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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랭보> 백형훈, ​반짝임에서 단단함으로 [No.192]

글 |배경희 사진 |김호근 2019-09-29 6,781

 <랭보> 백형훈
반짝임에서 단단함으로  

 

어느덧 삼십 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는 백형훈은 지난 이십 대를 되돌아 볼 때 배우로서 자신감이 너무 부족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이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고. 그리고 10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결과, 동료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점점 믿음을 주는 배우가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고 했다. 백형훈이 이번에 새롭게 출연할 작품은 파괴적인 천재 시인 랭보의 이야기를 그린 <랭보>.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어떤 믿음을 전하고, 또 어떤 믿음을 얻게 될까.


 

캐릭터의 훌륭한 화자가 되기 위해

 

<랭보>는 어떻게 만나게 된 작품인가요? 솔직히 <랭보>는 제게 뜻밖의 작품이었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저를 지나쳐 갈 거라 생각했던 작품이죠. 그런데 제작사인 라이브 대표님께서 지난봄에 <최후진술>을 보시고선 제가 랭보에 어울릴 거라 생각하셨대요. 정식 공연이 아니라 특공(특별 공연)을 보신 거였는데도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감사했죠. 사실 출연 제안을 받았을 당시만 해도 <테레즈 라캥>과 <에브리바디 원츠 힘 데드>를 하기로 예정돼 있어서 차기작은 그 두 작품을 끝내 놓고 결정할 생각이었거든요. 게다가 <랭보> 공연 기간이 <에브리바디 원츠 힘 데드>하고 겹쳐서 그에 대한 부담도 있었고요. 하지만 대본을 받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특히 음악이 저를 사로잡았죠.
 

처음 듣자마자 반한 뮤지컬 넘버가 있었을까요? 엔딩곡인 ‘영원’을 처음 들었을 때 이 작품이 어떨지 제 안에서 그림이 그려졌어요. ‘영원’은 <랭보>에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곡인데, 잘 쓰인 뮤지컬 넘버가 그 작품의 막을 내려줄 때 배우로서 무척 행복하거든요. 그래서 이 곡에 더욱 매력을 느꼈죠. 그런데 지금은 어느 하나를 꼽을 수 없을 만큼 모든 곡에 애정이 생겼어요. 공연 연습을 할수록 민찬홍 작곡가님이 곡을 참 잘 쓰셨단 생각이 들어요.
 

재연 프로덕션에 합류하게 되면 작품의 인기 요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될 것 같아요. 혹시 그에 대한 답을 구했나요? 제가 <랭보> 초연을 못 봤어요. 그래서 대본과 음악으로 작품을 접했는데, 무엇보다 음악이 주는 힘이 있더라고요. 특히 ‘취한 배’ 이후부터 나오는 곡들은 전부 마음에 확 와닿는 무언가가 있어요. 왜냐면 멜로디와 가사가 한 몸처럼 어우러지지 않으면 어느 한쪽이 튀는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인데, <랭보>는 이 두 가지가 하나처럼 잘 흘러가거든요. 솔직히 제 생각에 뮤지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음악인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듣기로, 초연 당시 연출님과 배우들이 치열하게 작품을 만들었대요. 그런 부분에서 시너지 효과가 나지 않았을까 싶어요. 
 

랭보라는 실존 인물을 다룬 작품이다 보니 그에 대해 찾아보면서 흥미롭게 느낀 점이 있을까요? 제작사에서 스터디 자료를 참 많이 줬어요. 랭보가 살아 있을 때 발표하려고 했다는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철』도 읽고, 그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는 영화 <토탈 이클립스>도 봤고요. 확실히 드라마틱한 삶을 산 비범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히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랭보의 기행을 보면 ‘어후’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데, 작품에서 그의 기이하고 파괴적인 면이 지나치게 부각되면 관객들이 부담스럽지 않을까 싶어요. 일반적으로 저녁에 공연되는 뮤지컬의 경우에는 관객분들이 그날 하루 동안 일을 하든 공부를 하든 제각각 힘든 일상을 보내고 나서 극장에 오는 걸 테니까요. 그런 점에서 윤희경 작가님이 랭보의 이야기를 뮤지컬 무대에 맞게 잘 대본화한 것 같아요. 
 

