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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 스탈린의 대숙청, 밤이면 밤마다 사라지는 사람들 [No.198]

글 |김주연 공연 칼럼니스트 사진제공 |모먼트메이커 2020-03-10 5,014

스탈린의 대숙청
밤이면 밤마다 사라지는 사람들 

 

 

매일 밤, 사람들이 하나둘, 때로는 한 가족이 통째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마법이 아니다. 스탈린의 공포 정치가 절정에 다다랐던 1930년대 후반, 소비에트 사회에서 빈번하게 벌어졌던 대숙청의 풍경이다. 사람들은 밤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NKVD의 노크 소리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렸고,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오늘 밤 그 대상이 ‘내가 아님’을 감사하며 잠들었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피의 광풍 

1930년을 전후하여 키로프, 트로츠키 등 쟁쟁한 동료들을 제치고 소비에트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한 스탈린은 이후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의 숙청을 단행했다.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반대파를 제거하는 숙청을 자행하곤 하지만, 스탈린 대숙청은 그 규모와 대상, 그리고 잔혹성에 있어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악명이 높았다. 무엇보다 대숙청을 공포스럽게 만든 것은 단순히 정적이나 위험 세력뿐만 아니라 누구나 이 숙청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가장 먼저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을 제거한 스탈린은 사회 비판적인 지식 계급에서 숙청을 시작했다. 수천 명의 작가, 예술가와 과학자 들이 반역자로 몰려 처형되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이어 그는 자신이 권력을 잡기까지 전쟁의 한복판에서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웠던 소비에트 군대의 엘리트 장교들을 제거했다. 85명이었던 군대장 중 57명이 강등되었고, 그들의 공적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혁명의 영웅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췄고, 1937년부터 일 년 동안 벌어진 대숙청의 절정 기간에는 당의 고관들, 스탈린의 최측근마저 피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죄목은 스파이 활동이나 반국가행위였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곤 했다. 
 

스탈린의 숙청으로 제거된 사람들은 단순히 지식인 계급이나 정치인, 군 간부에 국한되지 않았다. 누구나 스파이로 지목당할 수 있었고, 누구에게나 고발당할 수 있었다. 이웃, 회사 동료, 친척, 친구, 심지어는 부모와 부부 사이에서도 고발이 일어나곤 했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차례차례 사라지는 가운데 사람들의 공포는 날로 커져갔고,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한 채 잠 못 드는 밤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의 공포를 더욱 가중시키는 것이 바로 KGB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NKVD, 스탈린 정권의 비밀경찰이었다. 

 

악명 높은 스탈린의 비밀경찰 

모스크바 크렘린 근처에는 네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악명 높은 회색 건물이 하나 있다. 지금도 사람들이 옆에 가까이 가거나 그 이름을 입에 담기 꺼려하는 루뱐카, 겉으로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건물이 이 같은 악명을 갖게 된 이유는 이곳이 바로 스탈린 시절 국가 보안 담당 기관이자 실제로는 스탈린의 비밀경찰로 활약했던 내무인민위원회, NKVD의 본부로 사용된 곳이기 때문이다. 스탈린 시대에 루뱐카의 지하 감옥에서는 수감뿐만 아니라 끔찍한 고문과 처형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고문이나 처형으로 죽은 수감자들의 시신을 소각하는 기구도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극비였기 때문에 스탈린이 죽은 뒤에도 한동안 비밀에 싸여있다가 소비에트 붕괴 이후 문서 공개와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조금씩 베일이 벗겨지고 있다. 증언에 따르면 NKVD는 매달 숙청 할당량이 있어서 숙청 대상자의 숫자가 모자라는 경우 억지로 끼워 맞춰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고문 끝에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하곤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스탈린 숙청의 직접적인 실행 기관이었던 이들 NKVD마저도 결국 스탈린의 불안 요소로 떠올라 대부분의 NKVD 요원들이 내부 숙청을 통해 처형되었다는 사실이다. 스탈린 사후, 루뱐카는 NKVD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국가보안위원회(KGB)의 본부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러시아 연방의 연방보안국 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매일 사람들이 사라지는 아파트 NKVD의 방문은 주로 한밤중에 이루어졌다. 모두가 잠든 밤, 갑자기 계단을 올라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다면 십중팔구 그들의 방문을 의미했다. 심지어 스탈린 시대에 지어진 몇몇 건물들은 아예 설계 때부터 NKVD의 검문과 방문이 용이하도록, 현관에서 어느 층이든 한 번에 갈 수 있는 NKVD 전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기도 했다. 
 

모스크바의 고위 당 간부, 문화 예술인들과 과학자들이 살았던 고급 아파트 제방 주택 역시 그런 건물 중 하나였다. 덕분에 제방 주택은 당시 고위급 간부들의 일상생활을 추적하고 연구하는 데 구체적인 증거로 사용되고 있는데, 현관에는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 이 건물에서 사라진 입주자들의 명단이 남아 있다. 총 500가구가 살고 있던 이 아파트 주민 중 총 700명이 한밤중의 방문으로 자취도 없이 사라졌고 이 중 350명이 처형되었다. 한 아파트에서만 3분의 1의 입주자가 숙청으로 사라진 것이다. 
 

비밀경찰은 어느 집이나 방문, 혹은 조사할 수 있는 공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한밤중, 갑작스런 노크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끌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공포 속에서 오늘 밤 자신이 그 대상이 아님을 감사했고,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밤 안전하다고 해서 내일 안전하리라는 걸 보장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불면증에 시달렸고, 한밤중에 들리는 모든 소음과 소리에 지나칠 만큼 민감하게 반응했다. NKVD가 한 가족 전체를 체포한 집에는 문을 봉인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했다. 만약 친구나 동료의 집에 찾아갔는데, 문에 봉인이 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공식적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누구도, 심지어는 부모와 자식, 배우자마저도 완전하게 믿을 수 없었고, 자신의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말하지 않게 되었다. 스탈린의 대숙청은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참극일 뿐만 아니라, 당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정신과 감정에 침투해 그들의 모든 가치관과 인간관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더욱 길고 끔찍한 비극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 출신의 역사가 미하일 게프테르가 말했듯이, 스탈린 체제의 진정한 힘과 유산은 국가 구조나 지도자 숭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의 정신에 침투한 스탈린 체제, 즉 공포가 만들어낸 뒤틀린 내면에 있었던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8호 2020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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