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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ESSAY] 남윤호 배우의 RADA 졸업기, 끝과 시작이라는 새로운 챕터 [No.182]

글 |남윤호 배우 사진 |Linda Carter, Helen Murray 사진제공 |RADA 2018-11-09 5,852

남윤호 배우의 RADA 졸업기, 끝과 시작이라는 새로운 챕터

 



1년이란 도전의 시작 

시간은 항상 뒤돌아보면 그 어느 것보다도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다. 지난해 9월 이맘때쯤 런던으로 건너와 영국왕립연극학교인 RADA에서 첫 수업을 들을 때는 그저 일 년 후가 궁금해 설레었는데, 어느덧 그 일 년이 지나가고 얼마 전 학기의 마지막 과정인 졸업 공연까지 마쳤다. 내가 졸업한 MA 시어터 랩은 단지 배우를 위한 코스가 아닌 이름 그대로 연기, 작가, 연출까지 할 수 있는 종합적인 무대 예술가를 지향하는 실험적인 코스로, 지난 일 년간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18명의 배우들이 하나의 앙상블이 되어 수업을 받으며 트레이닝을 이어왔다. 비록 졸업은 16명만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약 1년 전, 정식 수업에 앞서 3일간의 오리엔테이션 기간이 있었다. 오리엔테이션 마지막 날 RADA의 디렉터(우리말로 하면 교장 선생님 정도 되겠다)인 에드 켐프는 신입생들을 모두 모아두고 이렇게 말했다. “연기를 하다 보면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있고, 스스로를 자책하게 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땐 무작정 연습에만 매달리지 말고 시간을 내서 공원에 앉아 심호흡을 하면서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라.” 참 공감 가는 말이었다. 나는 배우이기 전에 한 명의 사람이고 한 사람으로서 나의 인생이 있는데, 그 인생을 괴롭혀가면서까지 연기에 매달린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생이 없으면 연기도 없다. 그러니 경험하고 즐겨라! 어쩌면 너무 내 멋대로 해석한 것일지 모르지만, 난 선생님의 말씀이 이런 뜻일 거라 믿고 싶다. 그리고 기억나는 말이 하나 더 있다. “실패해라. 더 실패해라. 더 낫게 실패해라(Fail. Fail more. Fail better).” 유명한 어록이기는 하지만, 영국 내에서 최다 아카데미 수상자를 배출한 RADA라는 드라마 스쿨에서 신입생들을 모아놓고 마음껏 실패해도 된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에 놀랐다. 단지 직책에 맞는 멋진 말을 늘어놓은 것도 아니었고, 학생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말도 아니었다. 선생님의 이 말은 내가 이곳에 왔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깨우치게 해주었다. 스스로 미친 듯이 깨지고 부서지길 반복해 내가 나 자신을 겁 없이 바라볼 수 있는 단단함을 갖는 것이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였다는 것을 말이다. 지난 일 년 동안의 경험을 짧은 페이지 안에 다 담을 순 없겠지만, 기억에 남는 몇몇 과정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새로운 페르소나 드래그 퀸 AJ

