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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쓰릴 미>​, 계속되어야 할 주도권의 싸움 [No.197]

글 |정수연 공연 평론가 사진제공 |달컴퍼니 2020-02-26 3,124

<쓰릴 미>
계속되어야 할 주도권의 싸움 


 

<쓰릴 미>의 영향력

뮤지컬 <쓰릴 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새삼스럽다. 2007년 초연된 이후로 지금까지 거의 거르지 않고 매년 공연되었기에 그만큼 익숙해진 탓일 거다.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도 아직도 높은 관심을 유지하다니. 국내에도 몇몇 오픈런 장기 공연이 있긴 하지만 그 작품들과는 달리 <쓰릴 미>는 여전히 뮤지컬 관객의 시야 안쪽에 있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이 그간 만들어온 게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단지 화제의 공연에 머물렀다면 이 작품의 수명은 진즉에 다했을 테니 말이다. <쓰릴 미>가 만들어낸 것은 바로 흐름이다. <쓰릴 미> 이전과 이후로 뮤지컬의 경향을 나눌 수 있도록 이 작품은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쓰릴 미> 같은 작품’을 지향하는 창작뮤지컬이 많아진 것은 이 사실을 증명한다. 이런 흐름은 지금까지도 힘을 발휘하는바, 그 힘은 이 작품을 현재형으로 지속시키는 토대가 되고 있다. 
 

이 작품이 만들어낸 흐름은 여러 갈래이다. 텍스트부터 그렇다. 동성애, 유괴, 살인 등의 자극적인 소재와, 천재라는 명목의 일반적이지 않은 주인공들이나, 진실이 밝혀지는 마지막의 반전 등은 이후의 창작뮤지컬에서 적극적으로 응용되면서 놀랍게 확장되었다. 공연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두 명의 배우와 한 대의 피아노로 구성된 무대 등 미니멀리즘의 밀도는 창작뮤지컬의 공연 형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소화를 통한 최대화의 효과. 이런 실증적인 경험은 경제적인 효율 위에 미적인 가치를 쌓을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이어졌으니, 공연의 외적인 규모를 축소시키는 만큼 자극이 세고 밀도가 높은 이야기에 집중하는 창작뮤지컬의 경향은 <쓰릴 미>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주목할 것은 이 작품으로부터 취향 중심의 관극 문화가 본격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반복 관람은 취향의 문화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현상인바, 반복 관람을 통해 새로운 형태로 탄생한 공연의 주체는 다름 아닌 관객이다. 이전까지는 작품의 권위나 유명세가 관객을 끌어당기는 주된 동력이었다면 취향 위주의 문화에서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는 오로지 관객이니, 각자의 관점으로 작품을 해석하고 각자의 취향으로 공연을 즐기는 관객 중심의 문화가 이 작품을 통해 제대로 시작된 셈이다. 여러 번의 관극을 통해 작품의 디테일에 대한 이해도는 높아지고 매 공연의 차이와 반복을 찾아내는 재미는 넓어진다. 그런 만큼 작품에 대한 이해에서 <쓰릴 미>의 관객이 새로운 창작진보다 앞선 자리에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관객은, 말 그대로 공연의 주체로서(경제적인 면뿐 아니라 의미적인 면에서도!)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되돌아온 부메랑

이 작품의 시즌이 반복될수록 관객의 호평을 끌어내기가 어려워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새로운 시즌의 공연이 어떠한 해석과 어떠한 형상화를 한다 해도 짧게는 몇 년이요 길게는 십 년 넘게 이를 지켜봐 왔던 관객을 설득하기에는 벅찰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쓰릴 미>의 포커스는 진즉부터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에 맞춰져 왔다. ‘무엇’의 중심에는 작가가 있지만 ‘어떻게’의 중심에는 배우와 연출이 있으니, 이 작품이 수많은 배우들의 산실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대다수 연출가들의 무덤이 됐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관객이 기대하는 ‘어떻게’를 넘어서지 못할 때 공연이 시도한 해석과 표현은 아예 외면당하기도 한다. <쓰릴 미>의 관객이 유독 까다롭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의 공연이 어떻게 익숙한 것을 재현하며 어떻게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지켜보고 판단하는 것은 대중극의 관객이 즐기는 최고의 재미인바, 이런 관극 방식은 서양의 왕정복고 시대에서부터 우리의 신파극에 이르기까지 대중극의 일반적인 법칙이지 않던가.
 

