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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FOCUS] ‘젠더프리’를 재고하다 [No.197]

글 |조연경 공연 칼럼니스트 2020-02-27 10,532

‘젠더프리’를 재고하다


 

뮤지컬 <미드나잇: 앤틀러스>에 여성 배우 유리아가 비지터 역으로 출연한다는 사실이 공개되어 화제다. 초연 때는 남성 배우가 맡았던 역할이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젠더프리 캐스팅’이다. 몇 년 사이에 젠더프리 캐스팅이라는 말이 흔해지면서 이 말을 표제로 한 기사가 늘었다. 여성 배우 버전으로 바뀐 연극 <비평가>, , <오펀스>의 인기도 이에 한몫했다. 네이버 지식 백과에 등록된 박문각 시사상식사전에 따르면 ‘젠더프리 캐스팅’은 ‘배우의 성별에 관계없이 배역을 정하는 캐스팅’을 뜻한다. ‘기획 단계부터 배역에 젠더를 정해 놓지 않거나, 젠더가 고정된 배역이라도 이를 연기할 수 있는 배우라면 성별을 불문하고 누구나 캐스팅하는 방법’이라며, ‘그간 맡을 수 있는 배역이 한정되어 있던 여성 배우들에게 더 다양한 배역과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더 나아가 성별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시도되고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영어로 구글에 ‘Gender-free Casting’을 검색하면 주로 한국어 문서가 나온다. 따지고 보면 젠더프리 캐스팅이라는 말 자체가 조금 어색한 조어다. 2018년 초에 패션 잡지 ‘마리끌레르’에서 여성 배우들이 남성 캐릭터의 대사를 읊는 모습을 보여준 젠더프리 기획 영상을 공개한 이후, 그해 여름부터 젠더프리 캐스팅이라는 말이 기사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남녀 배우가 한 배역을 번갈아 연기하는 것도 젠더프리라 하고, 남성 배우가 연기하던 작품의 여성 배우 버전이 나와도 젠더프리라 한다. 그것도 딱 2018년부터, 국내에서만. 흥미롭게 지켜보던 최신 트렌드에 의문이 생기자 정확한 용어를 찾아보게 됐다. 그러니까 이 글은 우리가 ‘젠더프리’라고 부르던 것들 사이에 선을 긋고 용어를 제대로 쓰자는 제안이다. 

 

젠더프리의 오류와 또 다른 용어들 

한때 여성은 공연 무대에 오를 수조차 없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그랬고, 셰익스피어 연극 속 여성 캐릭터도 남성 배우가 연기했다. 그것도 젠더프리일까? 전통적으로 연극 <피터팬>의 피터팬 같은 소년 역할은 여성 배우가 주로 맡아왔다. 이것도 젠더프리에 포함되나? 우리나라에서도 남성 캐릭터를 여성 배우가 연기하거나, 남녀 혼성 캐스팅으로 한 배역을 연기하는 일은 2018년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걸 젠더프리라고 부르지 않았다. 
 

배우가 자신과 다른 성별의 역할을 연기하는 일은 셰익스피어 시절 이전부터 흔한 방식이었다. 이걸 ‘크로스젠더 액팅(Cross-gender Acting)’이라 한다. 뮤지컬 <헤어스프레이>의 에드나, 뮤지컬 <마틸다>의 트런치불 같은 여성 캐릭터를 덩치 큰 남성 배우가 연기하는 일은 크로스젠더 액팅의 대표 격이라 할 만큼 흔하다. 이는 영국 문화권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주로 공연하는 가족극 ‘판토’의 전통을 잇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편, 여성 배우가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건 수백 년간 남성을 중심으로 이어져 온 공연계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에서 비롯됐다. 그리스 비극이나 셰익스피어 연극 같은 고전극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강렬한 남성 캐릭터인 경우가 많으니 곧이곧대로 캐스팅한다면 여성 배우가 부차적인 역할을 맡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셰익스피어 극이 활발하게 공연되는 영국에서는 이런 현실을 타개하고자 ‘젠더블라인드 캐스팅(Gender-blind Casting)’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인종과 상관없이 캐스팅하자는 개념의 ‘컬러블라인드 캐스팅(Color-blind Casting)’까지 포함하여 이를 ‘블라인드 캐스팅’ 또는 ‘비전통적 캐스팅(Nontraditional Casting)’이라고도 한다. 이는 연기에 성별이나 인종은 크게 중요하지 않으며 고전극에도 백인이 아닌 배우, 여성 배우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2018년 런던 셰익스피어 글로브 시어터에 예술감독으로 새롭게 부임한 여성 배우 미셸 테리는 <햄릿>과 <뜻대로 하세요>를 남녀 동수의 블라인드 캐스팅으로 꾸려 공연했다. 미셸 테리 자신이 햄릿을 맡고, 오필리어는 남성 배우 슈밤 샤라프가 맡았다. <뜻대로 하세요>에서는 남성 배우 잭 라스키가 로잘린드 역을 맡고, 청각 장애를 지닌 여성 배우 나디아 나다라자가 셀리아 역을 맡아 수어로 연기했다. 성별, 인종, 장애 유무와 상관없는 캐스팅으로 오늘날에 걸맞은 셰익스피어 극을 빚어낸 것이다. 
 

