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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PECIAL] 2019년, 뮤지컬의 여성 캐릭터를 돌아보다 [No.195]

글 |이응 공연 칼럼니스트 2019-12-06 8,356

2019년, 뮤지컬의 여성 캐릭터를 돌아보다

 

2019년은 독특한 해였다. 미투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던 2017년을 페미니즘 리부트의 해라고 한다면, 2019년은 그렇게 떠오른 페미니즘이 뮤지컬 시장에 미친 영향을 확인한 해라고 할 수 있다. 뮤지컬의 주 관객층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마치 처음 깨닫기라도 한 듯, 너나없이 여성 인물을 변경하거나 주체적으로 만들었음을 내세웠다. 여성주의 혹은 여성주의적이라는 단어를 홍보에 사용하고 실제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며, 그렇게 내세운 여성 인물이 주체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는 작품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주체적인 여성이라는 홍보 문구를 뮤지컬 시장에서 이토록 빈번하게 보았던가. 기존의 뮤지컬들도 재연을 올리면서 여성 등장인물을 주체적으로 바꾸었음을 변명처럼 내걸었다. ‘주체적 여성’이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존재가 뮤지컬 시장을 유령처럼 떠돌았다. 어딘가에는 있다는데 그게 뭔지는 보이지 않았던 그 주체적 여성의 존재 여부를 떠나서 시장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 듯하다. 2019년 한 해 동안 179편의 뮤지컬이 무대에 올라왔다. 연초에 초연을 올리고 연말에 재연에 들어가서 두 번씩 집계된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긴 해도 여전히 엄청난 숫자다. 심지어 수도권 밖에서 공연된 작품은 포함되지 않은 수치다. 이 가운데 국내 창작뮤지컬 프로덕션은 134편, 라이선스 뮤지컬 36편, 내한 공연은 9편이다. 이 가운데 여성이 주인공이거나 주체적인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거나, 기존의 여성 인물을 주체적인 인물로 수정했거나 젠더밴딩, 젠더프리 캐스팅을 이슈로 삼았던 작품들이 있다. 

 

2019년의 괄목할 만한 성과

올해 개막한 여성이 주인공인 뮤지컬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음악극 <섬: 1933~2019>를 꼽고 싶다. 마가렛과 마리안느라는 두 명의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들 사이에 허구의 인물인 백수선과 고지선의 이야기를 배치한 팩션 다큐멘터리 뮤지컬이다. 제작은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등을 올리며 사회적인 이슈를 적극적으로 무대화하고 있는 우란문화재단이 맡았다. 형식적으로는 뮤지컬이 아닌 음악극을 표방해 노래로 드라마를 끌고 가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인물들의 감정 상태를 대변하는 음악과 가사를 배치했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작품 여백은 네 명의 드라마로 빼곡히 채웠다. 소록도에서 평생을 봉사하고 떠난 마가렛과 마리안느의 실화 앞뒤로 그들보다 먼저 섬에 도착했던 환자 백수선의 이야기를, 그들이 떠날 즈음에는 지적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고지선의 이야기를 만들어 세 개의 타임 테이블을 통해 교차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을 이어주는 사람은 소록도에서 태어났지만 한센병 환자가 아니어서 어머니와 격리되어 살아야 했던 백수선의 딸이다. 약 백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타인의 고통인 질병이 사회에서 어떻게 터부시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그런 상황에서도 한 가닥의 희망은 없는 건 아니라고 역설한다. 이 가운데서 여성 인물은 남성의 각성 도구로 사용되지 않으며 남성에게 트로피처럼 주어지지도 않는다. 이 네 명의 여성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 나가는 것만으로도 빠듯하다. 누구로부터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지만 그걸 기대하지도 않는다. 세상이 그들에게 이해라는 너그러움을 베푼 적이 없지만, 객석에 앉은 관객으로부터 깊은 공감을 얻는다.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네 명의 여성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사랑도 하고 누군가는 결혼해 아이도 낳지만 그 모두가 그들의 삶을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다소 아쉬운 무대 동선에도 불구하고 인물들과 그 인물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주는 감동이 아쉬움을 훌쩍 상회한다. 