이러한 관객의 취향을 돌파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시 ‘무엇’으로 되돌아가는 길밖에 없다. 이 작품이 긴 시간 동안 관객을 사로잡았던 매력은 무엇인지, 인물들의 관계는 어떤 역학에 놓여 있는지, 이 작품의 고유한 에너지가 무엇인지, 이런 코드가 충분히 익숙해진 지금의 관객에게 원조인 이 작품을 다시금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새삼스러울 만큼 진지한 접근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미니멀리즘은 공연을 만드는 이들의 역량을 시험하는 또 하나의 텍스트이기도 하다. 관객이 해석하는 텍스트와 공연이 해석하는 텍스트가 맞부딪히며 불꽃이 튀길 때 작품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시즌의 공연에 그런 불꽃을 튀길 만큼 튼실한 해석이 있다고 보긴 어렵다. 두 남자의 관계는 지배와 복종의 위치를 바꿔가며 심리적 밀도를 더해야 하건만 젊은 배우들은 순간마다 요동치며 관계를 역전시키는 심리적 입체의 표현에 능숙하지 않더라. 작품을 이끌어가는 커다란 동력이 반감된 셈이다. 두 남자의 심리적 밀도가 사라졌을 때 드러나는 것은 이야기의 허세이다. 니체의 초인 운운하며 범죄를 저지르는 품새가 이렇게 유치했구나. 새삼스럽다. 공간 역시 심리적인 장소가 되어야 하건만 물리적 장소 설명에 치중하느라 밀도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천장이 높지 않은 극장에 굳이 필요하지 않은 2층 공간을 설정한 것이나, 거실 안에 뜬금없이 나무를 박아놓은 불필요한 친절함(숲이 필요하니까!)도 그렇고, 굳이 필요하지 않은 뒷면 공간을 열기 위해 가뜩이나 답답한 무대에서 깊이까지 없애버렸으니, 그리 크지 않은 무대의 좌우가 유독 멀어 보인 것은 이 때문이다. 암전의 설득력이 사라진 것도 공간의 탓이 크다. 
 

해석이 보이지 않을 때 이 작품은 쉽게 진부해져 버린다. 지금 이 정도의 공연이라면 창작뮤지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이며 만듦새이지 않나. 모든 것을 파괴시킬 만큼 강한 정념의 소유자들이지만 그 욕망이 몸의 파격을 입지 못한 채 대사로만 온건하게 표현되는 것도 그렇고, 배우가 연기로 만들어내는 몫보다 배우 자체의 개별성이 더 도드라지는 것도 그렇다. 그 개별성에 연기가 차지하는 지분이 크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요즘 창작뮤지컬에서 자주 보는 모습이기도 하다. <쓰릴 미>가 ‘<쓰릴 미> 같은 공연’의 영향을 받은 셈이다. 레시피를 전수했던 원조 집의 맛이 체인점보다 뒤떨어졌으니 어쩌나. 굳이 <쓰릴 미>여야 할 이유도 희미해지고 만다.  

 

또 다른 분기점이 되려면

이것은 비단 이번 시즌뿐 아니라 지나간 여러 시즌의 공연들이 빠졌던 함정이기도 하다. <쓰릴 미>의 역설이 이것이다. 이 작품으로부터 시작된 흐름의 영향을 받는 순간 이 작품의 매력은 깡그리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 자기로부터 거리 두기를 해야 자기다움을 찾을 수 있다는 역설이 생겨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전 시즌의 공연을 의식하거나 관객의 반응을 의식하느라 원래의 멋을 놓쳐버릴 때가 많았다. <쓰릴 미>로서는 위기다. 이런저런 말을 할 수는 있을 거다. 이야기는 다시금 범죄물과 심리극과 로맨스의 복합적인 결을 되찾아야 하고, 지배자이고 복종자이며 연인이면서 서로에게 악마인 두 사람의 입체적 관계를 끝내주게 표현하는 배우를 찾을 것이며, 미니멀리즘에 걸맞은 공간의 상상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공연됐던 수많은 버전에 대한 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 등등.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필요한 것은 관객을 향한 상상력이다. 작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관객과 작품을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공연진은 이머시브의 상상력으로 엮일 필요가 있다. 공연이 펼쳐놓은 틀과 관객이 선택하는 해석이 충돌하다가 어울리면서 의미를 넓혀 나갈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 말이다. 마치 ‘나’와 ‘그’의 관계 같다. 일방적으로 밀리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주도하게 되는 역전과 전복의 유기적인 관계. 관객과 공연 역시 이런 관계여야 한다. 그렇다면 공연으로서는 이런 대등한 싸움을 할 수 있을 만큼 상대를 향한 강한 정념이 있는지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너를 붙잡고야 말겠다는 뜨거운 욕망은 공연의 몫이어야 한다. 느슨한 ‘나’는 강한 ‘그’를 소유할 수 없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7호 2020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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