블라인드 캐스팅은 소수자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됐으므로 백인·남성 배우가 다른 인종, 다른 성별을 연기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중립적인 용어가 착각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 최근에는 ‘컬러블라인드 캐스팅’보다 ‘컬러컨시어스 캐스팅(Color-conscious Casting)’이라고 부르는 쪽으로 논의가 기울고 있다. ‘젠더블라인드 캐스팅’ 또한 마찬가지다. 이것이 여성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시작된 시도라는 사실은 종종 남녀의 동등한 기회를 강조하는 분위기와 성소수자 이슈에 묻혀 잊히곤 한다. 그래서 여성에게 주체적인 역할을 부여하기 위해 캐릭터 성별에 상관없이 전 배역을 여성으로 구성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필리다 로이드 연출가는 여성 배우만의 셰익스피어 3부작을 무대에 올렸다. 2012년 <줄리어스 시저>, 2014년 <헨리 4세>, 2016년 <템페스트>까지 가볍지 않은 작품들로 구성되어 처음에는 공연 관계자들조차 회의를 품었지만 막이 오른 후엔 관객 반응이 대단했다. 
 

블라인드 캐스팅이 연기만 잘하면 누구든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다는 소극적인 개념이라면, ‘젠더벤딩(Gender-bending)’이나 ‘젠더스와프(Gender Swap)’는 위에서 언급한 셰익스피어 3부작처럼 더 적극적인 연출 방향을 보여주며 여성 배우의 활동 영역을 넓힌다. 젠더벤딩과 젠더스와프는 배우가 자신과 다른 성별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경우, 그리고 배우 성별에 맞춰 캐릭터의 성별을 바꾸는 경우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프랑스 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1900년경 이미 여성 햄릿으로 유명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역시 최근 탄생한 유행은 아니다. 
 

2016년에 런던 올드빅 시어터에서 리어왕을 연기한 80대 여성 배우 글렌다 잭슨은 2019년 같은 공연으로 미국에 진출하며 브로드웨이 최초의 여성 리어왕이 됐다. 2018년 치체스터 페스티벌 시어터에서 공연한 <리어왕>은 리어왕의 충신 켄트 백작을 여성 캐릭터로 바꿔 그렸다. 아일랜드 여성 배우 시네드 쿠삭의 켄트 백작은 원작과 다른 해석으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반대로 여성 캐릭터를 남성 캐릭터로 바꿔 흥미를 유발하기란 쉽지 않은데, 2019년 올드빅 시어터에서 공연한 <현재의 웃음>은 적극적인 젠더스와프를 통해 전통적인 코미디를 유쾌한 퀴어 코미디로 변모시키는 멋진 성과를 보여줬다. 한 남성과 여러 여성이 얽혀 벌어지는 구닥다리 로맨스에서 두 인물의 성별을 바꾸자 사랑스러운 바이섹슈얼 소동극이 탄생했고, 그 덕에 낡은 작품이 21세기에도 공연될 만한 당위를 획득했다. 반면, 2018년 젠더스와프 버전으로 다시 공연된 손드하임의 뮤지컬 <컴퍼니>는 평가가 엇갈렸다. 35세 미혼 남성 주인공을 여성 캐릭터로 바꾸면서 48년 전 초연한 낡은 작품이 현대적인 옷을 입은 건 긍정적인 변화다. 하지만 결혼 압박에 스트레스를 받고, 출산 문제를 고민하는 삼십 대 중반 커리어 우먼이나 게이 커플의 이야기는 신선하지 않아 젠더스와프의 효과가 와닿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이렇듯 공연계의 다양한 젠더 실험은 연출가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효과를 낼 수 있다. 
 