<더뮤지컬>의 지난 1월 호 리뷰에서 라는 뮤지컬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그때도 잠시 드래그 퀸에 대해 언급했는데, 마침 그 시기에 나 역시 드래그 퀸 퍼포먼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왕립연극학교에서, 그것도 가장 클래식하기로 소문난 학교에서 드래그 퀸이 웬말인가 싶겠지만, 이 퍼포먼스는 정식 코스에 포함된 것이 아닌 수업 외의 시간을 활용해야 하는 사이드 프로젝트였다. 따라서 연습은 물론, 퍼포먼스를 위한 모든 준비를 수업 이외의 시간에 해야 했다. 이런 퍼포먼스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는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아마 시어터 랩이라는 코스 자체가 학생 개개인이 자신의 방향성을 찾을 수 있도록 가이드해 주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마련된 프로그램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준비 과정은 정말 쉽지 않았다. 드래그 퀸 페르소나를 창조하고 그에 맞는 음악 선곡과 편집, 안무를 직접 준비하는 것은 물론 가발과 의상, 화장까지 알아서 해야 하는, 교수님의 조언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제로에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라 여간 막막한 게 아니었다. 그중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신발 구매였다. 처음 신어보는 힐은 사이즈 때문에라도 구입 전에 꼭 신어봐야 했고, 여성화 섹션에서 남자인 내가 여자 구두를 신어본다는 것 자체가 개인적으론 꽤나 부끄러운 일이었다. 심리적으로 가장 두려웠던 부분은 여장을 하고 200명이 넘는 관객들 앞에서 10분 남짓의 솔로 무대를 선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둘러싼 모든 껍데기를 벗어 던져야 했고, 그 과정이 너무나도 두렵고 힘들었지만 10분이 채 안 되는 공연이 끝났을 때는 어딘지 모를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내가 창조한 드래그 퀸 페르소나를 통해서 내가 나로서 하지 못하는 말과 행동을 모험적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일까. 드래그 퀸 캐릭터로서 온 힘을 다해 립싱크를 하고 춤을 추면서 하나 배운 점이 있다면, 무대에서 창피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창피함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관객들에게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비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 무대에 필요한 순간에 한 인물로서 해야 할 것을 이루어내는 것이 드래그 퀸 퍼포먼스 프로그램의 진짜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스 고대 야외극장이란 특별한 경험  

앞서 잠시 말했다시피, RADA의 MA 코스는 생각보다 많은 마스터 클래스와 워크숍, 사이드 프로젝트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큰 두 개의 프로젝트가 바로 위에 언급한 드래그 퀸 퍼포먼스와 지금 이야기할 그리스 프로젝트일 것이다. RADA의 시어터 랩은 매년 그리스의 메시니라는 곳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에 초청돼 고대 야외극장에서 공연을 하는데, 내가 RADA에 지원했던 많은 이유들 중 하나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어떻게 약 2천 년 전 만들어진 그리스 고대 야외극장에서, 그것도 영어로 그리스 비극을 공연해 본단 말인가. 더욱이 이번 클래스는 운이 좋게도 그리스뿐만 아니라 체코 제2의 도시라 불리는 브루노에서 열린 ‘세트카니 인카운터 페스티벌’에도 지원해 체코에서 3회 공연을, 그리스에서 2회 공연을 할 수 있었다. 
 

열여섯 명의 배우들이 다 같이 공연을 만들다 보니 작업이 쉽지는 않았다. 특히나 이 프로젝트는 작품 선정부터 대본 편집, 역할 배정 등 공연을 만드는 전 과정을 교수님의 지도 아래 학생들끼리 완성해야 하기 때문에 서로 지지고 볶고 싸워가며 공연을 만들어갔다. 어느 공연이나 그렇지만, 이번에도 역시 백 퍼센트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힘든 과정을 통해 함께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배우게 됐으니 소중한 경험을 한 셈이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작업하다 보면 때론 답답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목표점을 향해 어떻게 함께 나아가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는 것 같다. 나이가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각자 살아온 삶 또한 다르다. 그렇다면 서로를 함부로 대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게 아닐까. 이러한 깨달음을 생각해 보면 이처럼 값진 경험도 또 없을 것 같다. 


 

또 하나 색달랐던 경험은 공연이 오전 10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 이후 시간은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보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견디기가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들은 이야기로는 야외극장 객석 뒤로 우뚝 솟아 있던 산 정상에 지금은 사라진 아폴론을 모시던 신전이 있었다고 했다. 어쩌면 신들이 우리를 내려다봤을지도, 우린 신들의 그 정기를 받으며 공연을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졸업 공연

올해로 7년째를 맞은 시어터 랩의 졸업 공연은 매해 멤버들에 따라, 그리고 연출에 따라 달라졌다고 한다. 나는 작년 졸업생들의 공연과 올해 내가 참여한 공연, 이렇게 두 작품만 알고 있지만 두 편만으로도 충분히 매번 달랐을 거라 짐작할 수 있었다. 
 

