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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랭보>, 퇴행하는 서사와 함께 사라지는 것들 [No.183]

글 |정수연 뮤지컬 평론가 사진제공 |라이브, 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2018-12-14 6,470

<랭보>, 퇴행하는 서사와 함께 사라지는 것들

 

 

여기에 랭보는 없다

뮤지컬 <랭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다. 랭보를 잊을 것. 베를렌느를 잊고 그들의 삶도 잊을 것. 진짜 랭보와 베를렌느를 기대하며 이 작품을 본다면 끝나지 않는 물음표에 두통이 생길지도 모른다. 설사 두통이 생긴다 해도 그건 작품이 책임질 일은 아니다. 애초에 이 작품이 랭보와 베를렌느의 삶과 예술을 재조명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으니 말이다. 제목이 ‘랭보’임은 맞지만 이 작품의 관심은 예술가의 삶과 작품보다 그들의 이름과 이미지를 소비하는 방식에 있다. 이는 실존했던 예술가를 소재 삼은 수많은 창작뮤지컬에서 반복됐던 방식인데, 이 작품은 그 계보를 충실히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이미 있던 비슷한 부류의 창작뮤지컬에서 예술가들의 삶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극’으로 정리된 적이 없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지만, 무늬 없는 호피에 아무 가치가 없듯이 삶이 빠진 이름에 의미가 담길 리는 만무하다. 그러니 <라흐마니노프>에 라흐마니노프가 없고, <빈센트 반 고흐>에 고흐가 없으며, <사의 찬미>에 김우진이 없고, <스모크>에 이상이 없을 수밖에.
 

<랭보>에 랭보가 없다는 증거는 차고도 넘치지만 그중에 가장 큰 증거는 랭보와 베를렌느의 사랑이 생략됐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의 파괴적인 연애는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아는 얘기인데 이 작품은 그 사실을 모른 척한다. 랭보와 베를렌느의 관계를 창작의 열정으로 맺어진 형제애에 가깝게 그려내더라. 맙소사. 이 작품은 이들의 사랑을, 관객들이 본다면 역겨워할, 남자들 사이의 더러운 치정으로 이미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를 직시하지 않을 때 랭보의 파격적 시는 의미를 갖지 못하고 베를렌느의 요동치는 감정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들의 사랑은 외설도 아니고 흥행을 위한 퀴어 코드도 아닌 그저 사실의 진술일 뿐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랭보의 진짜 삶에 관심을 두기보다 전전긍긍 관객의 눈치를 보기에 바쁜 모양새인 데다가 그나마 눈치의 번지수도 틀려버렸다. 관객은 남자들의 사랑이 아니라 랭보와 베를렌느의 이야기를 보고 싶을 뿐인데 이 작품이 뜬금없게도 ‘순수의 시대’를 외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의 치정보다 어설프게 관객의 취향을 넘겨짚는 작품의 시선이 더 외설스럽다.
 

<랭보>에 ‘랭보’가 없다면 이 작품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작품의 맥락을 랭보라는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가의 이름을 내세운 창작뮤지컬의 계보와 연결지어야 할 터다. 이런 부류의 작품들은 나름대로 흥행을 거두었고 그 흥행 코드는 일종의 공식처럼 반복되고 있으며 <랭보>는 그 특성을 고스란히 재연하고 있다. 익숙한 코드가 반복되어 일정한 수준의 성공을 거두는 현상은 이 작품의 정체성이 작품이기보다는 상품에 가깝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예술가의 이름과 이미지를 내세우는 창작뮤지컬에서 반복되고 있는 코드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반복의 결과는 무엇인지, 그것이 이 작품 안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볼 때, 이 작품은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창작뮤지컬의 지류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로 분석될 수 있다. 



 

플롯이 사라진 후에

이런 부류의 작품들은 제목도 소재도 제각각임에도 불구하고 만듦새는 대동소이하다. 두세 명의 등장인물에(대부분 남자다), 극의 내용은 주로 내적 고뇌이고, 음악의 톤은 감정 위주이며, 마무리는 그래도 희망적인, 대략 작품이 흘러가는 방식이 이렇다. 작가도 모두 다른 사람인데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작품의 결이 비슷하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나. 이런 작품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플롯이 없다는 것. 줄거리가 이야기의 내용이라면 플롯은 이야기의 논리인바,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 관계가 없이 이야기는 다음의 국면으로 진전될 수가 없지만 이런 부류의 작품은 플롯 없이 두 시간을 지속하는 데 집중한다. 
 