 

삭제된 어머니들

올해 개막한 여성 서사를 내세운 뮤지컬 가운데 가장 많은 화제를 불러 모았던 작품으로는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을 들 수 있다. 실존 인물인 에바 호프와 이스라엘 정부가 카프카의 미공개 육필 원고의 소유권을 두고 법정 싸움을 벌인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얻었는데, 동네에서 미친 노파로 취급받으며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호프의 이야기를 다룬다. 호프의 외로움은 읽히지 않은 원고, 읽히지 않은 인생이라는 설정을 통해 드러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원고가 읽히지 않은 이유는 원고에 미친 사람처럼 집착했던 호프 당사자조차 그 원고를 단 한 글자도 읽지 않고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존 인물이었던 에바 호프는 어머니가 2007년, 101세로 세상을 떠날 때 일흔넷이었다. 평생을 어머니와 함께 살았고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다. 이스라엘 정부가 원고 반환 소송을 걸자 어머니 에스더가 남긴 유산을 모두 가장 비싼 변호사를 사는 데 쓰면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가 받은 유산 대부분은 에스더가 카프카의 육필 원고 『재판』을 소더비 경매에 내놓아 받은 약 200만 달러를 기반으로 한다. 이들은 독일 정부로부터 매달 유대인 피해 연금도 받고 있었다. 윤택한 삶을 살던 호프가 투사로 변신한 것은 9년에 걸친 원고 반환 소송 때문이다. 실존 인물 호프는 이스라엘 정부의 시오니즘을 비난하며 정부에 반기를 들고 소송에 패하자 머리를 밀어버리고 항의를 지속하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의 관 위에 묻힌다. 반면 뮤지컬은 호프의 인생을 각색해 호프를 극단적인 불행 속으로 몰아넣는다. 에스더가 실존 인물 브로트를 만난 것은 이스라엘로 이주한 후였지만 뮤지컬에서는 체코에서부터 연인 사이로 설정됐다. 브로트는 카프카의 원고를 에스더에게 맡기고 에스더는 미친듯이 원고에 집착하게 된다. 또한 호프를 실제 사실과 달리 외동딸로 설정하고, 어린 호프는 수용소에서 무고한 타인을 죽음으로 밀어 넣으면서까지 어머니를 보호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딸을 두려워하며 더욱 거리를 둔다. 결국 호프는 어머니가 보관한 원고를 훔쳐 몰래 암시장에 내다 파는데 그 돈마저 연인이라고 생각했던 남자에게 모두 빼앗겨버린다. 불행에 불행이 겹친 호프는 어머니와 연을 끊고 살다 어머니의 죽음을 통보받은 후 어머니의 옷을 입고 그 자신이 어머니처럼 원고에 집착하는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 뮤지컬 속의 호프는 30년 넘게 소송에 시달리는 인물로 그려지다가 마지막에 원고를 빼앗기고서야 자신의 인생과 자유를 돌려받는 환희를 맛본다. 사실 여부를 떠나 구부정하고 괴팍한 노인이 되어버린 호프가 비로소 인생의 자유를 맛보는 마지막 장면은 깊은 감동을 주지만 어머니의 존재를 대신한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호프의 원고는 ‘젊고 잘생긴 남자’ K로 형상화된다. 이 작품에서 호프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는 존재는 어머니다. 당연한 듯 주어지던 어머니의 사랑이 어느 날 끊기는데 그 이유가 원고라는 생각은 노파가 된 이후에도 계속된다. 실존 인물이었던 여성을 다루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현실의 비극보다 더 큰 비극을 부여하며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에게 주어진 비극이 모자라기 때문일까? 극적 완성도의 차이는 있지만 실존 인물 강향란을 다룬 뮤지컬 <낭랑긔생>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실존 인물 강향란은 기생이 되어 기방에서 독립한 후 어머니를 불러 함께 살지만 뮤지컬 속 강향란의 어머니는 병들어 세상을 떠난다.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담긴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도 읽을 줄 몰라 어머니의 죽음을 뒤늦게 깨닫고 오열하며 각성하는 인물이다. 강향란이 자신을 기생으로 팔아버리는 아버지에게 항의하지 못했던 이유도 병에 걸린 어머니의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서지만 그는 1막 내내 시종일관 동료 기생들을 혐오하며 약값을 벌 기미가 보이지 않는 행동을 계속한다. 여성인 인물에게 비극을 선사하기 위해 가장 먼저 삭제하는 것이 ‘어머니’다. 