랭보 역에 새롭게 합류한 캐스트로서 백형훈만의 색깔을 찾아가고 있다면 그게 뭘까요? 랭보를 연기하는 데 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저희 작품은 랭보와 그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두 인물 베를렌느와 들라에의 삼인극이잖아요. 랭보와 베를렌느, 랭보와 들라에, 베를렌느와 들라에의 관계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저는 세 사람의 관계성보다 랭보의 인생 자체를 보여주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분명 공연을 보는 사람에 따라 흥미롭게 느끼는 인물이 각각 다를 테지만, 전체적으로는 이 작품이 랭보의 이야기처럼 보였으면 좋겠단 바람이 있거든요. 제가 랭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됐으면 하죠. 그래서 베를렌느와 들라에에 대해 생각할 때 랭보의 세계관이나 가치관, 작품 세계 안에 들어와 있는 인물로서 접근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론, 세 명의 등장인물 모두 소모적으로 그려지지 않고, 각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뚜렷하다는 점이 좋았어요.
 

랭보 인생 이야기의 핵심 축 가운데 하나인 베를렌느와의 관계에서 고민하고 있는 부분은 뭐예요? 두 사람이 실제로 사랑한 사이였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일 거예요. 당시 결혼한 몸이었던 베를렌느가 랭보를 만나고 나서 가정을 버렸다는 이야기도 잘 알려져 있고요.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뮤지컬에서는 두 사람의 시 세계에 좀 더 집중하다 보니 파괴적인 사랑보다는 존중에 가까운 사랑을 보여줘요. 그게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이 두 사람이 바닥에 시를 쓰고 그 시에 키스하는 ‘바닥 키스’ 장면인 것 같고요. 처음 그 장면을 접했을 때 정말 멋진 표현법이라 생각했어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넘어서 섹슈얼한 정서까지 다 표현되니까요. 두 사람의 관계는 최대한 대본에 나와 있는 대로 그에 충실하려고 해요. 


 

단단한 여정이 가져다 준 변화 

 

지난해에는 대형 뮤지컬에 주로 참여했다면, 올해는 <최후진술>을 기점으로 소극장 뮤지컬에 연달아 출연하고 있어요. 특별한 계산을 가지고 작품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배우로서 생각이 달라진 부분이 있는 걸까요?  아무래도 회사에 소속돼 있다 보면 배우 혼자만의 생각으로 작품을 결정하긴 힘들어요. 그리고 제 욕심 같아서는 극장 규모에 상관없이 좋은 작품을 하고 싶은데, 대극장과 소극장 각각의 작품 사이클이 있다 보니 양쪽을 활발히 오가는 게 쉽지 않아요. 예를 들어, 대형 뮤지컬을 하고 나면 이후에도 계속 대극장 작품 제안이 들어오고, 소규모 뮤지컬을 하면 또 계속 소극장 작품을 하게 되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두 리그의 경계를 허물 수 있을까. 그게 요즘 저의 최대 고민이에요. 물론 쉽진 않겠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려고요. 
 

작년부터 인스타그램 계정을 개설해서 관객들과 직접 소통하는 것도 두드러진 변화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저는 원래 SNS를 안 했어요. 그 이유가 배우로서 팬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제 자신과 팬 여러분 양쪽에 좋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요즘 SNS가 엄청 발달해서 심지어는 해외에 있는 스타들까지도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소통이 잘되잖아요? 문득 이런 마당에 내가 뭐라고 SNS를 안 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웃음) 그리고 무엇보다 공연을 보러 와주시는 관객분들에게 직접적으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특히 뮤지컬을 좋아하는 마니아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분들에게는 뮤지컬이 단순한 취미 생활이 아니라 일상의 한 부분이더라고요. 근데 제가 달리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다 보니, SNS를 통해서라도 소통을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공연 중인 뮤지컬 <테레즈 라캥>의 로랑이나 연극 <에브리바디 원츠 힘 데드>의 싱페이는 거칠고 악한 면이 있는 캐릭터잖아요. 그동안 주로 맡았던 인물들과는 조금 다른 결을 지닌 역할이었는데, 연기하면서 새로운 즐거움을 느꼈나요? 사실 처음에 제안받은 역할은 살인마 싱페이가 아닌 그를 취조하는 검사였어요. 데뷔 후 소년에 가까운 역할을 많이 맡다 보니, 저도 모르게 좀 바른생활 이미지가 있었나 봐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저라는 배우와 제가 생각하는 제 자신 사이에 간극이 있구나 싶어서 제가 제작사 쪽에 저한테는 싱페이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역제안을 드렸죠. 제 생각에는 오히려 검사 역할을 더 못할 것 같았거든요. 근데 이번에 로랑과 싱페이를 하고 나니까 ‘네가 이런 역할도 할 수 있구나’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좀 뿌듯해요.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배우로서 좀 더 어른 같아졌다는 인상을 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어요. 
 

