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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NEW GENERATION] ​<마리 퀴리> 천세은 작가, 매일 한 문장씩 나아간다면 [No.199]

글 |안세영 사진 |심주호 2020-04-14 5,935

<마리 퀴리> 천세은 작가
매일 한 문장씩 나아간다면 


 

2018년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돼 2주간 짧은 공연을 올렸던 <마리 퀴리>가 지난 2월 환골탈태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 놀라운 변신 뒤에는 신인 작가 천세은의 부단한 노력이 숨어 있다. 매일 극장에 나와 관객의 반응을 관찰하는 건 물론, 인터넷에 올라온 관객의 후기를 샅샅이 찾아 읽고, 실황 생중계 당시 채팅창에 오갔던 말까지 꼼꼼하게 메모했단다. 미지의 원소를 찾기 위해 실험을 거듭했던 마리 퀴리처럼 하나의 작품을 선보이기까지 수년간 수천 번의 문장을 고쳐 썼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2013 <좋은 개를 고르는 방법> 리딩 공연 

2015 <둥지> 리딩 공연 

2018 <마리 퀴리> 시범 공연 

2019 <모빌> 리딩 공연 

2020 <마리 퀴리> 

 

뮤지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에 비해 감정의 폭이 컸다. 별거 아닌 일로 울고 웃어서 청승맞다, 실없다고 혼난 적이 많다. 그러다가 중학생 때 처음으로 <캣츠>라는 뮤지컬을 보았다. 무대 위 고양이들은 자기가 얼마나 멋진지 뽐내기도 하고, 달 아래서 아름다운 지난날을 추억하기도 했다. 아무리 울고 웃고 청승을 떨어도 뭐라는 사람이 없었다. 뮤지컬에서는 그런 순간이 송모먼트가 되더라. 그때부터 뮤지컬이 나와 잘 맞겠구나 생각했다. 
 

뮤지컬 작가가 되기 전에 어린이 방송 작가로 일했다고 알고 있다.  전공으로 문예창작을 공부하던 대학생 시절 EBS <모여라 딩동댕> 막내 작가로 들어갔고, MBC <뽀뽀뽀 아이좋아>로 입봉했다. 스튜디오에서 동화를 각색한 30분짜리 뮤지컬을 촬영해 월요일마다 방송했다. 1년 6개월간 프로그램을 맡아 방송 작가로서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이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맞나 고민이 들더라. 그러던 차에 당시 프로그램 진행자였던 뮤지컬배우 최정원이 출연하는 <맘마미아!> 공연에 초대받았다. 슬픈 극도 아닌데 공연을 보는 내내 울었다. 내가 뮤지컬 창작에 더 목말라 있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다. 공연이 끝나고 최정원 배우에게 ‘언니, 저 뮤지컬 작가가 될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방송국을 그만뒀다.
 

<마리 퀴리>는 최종윤 작곡가와 함께 만든 작품이다. 신인 작가와 베테랑 작곡가의 흔치 않은 만남인데, 어떻게 함께하게 되었나?   2017년 ‘글로컬 뮤지컬 라이브’ 작가 부문 공모에 <마리 퀴리> 초고가 당선되었는데, 최종윤 작곡가님이 대본을 보고 제작사에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한다. 소식을 듣고 나도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2013년에 서울뮤지컬페스티벌 창작 지원 프로그램 ‘예그린프린지’를 통해 독회 공연으로 선보였던 내 전작 <좋은 개를 고르는 방법>도 보셨다고 하더라. 
 

과학자 마리 퀴리의 삶에서 가장 흥미를 끈 부분은 무엇인가?   마리는 새로운 원소를 찾기 위해 4년이란 지난한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고 본인 스스로 의구심을 가졌음에도 말이다. 대체 무엇이 그를 끝까지 가게 했을까? 만약 라듐을 찾기까지 40년이 걸렸거나 영영 찾지 못했다면?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을 거다. 그 순수한 탐구심은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인간이 지닌 고귀한 가치가 아닐까 생각했다. 
 

라듐을 발견한 마리 퀴리와 라듐으로 인해 죽어간 직공 ‘라듐 걸스’는 실제로는 교류한 적이 없다. 둘을 연결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발상은 어떻게 떠올렸나?   위인전 속 마리 퀴리는 세상의 편견과 차별에 맞서 훌륭한 업적을 이뤄낸 사람처럼 그려지지만 실제 마리에게 과학은 그 자체로 순수한 즐거움이라서 인정이나 대가가 필요치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마리는 역경을 딛고 일어설 필요가 있었다. 마리가 두려움과 무력함을 맞닥뜨리게 하기 위해 라듐 걸스와 마주하게 했다. 안락하고 견고한 실험실 벽을 무너뜨리고 거친 세상 한복판에 마리를 세운 다음 ‘자, 이제 어떻게 할래?’라고 묻는 것이 이 작품의 시작이다. 
 