이제 ‘젠더프리’라는 용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젠더프리는 직역하자면 젠더가 없다는 뜻으로, 말 그대로 무성이거나 성별로 사람을 구분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정체성으로서의 젠더가 다양하게 세분화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그 모든 젠더의 차이를 인식하기보다 젠더를 벗겨내고 사람 그 자체를 중립적으로 보자는 의미로 들린다. 더 단순하게 말하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별을 떠나서 보면 다 같은 사람이니 구분하지 말자는 거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남성 캐릭터에 여성 배우를 캐스팅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거나, 남성 캐릭터의 성별을 여성으로 바꿔 새로운 관점으로 극의 메시지를 전하는 시도를 단순히 젠더에 상관없이 캐스팅하는 방식과 구분하지 않고 ‘젠더프리 캐스팅’이라고 통칭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한 예로, 2019년 국내에서 초연한 연극 <오만과 편견>은 남녀 배우 두 사람이 무대 위에서 다양한 성별의 캐릭터를 표현하지만, 성별을 떠난 젠더프리 극은 아니다. 어떤 장면에서는 자신과 같은 성별의 인물을 연기하고 어떤 장면에서는 다른 성별의 인물을 연기하며 매 순간 크로스젠더 액팅을 자연스럽게 해내고 있다고 표현하는 편이 정확하다. 그리고 어떤 작품이든 잘못된 성별 고정관념을 답습하지 않는 건 젠더프리와 상관없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어쨌든, 국내 젠더프리의 계보 

연극계의 젠더 실험이 최근 더 주목받고 있는 건 사실이다. 2001년에 배우 박정자가 <에쿠우스>의 유진 다이사트 박사를 연기해 국내 최초 ‘여성 다이사트’가 됐지만, 그 이후 다이사트 역할은 늘 남성 배우 차지였다. 2016년 초연한 <함익>은 <햄릿>을 모티프로 변주한 현대 배경의 창작극으로 고뇌하는 여성 주인공 ‘함익’을 내세운 바 있다. <비평가>의 경우 2017년 원작대로 남성 배우가 연기한 초연을 올린 뒤, 2018년 극 중 남성 인물들을 여성 배우가 연기하는 크로스젠더 액팅을 시도했다. 남성 인물들이 쉼 없이 쏟아내는 여성 혐오적 발언, 스카르파가 재현하는 극중극 속 여성 인물을 남성 배우가 연기한 것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여성 배우를 캐스팅한 해당 버전은 큰 호응을 얻으면서 이듬해 재공연됐다. 더블 캐스팅이 일반적인 국내 공연계의 특성상 혼성 캐스팅도 활발한 젠더 실험에 이바지하고 있다. <미저리>는 2019년에 보안관 역으로 고인배와 손정은을 더블 캐스팅해 여성 보안관을 등장시켰다. 나 <오펀스>는 등장인물 전원의 성별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꿔, 해당 이야기가 성별과 상관 없이 유효한 ‘인간 보편의 이야기’임을 강조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전 배역을 남녀 동수의 혼성 캐스팅으로 구성하고, 모든 배우가 성별에 관계없이 연기하며 적극적으로 성별을 지우는 젠더프리를 추구했다. 
 

