제공 |신시컴퍼니 2015-09-01 4,615

발병 날지도 모를, 넘기 힘든 ‘아리랑’ 고개





신시의 무한도전

이제는 국민 예능이 된 <무한도전>의 원제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기차랑 달리기 시합하고 굴삭기랑 삽질 대결하던 뻘짓 같은 예능이 이렇게 진화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거다. 그 첫 회 때 황소를 상대로 열심히 줄다리기를 하는 멤버들을 보면서 혼자 분식집에서 라면 먹으며 저걸 보고 있는 나나 저것도 예능이라고 황소 이기려 애쓰는 당신들이나 참 먹고사는 게 모질다, 이랬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도전은 근본적으로 무모한 것이다. 도전이란 성공과 실패를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말 그대로 싸움을 거는 일이기 때문이다. 

 
뮤지컬 동네에도 무모한 도전을 하는 팀이 있다. 신시컴퍼니. 신시는 <시카고>, <맘마미아!>에서부터 최근의 <원스>에 이르기까지 완성도 높은 라이선스 뮤지컬 공연뿐 아니라 작품성과 대중성을 아우르는 연극도 제작하는 대표적인 중견 제작사이다. 하지만 신시만의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영역은 따로 있으니 바로 창작뮤지컬이다. 신시의 창작뮤지컬은 곧 ‘신시만이 할 수 있는 콘텐츠’에 다름 아니다. 의미에 대한 고집과 자부심에 흥행의 가능성은 뒤로 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놀라워라. 뮤지컬에서 흥행은 싸움의 이분법으로 볼 때 이 판에서의 온전한 승리 아니던가. 여러모로 신시의 창작뮤지컬 작업은 무한도전을 연상시킨다.

신시의 창작뮤지컬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일단 문학 작품을 소재로 삼는다는 것. 그것도 문학성을 검증받은 작품만을 저본으로 삼는다. 김영하의 <퀴즈쇼>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그 예인데, 이 작품들은 작가의 스타성과 서사의 대중성이 어우러진 대표적인 소설이다. 주제 의식을 풀어내는 소설 특유의 묵직함을 뮤지컬의 화술로 전환하는 일이 녹록했을 리 없다. 흥행의 부침은 각자 짐작들 하시길.

또 하나의 특성을 꼽자면 역사성일 거다. 역사를 소재 삼은 대형 창작뮤지컬은 이전에도 있어왔지만 그 대부분이 ‘원작 없는 텍스트의 창작’인 것에 비해(에이콤의 <명성황후>나 <영웅> 같은), 신시의 작품은 ‘원작 텍스트의 각색’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창작이 쉬울까 각색이 쉬울까? 작품에 따라 다르겠지만 신시가 선택한 원작으로 보자면 단연 각색이 더 어렵다는 데 손을 번쩍 들련다. 원작이 깔아놓은 만만찮은 물리적 사상적 시공간 위에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댄싱 섀도우>의 원작인 차범석의 <산불>은 한국전쟁을 배경 삼은 전후 사실주의 희곡의 대표작이고, 조정래의 『아리랑』은 일제 강점기를 다룬 대하소설이다. 이러한 소재와 형식에서는 요구하는 기본 옵션이 있다. 역사 소재는 의미의 해석, 대하소설은 압축의 기술을 요구하게 마련이니, 뮤지컬 창작 과정에서 발휘되어야 할 최고의 역량을 요구하는 셈이다.

<아리랑>은 신시가 내놓는 또 하나의 무한도전이다. 조정래라는 대가의 이름이 있고, 대하소설이라는 형식의 압박이 있으며,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의 무게가 있고, 신시라는 이름의 자존심이 있다. 넘어야 할 아리랑 고개가 한두 개가 아니다. 뮤지컬 <아리랑>은 이 고개를 다 넘어 먼 길(롱런) 떠날 수 있을까.