이번 공연은 마리와 남편 피에르가 아닌 마리와 직공 안느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 마리가 폴란드 이민자이자 여성으로 차별받는 이야기도 추가됐다.   2018년에는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데 부담을 느껴 마리와 안느의 관계를 전면에 내세우기를 주저했다. 하지만 관객 후기를 살펴보면서 내가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리와 안느가 함께 비극을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로 방향을 잡았다. 그 과정에서 애초에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이쪽이라는 걸 깨달았다. 인류의 비극은 누구 한 사람의 잘못에 기인한 것도 아니고, 한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 지난 공연 당시 마리의 기초 서사가 아쉽다는 반응이 많았기 때문에 그 부분을 보완했다. 작곡가님과 상의해 <레 미제라블>처럼 길게 이어지는 오프닝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처음에는 마리가 프랑스행 기차에 올라 라듐을 발견하기까지를 아주 긴 한 곡으로 표현했는데, 수정하면서 지금처럼 여러 곡으로 쪼개졌다. 
 

라듐 공장 사장인 루벤은 돈만 밝히는 사업가가 아니라 마리처럼 끝까지 가보고 싶어 하는 열망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단순한 악역으로 그리지 않은 의도가 뭔가?   루벤은 백년도 못 사는 인간의 껍데기를 쓰고 있으면서 하루라도 빨리 발전된 미래를 보고 싶어 한다. 어쩌면 그런 열망은 마리의 순수한 지적 탐구심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루벤 같은 사람들이 문명을 발전시키고 미래를 앞당겼을 수도 있다. 물론 생명은 어떤 경우에도 저울질 할 수 없다는 가치관 앞에서 그는 부정할 수 없는 악역이다. 그렇지만 어디까지가 넘어선 안 될 선인가 하는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원자력 발전이나 배아 줄기세포의 생명 윤리 같은 문제가 끝도 없이 우리를 고민하게 하는 것처럼 선악이 모호한 캐릭터를 통해 여러 물음표를 파생시켜 보고 싶었다. 
 

가장 풀어내기 어려웠던 장면과 애착이 가는 장면은 무엇인가?   마리와 안느가 탑 위에서 ‘그댄 내게 별’을 부르는 장면은 공연 직전까지 수정을 거듭하느라 작곡가님이 먼저 곡을 쓰고 내가 거기에 맞춰 가사를 썼다. 당시 작곡가님께 마리와 같은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할 것 같은지 여쭤봤는데 ‘그냥 잘못했다는 말보다는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말을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거기서 힌트를 얻어 가사를 썼다. ‘죽은 직공들을 위한 볼레로’는 협업의 힘으로 완성된 장면이라 애착이 남는다. 사실 작곡가님이 라벨의 볼레로를 모티프로 삼자고 제안하셨을 때만 해도 ‘빌어먹을’, ‘부검해 봐’ 같이 원초적인 가사에 볼레로처럼 우아한 음악이 어울릴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런데 안무와 조명이 어우러져 완성된 장면을 보니, 죽은 직공들이 세상에 외치는 슬픈 목소리가 아름답고 그로테스크하게 잘 표현되었다. 이런 게 뮤지컬의 매력이구나 느꼈다. 
 

대본을 쓸 때 자신만의 습관이나 철칙이 있나?   잘 알려진 제작사, 창작진과 함께 <마리 퀴리>를 작업하면서 부담감에 잠이 안 오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때 결심한 게 매일 한 문장이라도 더 쓰자는 거다. 내 컴퓨터에는 지난 3년간 매일 업데이트된 대본 파일이 날짜별로 저장되어 있다. 한 문장이든 한 단어든 매일 꾸준히 쓰고 고쳤다. 공연이 개막하고 모니터를 하는 지금도 새로운 파일이 쌓이고 있다. 앞으로도 이 습관을 지켜 나가 하루에 하나의 파일을 만드는 작가가 되고 싶다. 
 

앞으로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동물 병원에서 일하면서 겪는 일을 일기처럼 기록하고 있다. 우리 병원은 치료가 필요한 동물한테 먼저 그림책을 읽어주며 마음을 열 시간을 준다. 얼마 전에는 1년간 함께 지냈던 나이 든 강아지 로키를 안락사로 편안히 보내줬다. 아직도 로키의 보호자가 종종 차를 마시러 와서 함께 로키 이야기를 나누며 울고 웃는다. 그러면서 알았다. 위로는 이야기에서 나온다는 걸. 내가 이 자리에서 보고 듣는 탄생과 죽음, 이별과 만남이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위로하는 좋은 이야기로 거듭날 수 있다면, 나는 기쁘게 그 일을 하고 싶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9호 2020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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