<랭보>도 이 예를 그대로 따른다. 이야기의 구조는 아프리카에 남겨진 랭보의 마지막 시를 찾기 위한 진행형의 이야기에, 랭보와의 과거를 추적하는 되짚기의 이야기가 겹쳐지는 방식이다. 설정만으로 본다면 충분히 흥미로울 만하다. 하지만 설정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이 끝나는 순간 이 작품의 드라마는 멈춰버리고 만다. 드라마를 끌고 나갈 만한 동기와 갈등과 사건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랭보가 왜 아프리카로 갔는지, 베를렌느가 왜 랭보의 마지막 시를 찾는 여정에 동행하는지, 랭보와 베를렌느가 어떤 애증의 관계였는지, 어느 것 하나 분명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플롯으로 엮이지 못한 설정은 드라마가 될 수 없으니, 인물들은 작가가 만든 드라마가 아니라 약간의 실화에 기대어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서사로서의 해석이 결여된 랭보와 베를렌느의 ‘이야기’는 어느새 ‘분위기’로 자리를 옮겨버린다. 분위기에는 실체가 없는 법. 실체가 없는 이야기는 극이 제시해야 할 객관적 세계를 관객이 받아들이는 주관적 느낌으로 대체시킨다. 
 

백번 양보해서 이 ‘주관적 느낌’이야말로 이 작품이 관객에게 던지고 싶은 진짜 내용이라고 치자. 실제로 이 작품을 보면 사건의 드라마가 아니라 감정의 드라마를 지향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는다. 만약 이 작품이 랭보와 베를렌느의 감정에 주목하고자 했다면 두 사람의 사랑은 실화보다 더욱 구체적인 이야기로 만들어졌어야 한다. 그 관계 안에서만 감정은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밀도로 구축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작품에서 그들의 사랑은 유야무야이니, 관계가 없는 곳에 감정이 구체적일 수는 없는 법. 감정의 드라마야말로 치밀한 플롯의 결과물임을 간과하는 것도 큰 문제지만, 사람의 감정을 이렇게 단순하고 획일적인 하나의 색깔로 이해하는 태도야말로 인간에 대한 큰 오해일 터다. 홍수에 먹을 물 없다고 했던가. 감정을 북돋겠다는 작품일수록 거기서 인간의 진짜 감정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런 부류의) 작품을 감정의 드라마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이다. 



 

덩달아 사라지는 것들

진짜 문제는 플롯이 실종되면서 함께 사라지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데 있다. 첫 번째는 바로 작가이다. 작가의 개성이 아니라 제작사의 취향이 앞서는 작품에서 작가는, 설사 흥행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자기의 이름을 얻지 못한다. 작가라는 이름은 서사를 엮는 기술만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통찰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명예인바, 익숙한 취향을 반복하는 단순 작업을 통해서는 그 누구도 자기의 이야기를 벼려내는 작가로 성장하기란 불가능하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의 음악은 비슷한 부류의 작품의 음악들과는 분명 다른 지점들이 있다. 설정을 제시하는 초반부에 등장인물의 상황과 감정의 높낮이를 섬세한 차이로 담아내는 음악은 혹시나 이 작품은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하지만 음악의 분발은 여기까지이다. 서사 없이 하나의 감정만으로 시간을 끄는 극의 흐름 위에서 음악은 곧 한계에 부딪히고 마는 거다. 민찬홍은 드라마를 포착하고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난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지만 그런 능력은 이 작품에서 하나도 소용이 없다. 드라마가 없는 작품에서 음악은, 비슷한 부류의 작품들이 그렇듯이 그저 감정으로 소비될 뿐이다. 


 

배우도 예외는 아니다. 캐릭터 분석이 필요 없을 만큼 단선적인 인물을 연기할 때 배우의 연기 역시 단순해지고 만다. 일례로 베를렌느 역할을 맡은 김종구는 <비스티 보이즈> 같은 작품에서도 캐릭터의 질감을 풍성하게 만드는 역량을 보여주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개성 없는 무난함에만 머물러 있다. 캐릭터를 만들어내던 배우가 평범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유쾌하지 않다. 하나의 감정만 반복할 때 배우의 연기는, 그가 누구라 하더라도, 퇴보하게 마련이다.
 

대사도 가사도 되지 못한 관념적인 시어가 넘쳐나고, 너무나 뜬금없는 문어체의 대사(‘나와 함께 타락해!’)가 즐비한, 퇴행적인 서사를 반복하는 공연(들)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바로 질문이다. 이러한 퇴행이,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지금 여기의 흥행 코드라면 이 같은 징후에서 읽어내야 할 문화적 서브텍스트는 무엇일까. 더 이상 상품의 공정을 작품의 창작 논리로 오독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데에서부터 답 찾기는 시작될 것이다. 

 

*외부 필진의 리뷰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3호 2018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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