여성 인물의 드라마에 비극성을 더하기 위해 어머니의 삭제가 이루어진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단지 모성애를 내세워 장면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여성이 쓰이는 경우도 있다. 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영 가문의 조부에서 손자로 이어지는 살인의 연대기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조부는 생존을 위해 살인을 하는데 그치지 않고 개인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이 속했던 가장 낮은 계급인 9지구의 비밀을 쥐고 1지구에 투신한다. 이때 그를 받아주는 사람은 모성애가 극대화된 여성이다. 피 묻고 다친 그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신분세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이후 다시 등장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의 입에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실제 그가 받아들여지는 계기는 그가 품고 온 9지구의 비밀에 있지만 무조건적인 모성애를 보여주는 여성의 실루엣을 통해 ‘해결’하고 버린다. 이 작품 속에서 대부분의 여성 인물들은 미국 영화 속의 철없고 속물적인 십 대처럼 그려지고 오로지 루미만이 그들과 다른 가치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영 가문의 세 남자는 마치 세포분열이라도 한 듯 어머니 없이 태어난 사람들처럼 남자들만의 삶을 이어간다. 박지리의 원작 소설에서는 다윈의 『종의 기원』처럼 영 가문의 악이 조부로부터 시작되어 점점 진화를 거듭하며 다윈에게서 이기심의 완성을 보는 것과 달리 뮤지컬 속의 다윈은 인간성을 잃지 않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삼대의 악을 그들 자신의 이기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 탓으로 돌린다. 조부는 대장이 자신들을 배신해서, 아버지는 친구가 야비하게 아버지의 과거를 파헤쳐서, 아들은 친구가 자신의 안락한 삶을 뒤흔들어서, 이들이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는 아들 세대로 내려올수록 점점 더 개인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데, 이유는 한결같이 상대방이 제공하며 살해당하는 인물들은 아들대로 올수록 오히려 더 선해진다. 악이 아들인 다윈에서 진화가 완성되기 때문인데 뮤지컬 속 다윈에게서는 악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 측은함을 쌓는다. 



 

