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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뮤지컬

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인터뷰 | 체코에서 온 한국판 <살인마 잭> 2 [No.76]

글 |왕용범(<살인마 잭> 연출가) 사진 |왕용범(<살인마 잭> 연출가) 2010-01-04 6,300

200908 #1 갈등

<살인마 잭>이라는 드라마의 갈등은 무엇일까? 살인을 거부하는 자신인가? 아니면 살인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인가?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과연 누가 살인마인가?` 이 질문은 그동안 살인마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살인마들의 공통점에서 유래된다. 그 공통점은 바로 이 살인마들이 모두 스타라는 것이었다. 스타. 그렇다. 그들은 신문을 통해 책을 통해 영화를 통해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끔찍해서 잊고 싶었던 그들은 수십 수백년을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아니라 하면서도 어떤 이유든 살인마를 원한다, 살인마에 열광한다. 그렇다면 <살인마 잭>을 간절히 원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때 내 작업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 사람이 들어왔다. 앤더슨과 먼로였다. ‘한 건당 천 파운드야. 보이는가? 수영장 딸린 대저택이!’ 결국 이 작품의 갈등 주체는 살인마와 그 살인마에 환호하는 세상일까?

 

 

 

 

 

 

 

 

 

 

 

 

 

 

200908 #2 관점Ⅰ

중요한 건 살인마가 아니라 살인마를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였다. 그것도 이 살인마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 그래서 자신의 소중한 것을 희생시킬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앤더슨 이었다. 그래서 앤더슨이라는 캐릭터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정의감에 불타고 약간은 결벽증이 있는 형사가 아닌, 살인자를 비롯한 범법자가 있기에 존재가치가 있는 형사, 앤더슨. 그는 정의와는 별 상관이 없다. 그저 코카인 중독의 염세주의자. 앤더슨의 테마를 만들기 위해 작곡가의 베스트 앨범을 뒤졌다. 체코 원작의 뮤지컬 넘버에서는 내가 생각하는 앤더슨 테마로 마땅히 쓸 곡이 없었다. 작곡가의 90년대 초 앨범에서 비슷한 컨셉의 곡을 택해서 가사를 썼다, 제목은 `회색도시`. 이 `회색도시`가 <살인마 잭> 한국 초연의 컨셉이 되었고 이후 취조실 장면마다 변주되어 나온다. 결국 작품 테마곡이라고 할까. 지면을 통해 음악을 들을 수는 없고 가사 일부를 적어본다.

 

하루하루 술에 도박에 마약중독, 깨질 것 같은 두통, 꿈꾼 기억조차 가물가물 거리고, 이름도 잊었어

세상은 온통 회색 아니면 검은색, 가끔 붉은 피 냄새, 비 때문에 담뱃불도 힘없이 꺼져, 남는 건 한숨뿐

 

흠… 파전에 막걸리가 먹고 싶다.

 

200908 #3 관점Ⅱ

살인사건의 가장 큰 수혜자는? 살인자도 경찰도 시체닦이도 장의사도 아닌 바로 매스컴이다. 런던타임즈 기자 먼로는 내 각본에서 KEY가 되는 인물이 되었다. 이 상징적인 인물은 살인사건을 즐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음흉한 세상을 포괄하는데, 살인사건 자체가 직접적인 수입원이 되는 기자야말로 가장 아이러니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극중에 이런 대사를 넣었다. ‘우리끼리 얘긴데, 너무 빨리 잡지는 마. 한 건당 천파운드니까 천천히 잡으라구.’
 
이 아이러니가 가득한 캐릭터는 결국 살인마에 환호하며 살인마가 되어간다. 그리고 또 한가지 관점을 넣었는데, 살인마라는 소재를 오락거리 삼는 행태. 엔터테인먼트다. 나중 얘긴데, 너무 공연 초반에 나와서인지 관객이 이 코드를 이해하기 보다는 좀 뜬금없어 하더라. 아무튼 숙제다. 좀 더 코드를 짙게 할 수 있는 요소를 생각해봐야겠다. 런던의 한 클럽에서 공연되는 ‘변태살인마 쇼’처럼 좀 더 저질스럽고 웃기게 만들까? 암튼 이쯤 해서 담배 하나 물고… 쩝.

 

 

 

 

 

 

 

 

 

 

 

 

 

 

 

 

 

200909 #1 배신Ⅰ

다니엘은 살인을 저지르면서 스스로의 악행을 거부한다. 그래서 3년 전 자신이 죽였다고 믿는 잭이라는 인물을 상상 속에서 끌어내 죄를 덮어씌운다. 결국 잭은 다니엘의 면죄부다. ‘넌 사랑을 해, 난 살인을 하게’ 이 카피를 쓰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얼마전 브루스윌리스 주연의 영화 써로게이트와 또 다른 영화 게이머를 보았는데, 많은 영화에서 디스토피아로 그려지는 이 리얼 아바타의 세상은 사실 오래 전부터 존재해온 인간 본연의 욕구인 거 같다. 선과 악이라는 모호한 잣대질 아래, 나는 할 수 없지만 남은 할 수 있는 것, 나는 할 수 없지만 남이 되어서는 할 수 있는 것, 남이 되고 싶은 동경. 정작 나 자신은 아직 도덕이라는 울타리에 남겨둔 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달콤한 배신. 요즘 들어서는 ‘지킬 앤 하이드 콤플랙스’라는 말도 쓰던데. 사실 신데렐라도 자정까지 허락된 일종의 아바타를 이용한 인물이다. 자신은 할 수 없는 것을 가상의 인물을 통해 하는 행태, 사이버공간이 있기 훨씬 전부터 인간은 여러 장치들을 통해 욕구를 표출하고 있었다. ‘가명’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전 부터. 갑자기 드는 생각, 진짜 살인마는 이기심?

