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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CULTURE REVIEW] <히스토리 보이즈>​, 그 여름, 알아야 했던 모든 것 [No.194]

글 |김영주 공연 칼럼니스트 2019-11-23 5,993

<히스토리 보이즈>, 그 여름, 알아야 했던 모든 것 

 

 

예술과 역사의 의미                    

 

황지우 전 총장이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직접 가르쳤던 전설적인 강의를 일반인 대상으로 진행한 ‘명작읽기’라는 인문학 강좌가 있었다. 2010년, 『일리아드』에서 『돈키호테』까지 서양 고전 문학의 정수를 깊이 파고드는 총 30시간의 수업이었다. 시인의 놀라운 지성이나 해박한 지식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문학과 예술에 대한 그의 열렬한 숭배였다. 그는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언쟁을 연극처럼 재연했고, 수강생들에게 역할을 나누어 『일리아드』를 읽게 했다. <히스토리 보이즈>의 초연 때부터 지금까지 문학 교사 헥터 선생 역에는 언제나 관록 있는 좋은 배우들이 거쳐 갔지만, 저 역할에 가장 적합한 한국인은 황지우 시인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연극은 그 자체로 문학과 예술과 역사의 전당에 바쳐진 찬미이고, 헥터는 그 신전의 제사장이니까.  

<히스토리 보이즈>는 무려 열두 명의 캐릭터가 장장 세 시간에 걸쳐 쉬지 않고 저마다 높은 목소리로 제 생각을 떠들어대는 작품인데, 놀라운 것은 되는 대로 빠르게 쏟아내는 것 같은 그 모든 이야기들이 무엇 하나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밀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장 지적이고 고상한 주제를 깃털처럼 가볍고 상스러운 화법으로 거침없이 쏟아내는 아이들은 관객들에게 지적 유희의 즐거움과 신성모독으로 인한 쾌감을 함께 선사한다. 

사실 작품의 중심이 되는 논쟁은 심플하다. 예술과 역사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어 탐구하고 숭배할 만한가, 아니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써 이용할 때 가치 있는 것인가. 이 연극은 세 시간 내내 그 두 가지 입장이 모두 얼마나 매력적이고 또 어떤 빈틈을 가지고 있는지 충실하게 보여준다. 여덟 명의 아이들이 헥터의 지도 아래 교실에서 벌이는 갖가지 ‘놀이(Play)’는 배우들의 리드미컬한 앙상블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괴짜 선생님의 오래된 문학 수업이 긴 시간 호흡을 맞춰온 극단의 콩트를 연상시킨다면 어윈이 이끄는 역사 수업은 자기 현시욕과 ‘허정함’이 넘치는 프리스타일 랩 배틀에 가깝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캐릭터들

                      

늙은 제사장 헥터에 맞서는 젊은 패기의 이단아 어윈은 넘치는 야심과 그에 못지않은 지적 능력을 갖고 있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자신이 말하는 바를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청년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긴 시간이 지난 현재에도 조금 더 폐쇄적이고 냉소적이 되었을 뿐 자신이 선택한 궤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역사를 쇼 호스트 같은 태도로 팔고 있다. 어윈 역을 맡은 김경수는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보다 이를 통해 어떻게 흥미를 끌 수 있느냐에 더 큰 관심이 있는 영민한 ‘저널리스트’의 화려한 지성과 미숙한 정신을 선명하게 그려낸다. 

헥터가 아이들에 대해 품는 애정, 그리고 데이킨이 어윈에게 느끼는 연심은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권장되었던 동성애적 유대감을 바탕으로 한 연장자와 소년의 사제 관계를 연상시킨다. 자신의 손버릇을 변명하는 헥터의 위험천만한 궤변 ‘교육은 원래 어느 정도 에로틱한 것’이라는 주장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님을 작품은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헥터와 아이들은 세상과 구별되는 자신들만의 아지트에서 현실과 맞서 싸우면서 자신을 지킬 수 있게 도와주는 비밀 결사를 유지한다. 

그들만의 룰과 암호, 은밀한 눈빛 교환과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로 지켜지는 세계 안에서 그토록 매력적으로 반짝이던 아이들은 자라서 그런대로 괜찮거나, 그냥 그저 그런 어른이 되었다. 린톳 선생님은 다소 차갑고 건조하면서도 어떤 경멸도 드러내지 않는 위엄 있는 어조로 그들의 현재를 설명한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가장 기대에 미치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포스너에 이르렀을 때 그 목소리에는 가벼운 포옹 같은 은근한 온기가 실린다. 

이휘종의 포스너는 이 캐릭터가 다른 친구들보다 어리다는 설정을 분명히 살리면서 이 ‘아픈 손가락’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초연과 재연에 이어 다시 한 번 스크립스 역을 맡은 안재영은 매력적이고 어른스러운 관조자로서 극의 일관된 정서를 잘 잡아주었다. 악타 역의 황호진은 주어진 대사와 설정 이상의 생동감으로 작품의 볼륨감을 더하는 데 일조했다.

누구 하나 빼놓을 수 없이 입체적인 캐릭터들로 가득한 작품이지만 주제 면에서 누구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냐고 묻는다면 헥터와 포스너를 꼽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가 없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그 고통을 끌어안고 그저 주어진 세상 너머에서 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낭만적인 패배자들이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초라하고, 가엾고, 밉고, 사랑스러운 영혼들. 교실 안의 모두가 새순이 돋아난 어린 나무 같았던 지난여름, 성장기라고 불리는 그 눈부신 시절이 지난 후에도 그때와 다름없는 예민한 영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성공적인 생존자가 될 확률을 한없이 떨어트리는 지름길이다. 하지만 그래도 살아남는다면,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이 건네받은 것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다시 넘겨줄 수 있다고 이 연극은 속삭이고 있다. 10여 년 전 이 작품에 대해 썼던 글을 다시 인용하고 싶다. 

 

인생의 여름이 지나갈 때, 우리는 그것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슬퍼하면서 안도한다. 그 여름이 너무 뜨겁고 푸르러서 차마 넘기지를 못하고 부서져버리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부서지지 않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세상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누군가에게 이어받아 다음의 누군가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된다. 

이는 세계와 나를 연결시키는 방법이지만, 나 자신의 지난 한때와 현재의 나 사이에 연속성을 유지하게 도와주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변하고, 늙고, 죽어가겠지만, 변하지 않는 무엇이 세상에서 영속하게 돕는 한 ‘마디’가 될 수도 있는 존재인 것이다. 

 

<히스토리 보이즈>가 여전히 낡지 않고 같은 이야기를 흔들림 없이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4호 2019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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