공연으로서의 미덕

눈을 가까이 놓고 볼 때 뮤지컬 <아리랑>의 공연다운 미덕은 적지 않다. 공간의 아름다움과 장면 연출의 세련됨에서, 무대를 꽉 채우는 앙상블과 배우들의 역량에서, 음악의 무게감과 판소리의 멋스러움에서 신시컴퍼니의 저력과 연출자 고선웅의 감각은 잘 드러난다. 의도된 어긋남이라고나 할까. 일본군에게 유린당하는 비참한 시간 위에 꿈같이 아름다운 무대그림이 겹쳐질 때 슬픔은 배가되고, 고향을 떠나 만주로 가야 하는 의병들의 지친 아리랑이 투쟁가에서 음담패설로 변할 때 웃음이 새어 나온다. 검은 옷을 입고 단정하게 뒤돌아 앉은, 불에 타 죽은 어미는 그 누구보다도 의연하고, 허무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상여에 올라 가장 환하고 행복한 춤을 춘다. 무엇이 슬픈 것이고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가? 삶이란, 간신히 부지하는 목숨인 줄 알았더니 흘러넘치는 생명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아리랑>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여자 캐릭터들이 눈에 띄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송수익과 양치성은 의병을 일으키거나 나라를 배신하는 등 ‘큰일’을 하지만, 여자들은 그저 살아가기 위해 애쓸 뿐이다. 적군에게 능욕을 당해도, 고향을 떠나 짐승같이 살아도, 원수의 아이를 낳아도, 심지어 불에 타 죽는다 해도 그들이 서로에게 하는 말은 하나다. ‘아홉 번 죽더라도 살아야 혀!’ 차라리 죽는 게 편할 것 같은 일을 당한다 해도,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외칠 수 있는 건 그들-능욕당한 수국과 유린당한 옥비, 불에 타 죽어갈 어미-이 서로의 고통과 치욕을 알기 때문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곳에서 살아야 하는 것만큼 (비)극적인 건 없다.

그러니 이 작품에서 여자 배우들이 빛나는 건 당연하다. 감골댁 김성녀의 당당한 어미다움과 수국 역 윤공주의 모진 생명력, 옥비 역 이소연의 처연한 애절함은 작품의 정서를 짙게 만든다. 윤공주는 어떤 작품에서보다 배우로서 돋보이고, 특히나 이소연의 소리는 작품의 격을 한 단계 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정갈하면서도 우아하다. 그에 비하자면 남자 역할은 밋밋한 게 특색이 없다. 진부하고 전형적인 것이 일제 강점기를 다룬 어떤 이야기에 얹어놔도 그냥저냥 어색하지 않을 정도이니, 그만큼 구체적이지도 개성적이지도 못하다는 얘기일 거다. 하다못해 의병으로 나온 농민 역할까지도 그렇더라. 굳이 따지자면 그나마 사연 있는 배신자 양치성이 첨부터 끝까지 그냥 정의로운 송수익보다는 입체적이다. 하지만 도 긴 개 긴, 거기서 거기다.




끝내 넘지 못한 고개

남자 캐릭터가 인상적이지 못한 까닭을 배우의 연기에서 찾을 일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 작품의 구조를 살피는 게 낫지 않을까. 여자 캐릭터가 정서의 축을 세우고 있다면 남자 캐릭터는 사건의 전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병 운동과 친일 행각, 일본군과의 전투와 만주로의 이주 등등 작품의 시간을 이끄는 주된 사건 위에 송수익과 양치성, 의병과 일본군이 있다. 그런데 이들의 사건은 엮여서 흘러가기보다는 요약돼서 주어진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12권 분량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건과 인물의 디테일을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역사 소설을 뮤지컬로 만들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 소설은 충분한 설명과 디테일로 역사와 개인을 엮어내지만, 뮤지컬은 임팩트 있는 장면과 노래로 모든 것을 요약해야 하니 말이다. 그러니 사건이 분절될 때 구체적 시공간은 익숙한 역사로 박제되기 십상이고, 그 사건의 주인공인 인물들의 생동감이 거세되는 건 당연할 수밖에. 어차피 충분히 설명되지 못할 이야기의 연결 따위에 집착하지 말고 아예 독립된 장면 위주로 전체를 구성했다면, 과감하게 극의 중심 단위를 이야기에서 노래로 옮겼다면 어쨌을까 싶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아직 설명에 연연해 보인다. 정작 빛난 건 몇몇 아름다운 장면이었는데. 무리수는 여기에서 빚어진다. 요약된 장면에 설명은 해야겠는데 뭔가 충분치 않으니 그 빈틈을 무엇으로 메울까나. 이 작품이 선택한 보충재는 휘몰아치는 감정, 북받쳐 오르는 정서이다. 거의 모든 노래의 엔딩이 비장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매 장면 이어지는 절규가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음악과 안무가 마치 독립운동 하는 것 같더라. 연출자는 애이불비(哀而不悲)를 의도했다지만 어느새 비분강개(悲憤慷慨)의 격정이 작품을 덮어버리는 거다. 슬픔 속에서도 슬픔에 빠지지 않는 역설적인 감정은 과잉으로 쏟아질 리 없는 법이니, 분하고 원통하고 분개하는 감정의 폭발에 애이불비는 어불성설이다. 감정의 결이 헷갈리면서 작품의 방향이 틀어지는 것은 큰 문제이다. 애이불비는 민초들의 삶의 정서이건만 비분강개는 자칫 어설프게 역사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감정으로 기억하는 역사, 낡기도 낡은 것이려니와 무엇보다 흉해지기 쉽다. 뮤지컬 <아리랑>이 십 리도 가기 전에 발병 나지 않으려면 혹시나 임을 버리고 오지 않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그 임이 문학이든 역사이든 무엇이든 간에.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3호 2015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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