국내 뮤지컬에서는 2015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헤롯왕을 여성 배우 김영주가 맡은 것이 젠더스와프의 첫 사례다. 헤롯왕은 한 장면에 강렬하게 등장하는 쇼스타퍼로 성별이 바뀌어도 스토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캐릭터다. 그래서 김영주가 캐스팅되었을 때 기발한 결정이고 잘 어울린다는 평이 다수였다. 이 같은 결정을 내린 이지나 연출가는 2017년 초연한 <광화문연가>에서 월하 역에 정성화와 차지연을 더블 캐스팅했다. 월하는 사람의 인연을 이어준다는 전설 속 월하노인에게서 영감을 얻은 인물로, 굳이 성별을 정할 필요가 없는 초월적 캐릭터였다. 그럼에도 당시로서 한 배역에 남녀 배우를 더블 캐스팅하여 번갈아 공연한 건 이례적인 일이었고, 특히 음역대에 따라 편곡이 필요한 뮤지컬에서는 상당히 독창적인 작업이었다. <광화문 연가>는 2018년 재공연 때도 혼성 캐스팅의 전통을 이어갔다. 2018년에는 <더 데빌>이 세 번째 시즌을 맞아 이전까지 남성 배우들만 맡았던 X-화이트와 X-블랙 역에 차지연을 캐스팅했다. 이지나 연출가는 2019년 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서도 젠더 실험을 이어갔다. 극 중 연인 관계인 유진과 제이드의 성별을 고정해 두지 않고 캐스팅 조합에 따라 남-여, 여-남, 남-남, 여-여로 다양하게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성별 변화가 스토리에 큰 영향을 주진 않았지만 관객들의 다양한 취향을 충족시키는 사례가 됐다. 
 

이 밖에도 줄곧 남성 배우들이 맡던 역할에 여성 배우가 함께 캐스팅되는 일이 늘었다. 2016년에는 남성 2인 뮤지컬이었던 <트레이스 유>의 우빈 역에 안유진이 합류하여 화제가 되었다. 안유진은 2019년 <에드거 앨런 포>에 그리스월드 역으로 이영미, 이주광, 박영수와 함께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2017년 <에어포트 베이비> 재공연에서는 딜리아 역에 박칼린이 합류해, 초연에서 게이로 등장했던 인물을 트랜스젠더로 표현했다. 2019년 초연한 창작뮤지컬 <해적>은 루이스/앤 역할에 김순택, 임찬민, 백기범, 잭/메리 역할에 랑연, 현석준, 노윤을 캐스팅해 모든 배우가 극 중에서 남녀 캐릭터를 번갈아 소화하는 구성으로 눈길을 끌었다. 다만 여성이라서 안타까운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앤과 메리 역을 남성 배우가 연기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도 있었다. 2018년 <록키호러쇼>의 여성 캐릭터 콜롬비아 역에 송유택과 전예지가 더블 캐스팅되었을 때도 잡음이 일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여성 배우의 자리를 남성 배우가 빼앗았다’는 의견과 ‘젠더프리라면 남성 배우도 여성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맞붙은 것이다. 이러한 잡음 탓인지 2019년에는 다시 여성 배우만 콜롬비아 역에 캐스팅되었다. 현재 공연 중인 <줄리 앤 폴>에도 여성 배우 김지민과 남성 배우 신창주가 생쥐 나폴레옹 역할로 번갈아 출연한다. 
 

창극도 젠더벤딩을 시도했다. 1인극인 판소리에서 소리꾼은 당연히 성별에 관계없이 여러 인물을 표현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판소리에서 파생된 창극에 성별 구분이 없는 게 당연하지만, 배우들이 역할을 나눠 맡으니 성별도 나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탓인지 창극의 젠더 실험은 늘 화제가 됐다. 국립창극단이 2016년 <트로이의 여인들>과 2019년 <패왕별희>에서 극 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헬레네와 우희 역을 남성 소리꾼 김준수에게 맡겼을 때도 그랬고, 2017년 정동극장이 창극 <적벽>의 제갈공명, 주유, 정욱 등을 여성 배우에게 맡겼을 때도 그랬다. 2020년 공연 예정인 네 번째 <적벽>에서는 처음으로 조조 역에 여성 소리꾼 박인혜가 캐스팅되어 더 비중 있는 크로스젠더 액팅을 볼 수 있게 됐다. 