남성을 위해 존재하는 여성

여성 인물들에게 비극을 더하기 위해 서슴없이 어머니나 연인 같은 존재를 앗아가는 반면 남성이 주인공이 되면 여성은 어머니이거나 속물, 혹은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로 변해 버린다. 아니면 남성 인물이 행한 악행의 속내를 보여주어 겉으로는 악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변명의 도구로 사용된다. 남성 인물이 주인공이 될 때 그 주변 여성들은 대책 없이 그를 사랑하고 보필하는 것 말고는 등장할 방법이 없을까? 올해 개막한 <파가니니>나 <니진스키>는 예민한 예술가들로 유명세를 떨친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다. 파가니니는 십 대 소녀에 대한 집착으로 유명했지만 뮤지컬 속의 파가니니는 순진할 정도로 바이올린과 사랑밖에 모르는 인물로 그려진다. 실존 인물이었던 샬롯 왓슨은 뮤지컬 <파가니니>에서 샬롯 드 베르니에의 모델이 되는데 파가니니를 만났을 당시 샬롯 왓슨의 나이는 열여섯이었지만 뮤지컬 속의 샬롯은 최소한 성년은 넘은 것으로 그려진다. 나이가 변경되기는 했지만 샬롯은 여전히 파가니니와 아버지, 약혼자, 성직자 등의 남자들 사이에서 탁구공처럼 오가며 남자들의 게임을 지속하게 해주는 인물로 전락한 뒤 아련하게 사라져 버린다. 막상 파가니니의 구명 운동을 벌이는 것은 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정신병으로 세상을 떠난 천재 발레리노 니진스키는 제작자 디아길레프의 수많은 동성 연인 중의 한 명이었지만 뮤지컬 <니진스키>에서는 소유욕 강한 우정으로 포장된다. 그리고 니진스키의 팬이었다가 아내가 되는 로몰라는 니진스키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우상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지지와 애정을 보여주는 믿기 힘든 순애보적인 인물이다. 여성은 주인공으로 내세워지고 비극이 더해지지만 남성은 주인공으로 자기 발로 나서며 그 자신을 위한 수많은 변명의 도구로 여성들을 부린다는 이 도식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여성을 제목에 내세워서 기대가 컸던 <아랑가>나 <난설>의 경우 제목과 달리 <아랑가>의 주인공은 백제의 마지막 왕 개로왕이고, <난설>의 주인공은 허균이다. 백제의 도미부인 전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아랑가>에서 개로왕의 전사는 무녀의 예언에서 꿈으로까지 다양하게 보여지지만 도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는 아랑의 전사는 전무하다. 그나마 유일한 전사는 아랑가를 아버지가 지어 불러주었다는 것인데 이는 우연히 어린 시절 아랑을 만났던 개로왕이 그 노래를 기억한다는 인연의 끈으로 사용될 뿐이다. 하다못해 아랑의 집에서 일하던 하인에게도 있는 전사가 아랑에게는 없다. 이 작품은 아랑이 어쩌다 도미와 사랑에 빠졌는지조차 알려주지 않으며, 아랑은 이미 도미 밖에는 모르는 여인일 뿐이다. 도미와 개로왕이 아랑을 두고 설전을 벌이는 장면에서 아랑은 무대 위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두 남자의 설전에서 완전히 소외되는데, 아랑이 두 남자의 소유권 싸움에서 발언권이 없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난설> 역시 이름에 내세운 인물은 난설이지만 극 중 이야기는 허난설의 동생 허균으로부터 출발한다. 허균이 사형을 당하기 전날 밤 난설을 추억하면서 난설이 사랑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남자인 스승 이달을 호출하여 둘이 난설을 떠올리는 내용이다. 난설은 두 남자의 기억 속에서 완성된다. 율곡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아들로 두었던 신사임당에 비해 요절한 난설의 인생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인데, 실제 할 말을 참지 않았고 주변 인물들을 놀래켰던 난설의 인생에 비해 뮤지컬에서 그려지는 난설은 스승 이달과 동생 허균이 이끄는 인물로 그려진다. 난설의 아름다운 시구가 노래로 불리고 바닥에 쓰이는 것을 보는 기쁨이 큰 반면, 난설이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그 결정을 자신보다 어린 남동생이나 한참 나이가 많은 스승 이달이 하게 두는 것을 보는 심정은 참담하다. 난설과 이달의 행적을 관아에 고발해 잡혀가게 했던 허균이 난설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에게 난설을 이달과 함께 도망가게 해달라고 비는데, 정작 이달은 나타나지 않고, 난설은 허균이나 아버지의 결정에 어떠한 의견도 내놓지 않는다. 제목에 여성이 있고 주인공도 여성이라고 하나 남성들의 소유물이거나 남성들의 시각에서 그려지는 여성은 그들의 노스탤지어로만 존재하는 인물이 되어버린다. 

재연작 <어쩌면 해피엔딩>은 미래 안드로이드의 사랑을 바탕으로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사랑을 다루어서 심금을 울리지만, 이 안에서 여성 로봇으로 등장하는 클레어는 여성에게 부여된 온갖 정형성의 집합체 같은 인물이다. 이 여성 로봇은 심지어 주인공인 올리버보다 한 단계 높은 레벨의 로봇임에도 불구하고 배터리 성능은 더 떨어지고 올리버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또한 여성의 외양을 하고 있기에 기계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공감 능력은 뛰어나지만 고통에는 약한 모습을 보인다. 칩거하는 로봇으로 등장하는 올리버는 더 낡았음에도 불구하고 옛날 음악인 재즈를 좋아하고 식물을 키우는 등 아날로그적인 취미 생활을 갖춘 인물이지만 클레어는 취향이 드러나지 않는 ‘여성’이다. 게다가 상냥하다. 올리버와 클레어를 사람으로 치환하자면 나이 많고 쑥맥인 외톨이 공대생이 꾸준히 자신의 이상을 위해 매진하자 어느 날 꿈처럼 상냥하고 아름다운 여성 클레어가 부상으로 주어지는 셈이다. 클레어는 심지어 올리버를 사랑하게 된 이후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신의 기억을 지워버릴 정도로 약한 존재지만 올리버는 그 모든 기억과 고통을 감수하고 클레어를 돕는 장한 남성으로 성장하기까지 한다. 해피엔딩은 로봇이면서 성장까지 이루어낸 올리버의 것이지 클레어의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이름의 억압