한계에 부딪쳐보기 전까지는 나라는 사람의 한계가 어디일지 알기 힘들잖아요. 이번 경험을 통해 앞으로는 이런 작품이나 역할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느낀 게 있을까요? 어떤 캐릭터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늘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야겠단 생각이 더욱 단단해졌어요. 사실 전 이십 대 때는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치고는 자신감이 참 없었거든요. 자존감도 낮았고요. 늘 제 자신을 제가 정한 테두리 안에 가둬놓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요만큼일 거야’라고 스스로를 낮춰 생각했어요. 저의 가능성을 제 스스로 닫아버렸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웬만한 일은 일단 부딪쳐보자고 마음을 바꾸게 됐어요. 아마 <팬텀싱어> 때 다양한 장르의 자신감 넘치는 사람들을 만났던 게 제게 큰 영향을 준 듯싶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어요?  가장 크게는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뭘 하기 전에 두려움부터 앞섰는데 이제는 덜 그래요. 옛날에는 연습실에서 “자, 이제 형훈 씨가 나와서 한번 해봅시다” 그러면 “아….” 하고 한숨부터 나왔거든요. 근데 지금은 <랭보>로 예를 들자면, 정동화만의 랭보가 있고 윤소호만의 랭보가 있듯이 저만의 랭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일단 뭐든 한번 해봐요. 제가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따라 할 수 없듯이 다른 사람들도 제 장점을 따라 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갖게 된 거죠. 물론 그렇다고 앞으로의 활동에 대한 고민이나 어려움이 없어진 건 아니에요. 배우 생활의 힘듦은 별개의 문제인 것 같아요. (웃음) 다만 제 자신이 과거에 비해 조금은 단단해졌다고 느껴요. 
 

그런데 <팬텀싱어> 출연 이후에 다른 매체 활동에 대한 생각은 안 해봤어요? 당시 방송 직후에 주위에서 매체 활동 욕심은 없냐는 질문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제가 먼저 의욕적으로 나서서 기회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요. 물론 자연스럽게 기회가 생기면 저야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작품들의 오디션을 보는 것보다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공연 활동에 더 집중하고 싶어서요. 그리고 개인적으론 작품을 통해 노래할 때가 더 좋아요. 핸드 마이크를 들고 백형훈으로 노래하는 것보다 작품 안에서 캐릭터로서 노래하는 게 저한테는 더 큰 희열을 줘요. 
 

2020년이면 데뷔한 지 10년을 꽉 채우잖아요. 배우로서 또 어떤 꿈을 품고 있나요. 스물넷에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십 대 시절의 6년보다 삼십 대가 되고 나서의 3년이 저한테 훨씬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줬어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서른이 지나 자신감을 얻었고, 나이 들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깊이도 생긴 만큼 앞으로 좀 더 제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대로 활동하고 싶어요. 극장 규모나 제작사의 구분 없이 활동할 수 있도록 문을 계속 두드려볼 생각이고요. 아, 그런데 설사 그렇게 되지 못하더라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배우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고 제 스스로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설령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해도 괜찮다는 마음가짐, 지난 10년 동안 제가 얻은 가장 큰 변화예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2호 2019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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