 

여성 배우의 자리가 늘어나길 기대하며 

제작사와 작품 성격에 따라 어느 정도 캐스팅을 예측할 수 있는 국내 공연계에서 젠더프리 캐스팅은 그 의외성 때문에 늘 화제가 된다. 특히 최근에는 주인공의 친구, 애인, 어머니 등 부차적인 역할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며 극의 흐름을 쥐락펴락하는 역할에 크로스젠더 캐스팅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 만큼, 여성 배우들에게는 그간 보여주지 못한 모습을 꺼내 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주로 남성 배우 차지였던 격렬한 연기를 여성 배우가 소화할 때, 그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 역시 성별 고정관념을 깨는 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지금의 젠더프리 캐스팅은 아쉬운 면이 많다. 혼성 캐스팅이 시도되는 역할들을 살펴보면 애초에 남성일 필요가 없었던 역할이 많기 때문이다. 초월적 존재인 <광화문 연가>의 월하와 <더 데빌>의 X-화이트, X-블랙, <미드나잇>의 비지터는 모두 굳이 따지자면 무성 아닐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너무나 남성 중심적이어서 작가들이 성별이 중요하지 않은 역할은 큰 고민 없이 남성 배역으로 설정해 버리는 일이 많다. 이러한 문제를 인지한 독일의 여성 배우 벨린드 루스 스티브는 대본을 분석해 캐릭터를 ‘남성’, ‘여성’, ‘중립’으로 분류하는 프로그램 ‘네로파(Neutral Roles Parity)’를 개발하기도 했다. 중립적인 캐릭터에 대체로 남성 배우가 캐스팅되는 현실에 조금이라도 균열을 내어 여성 배우의 기회를 늘리려는 의도인데, 이 프로그램을 썼다면 앞서 언급한 배역에도 처음부터 여성 배우가 캐스팅되어 여성 역할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성별이 캐스팅되어도 상관없는 젠더프리를 넘어서, 여성이 출연할 때 작품에 다른 의미가 생기는 단계까지 가야 적극적인 젠더 실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또 하나의 문제는 젠더프리를 표방한 대부분의 공연에서 실제로 캐스팅된 여성 배우는 한두 명뿐이라는 사실이다. 젠더프리 덕에 화제성을 챙긴 작품조차 여성 배우보다 남성 배우가 배역을 얻을 확률이 더 높다. 극소수에게만 부여되는 특별한 기회를 잡은 여성 배우는 당연히 부담감을 느낄 것이다. 자신이 잘못하면 다음에는 그 역할이 여성 배우에게 가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결국 이런 젠더 실험은 여성 서사로 나아가기 위한 중간 단계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남성 배우를 상정하고 쓴 대본에서 연출가와 배우의 해석만으로 새로운 의미를 짜내기란 쉽지 않다. 물론 매력적이고 주체적인 캐릭터가 대부분 남성이다 보니 여성 배우도 그런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당장은 크로스젠더 액팅이나 젠더스와프를 통해서라도 여성 배우가 마음껏 기량을 펼칠 무대가 생기기를 바란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남성 캐릭터 못지않게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만들어져야 한다. 남성의 사랑에만 기대지 않고 주체적으로 움직이며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무게감 있는 여성 캐릭터, 성녀 혹은 악녀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난 다양한 성격의 여성 캐릭터, 좌절하고 나락으로 떨어졌다가도 다시 일어서 성장하는 여성의 서사가 절실하다. 


 

2018년과 2019년을 지나 2020년에도 ‘여성 서사’와 ‘젠더프리’는 공연계의 큰 화두다. 이 기회에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여성 배우의 기량을 펼칠 만한 작품이 늘어나길, 그래서 관객들이 더 풍성한 여성 서사를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여성 배우가 기존에 남성 배우가 연기해 온 역할을 맡거나, 극 중에서 남성 캐릭터로 나오는 그 모든 경우를 뭉뚱그려 젠더프리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한다. 여성이 주도하는 극을 보고 싶다고, 남성 주연 작품의 젠더스와프 버전을 보고 싶다고, 여성 퀴어 서사를 보고 싶다고 정확히 이야기하자. 그래야 뭉뚱그려서 대충 ‘젠더프리’한 작품이 아니라 멋진 여성이 다른 멋진 여성과 연대하여 활약하는 구체적인 작품을 가까운 미래에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7호 2020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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