사랑하는 여성을 치유한다며 다른 여성에게 칼을 휘두르는 주인공이 순정 살인마로 포장되는 <잭 더 리퍼>를 비롯한 많은 라이선스 뮤지컬들이 올해도 다시 재연됐다. 그 가운데 여성 인물인 기네비어를 주체적인 여성으로 그렸다며 당당히 첫선을 보인 <엑스칼리버>는 영화를 연상케 하는 장대한 무대 디자인으로 눈길을 끌었지만 기네비어의 경우 전적으로 아더에게 얽매인 인물로 그려진다. 처음 등장할 때 단 한 번 활을 들었을 뿐 기네비어는 아더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했다가 변덕스러운 그에게 질려 랜슬롯과 사랑에 빠진 뒤 그런 자신을 벌하기 위해 수녀원으로 향한다. 이는 같은 소재를 바탕으로 하는 <킹아더>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억압하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더를 선택하는 기네비어는 마치 동쪽 감옥이 싫어서 한 번도 못 가본 서쪽 감옥을 선택하는 여성과도 같다. <드라큘라>의 미나도 사정은 매한가지다. 미나는 전생의 남자 드라큘라 백작과 현생의 남자 조나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도 헤픈 여자로 그려지는 루시와 드라큘라의 신부들을 통해 간신히 ‘다름’을 드러낸다. 더군다나 드라큘라 백작은 미나를 몇백 년이나 사랑해 왔다면서도 수많은 여성들의 피를 빨고 신부로 삼는 인물로, 정절이란 오로지 여성 인물에게만 강요되는 미덕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올해 개막한 작품 가운데 최악으로 기억되는 작품은 <1976 할란 카운티>다. 여성 감독인 바바라 코펠의 원작 다큐멘터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할란 카운티의 파업을 목숨을 걸고 지켰던 바바라 코펠과 세 명의 크루는 온데간데없고 대신 외부에서 등장한 다니엘이라는 백인 남성 구원자가 자발적인 흑인 노예와 함께 나타나 위기에 빠진 할란 카운티를 구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은 남성의 ‘큰일’인 파업을 사랑 때문에 가로막거나 병에 걸려 콜록거리다 죄를 짓는 오빠의 면죄부로 등장할 뿐이다. 게다가 더 놀라운 점은 이 안에 담긴 끔찍한 시혜적 박애주의다. 인간애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흑인 노예 라일리는 심지어 말하지 못하는 장애인이다. 말 못하는 라일리는 다니엘의 부모가 사온 노예인데 다니엘이 어릴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돌봐주며 다니엘의 죄를 대신 덮어쓸 정도로 충절을 보여준다. 백인들이 자신을 아무리 짐승처럼 여겨도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라일리는 백인들에게 사랑받기에 충분한 ‘착한’ 흑인이다. 그는 심지어 마지막에 다니엘을 대신해 총을 맞고 죽기까지 한다. 다니엘은 그의 무덤에 꽃을 바치며 이제야 캔터키주에서 노예제 페지가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선물이라며 알린다. 2019년 한국에서 쓰인 뮤지컬에서 백인 중심적인 박애주의와 여성 혐오를 목격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탄광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서 싸운다는 작품에서. 

 

여성은 옳아야 한다는 강박이 낳은 평면성

뮤지컬 <마리 퀴리>, <낭랑긔생>, <난설>,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헬렌 앤 미> 등은 좋은 소재를 선점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인물들을 평면적으로 그린다. 특히나 이 작품들 속 여성들은 항상 옳은 말, 옳은 행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그 강박이 인물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남성 인물들이 옳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기는커녕 하고 싶은 일은 살인부터 불륜까지 자유자재로 저지르고 다닐 때 여성 인물들은 단어 하나, 표현 하나, 행동 하나까지 옳아야 한다는 내적 억압에 시달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만큼 흔하게 주어지지 않은 기회이기 때문에 여성 인물을 완벽하게 그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강박이 지니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여성 인물들에게 주어진 현실이자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무대에 등장하는 여성이 올바른 사람이기를 바란다는 강렬한 바람에 공감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대체 ‘옳은’ 인간의 기준은 누가 정할 수 있을까. 이 애잔하면서도 공감되는 옳음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여성이 한 인간으로서 무대 위를 휘젓는 모습을 보기를 관객의 한 명으로서 기대한다. 왜 여성들은 그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옮음을 강요당하는가. 그것도 여성 그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조금 더 뻔뻔해지고 욕망에 충실하고 그로 인해 가끔은 길도 잃는 그런 살아 있는 여성 인물을 만나기 위한 길 위에 2019년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기에 미래를 향한 희망이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5호 2019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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