 


 

 

 

 

 

 

 

 

 

 

 

200909 #2 배신Ⅱ

사실 <살인마 잭>을 스릴러로 만들 생각은 별로 없었다. 물론 스릴러적인 분위기는 필요하겠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반전이 강한 작품을 만든다면 스포일러가 전파되면서 작품의 생명력은 끝이 난다. 특히 장기공연을 해야 하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에서는 독약이나 다름 없다. 몇 년 전이다. 한 영화관에 <식스센스>를 보러 갔다. 티켓을 끊으려 줄을 서고 있는데, 앞 서 본 관객이 영화관을 나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브루스윌리스가 유령이다!” 그날 <식스센스>는 최고로 재미없는 영화로 기억된다.

 

그래서 <살인마 잭> 드라마의 중심에 반전보다 `사람냄새`를 배치했다. 그 `사람냄새`라는 것은 서른이 지나면 자연스레 느껴지는 아련한 사랑의 향수 같은 것이다. 폴리와 앤더슨의 이야기인데, 일종의 앤더슨의 배신이다. 다니엘의 밀고로 고심하던 앤더슨은 함정수사를 하기로 한다. 잭의 살인현장을 덮치는 것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미끼가 되어줄 매춘부가 필요했다. 앤더슨은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인, 조건 없이 부탁을 들어 줄 옛 애인을 찾아간다. 

 

바에서 술에 취해 있는 폴리에게 다가간 앤더슨은 힘겹게 말을 뗀다.

폴리: 어쩐 일이야?

앤더슨: … 

폴리: 묻잖아.

앤더슨: 부탁할 게 있는데…

폴리: 알았어.

앤더슨: … 뭘 알아?

폴리: 그게 뭐든. 다…

 

둘의 대화는 짧지만 많은 것을 내포한다. 사랑을 해봤다면, 이별을 해봤다면, 상처가 있다면, 둘이 보여주는 향수가 참 좋더라. 하지만, 11월 13일부터 12월 13일까지 공연된 1차 공연에서는 좀 아쉽더라. 그래서 2010년 1월 8일부터 공연되어지는 2차 공연에서는, 폴리와 앤더슨의 이야기 분량을 좀 더 넣고자 준비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작품에 해가 될지 득이 될지는 올려봐야 알겠지만, 아무튼 시도해보려고. 그게 사는 거니까.

 

200909 #3 내가 잭

더 놀고 싶었던 캐릭터였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정말 지대로 한번 놀고 싶은 캐릭터다. 아무튼,
결국엔 잭이다. 이 작품이 잭에게서 시작하고 결국은 잭으로 끝난다. 그러니까 제목이 <살인마 잭>이겠지. 그래서 상징적으로 커튼콜 마지막에 잭 혼자 남겨 두었다. 어쩌면 그는 우리의 음흉한 본능을 조롱하고 있는 광대일지도 모른다. 잭? 짹!
 


 

200911 #1 회식

11월 15일, 첫 주 공연을 마치고 원작자들과 회식을 했다. <살인마 잭> 원작자 중 한 분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Great! Good Job!` 한편으론 미안하고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나라고해도 내 작품이 다른 창작자에 의해 난도질 당하는 모습을 참기 어려웠을 것이라. 삼총사에 이어 못할 짓을 또 했다. 난 짧지 않은 시간 그 분을 꼭 안고 있었다. 눈물을 숨기며. 젠장, 밖에서 눈발이 날린다. 문득 앤더슨의 대사가 떠올랐다. 내가 쓴 대사 중에 가장 사랑하는 대사다.

 

‘여름에 눈이 올 리 없다. 이건 근처 공장에서 내뿜는 재 가루다.’


200911 #2 프레스 리허설

대체 뭐가 중요한 걸까? 인터뷰때마다 나에게 던져지는 질문이 있는데… (어쩔 땐 이 질문만 한다) ‘얼마만큼 바꾼 겁니까?’ 흠… ‘원작에서 멜로디와 회전무대 개념만 가져왔고 90%가 다릅니다` 라고 말하면서도…  그게 뭐가 중요하지? 그게 뭐가 이슈지? 난 그냥 직업상 ‘연출 = 최초의 관객’ 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인데. 내가 관객으로써 보고 싶은 작품을 만든 거 뿐인데. 바꾼 거 자체가 뭐가 중요하지?


사실 한국적으로 바꾸었다는 기사는 오보다. 뭐가 한국적이라는 거지? 자… 일단 짜증은 접자. 라이센스 가져다 바꾸는 게 흔하지 않은 일이라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자. 하지만, 그들의 질문엔 묘한 뉘앙스가 엿보인다. 동전을 뒤집어 보면 보이는 일종의 사대주의. ‘대단한 외국의 작품을, 모자른 우리나라 스텝이 도대체 어떻게 바꾼 겁니까?’ 이 묘한 뉘앙스… 쳇!

 

자 됐다. 그 따위 뉘앙스들 신경 쓸 시간 없다. 난 다시 컴퓨터를 켜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다음 작품은, 극본 왕용범의 <특급열차강도> 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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