졸업 공연의 제목은 ‘Afterlives: An Investigation’으로 우리말로 하면 사후 세계: 그와 관련된 연구쯤 될  것 같다. 첫 리허설 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단서는 사후 세계라는 주제와 EVP(Electronic Voice Phenomena) 현상이 공연의 일부라는 것, 한 명의 연출과 열여섯 명의 배우, 그리고 조명디자이너와 음향디자이너가 각각 한 명씩 참여한다는 내용이었다. 진정 무에서 유를 창조한 셈이다. 과정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리허설 기간은 5주로 짧았고, 리허설 룸은 공연에 대한 아이디어가 뚜렷했던 연출가와 열여섯 명의 의견 강하고 의욕 넘치는 배우들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내가 기존에 했던 다른 공연들과는 달리 대본도, 역할도 없는 형식이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끊임없이 시도하고 공유하는 일이었다. 초반 2주간의 리허설은 연출이 제시하는 여러 훈련과 게임을 통해 공연에 쓰일지 모르는(쓰인다는 백 퍼센트 보장이 없었기에)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그 이후 개개인이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한 단계, 한 단계 어렵게 공연을 만들어 나갔다. 아무래도 대본이나 역할이 없다 보니 다른 때보다 더욱 양보나 타협이 어려웠고, 이 두 문제는 어쩌면 마지막 공연까지 풀리지 않는 숙제였던 것 같다. 아마 졸업 공연인 만큼 나와 모든 학생들이 이 공연을 통해 자신을 쇼케이스하고 싶은 열망이 컸던 탓도 있을 것이다. 리허설 초반엔 나 역시 그런 마음이 컸으니 말이다. 하지만 졸업 공연 또한 개개인의 쇼케이스를 위한 무대가 아닌 RADA에서 제작되는 하나의 작품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나니 나 자신보다는 공연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나에게는 새로운 숙제가 주어졌다.


 

나에게 주어진 숙제는 이 막막한 주제와 수많은 아이디어들 속에서, 그리고 유일한 동양인 배우로서 어떻게 나의 위치를 찾아서 그동안 시어터 랩이라는 코스를 통해 깨달은 점을 보여줄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점차 공연 날이 다가오면서 자연스레 대본이 생기고 역할이 나뉘었다. 그 결과 내가 맡게 된 역은 퇴마사였다. 내가 만든 퇴마사는 동양의 굿도, 서양의 구마 의식도 아닌 둘이 묘하게 섞인 의식을 하는 인물이었다. 동양인 배우가 RADA의 무대에서 셔츠에 조끼를 입고 넥타이를 맨 차림으로 성호를 긋다 천을 뒤집어쓰고 유령으로 변해 다시 그 천으로 살풀이 아닌 살풀이를 하는 모습은 어쩌면 웃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 나름대로의 사회 정치적 발언을 한 것이었으며, 나의 아이덴티티를 숨기지 않고 가장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극의 시작과 끝에 영어 대사와 한국어 대사로 연기해 시어터 랩을 통해 닦았던 기량을 어느 정도는 발휘했다고 믿는다. 진실과 거짓, 현실과 비현실을 오고 갔던 이번 공연은 배우들의 개인 경험들까지 무대에서 표현됐기에 조금 더 힘든 과정이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 쉽지 않았던 과정 속에 많은 반성과 배움이 있었다. 



 

다시 새로운 시작 

내가 RADA에 지원하기로 결심했던 이유는 무언가 새로운 도약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따위가 있었다고 해야 할까. 내가 배우라는 일을 해야 하는 이유와 무대에 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이 일이 좋아서’라는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닌 나만의 이유를 찾고 싶었던 것 같다. 지난 1년간 빡빡한 학교 일정 중에도 되도록 많은 공연을 접하면서, 그리고 갈수록 어려워지던 수업 과정을 거치면서 나를 포함한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물론 모든 답을 구하고 학교를 졸업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애초에 RADA에 들어올 때부터 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경험은 내 인생의 새로운 챕터가 될 것이고, 이다음에 맞이할 챕터는 이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나간 1년을 돌이켜보고 있자니, 오히려 더 많은 의문과 질문을 안게 된 것 같다.
 

리처드 애튼버러, 앤서니 홉킨스, 로저 무어, 앨런 릭먼, 케네스 브래너, 에이드리언 레스터, 샐리 호킨스, 벤 위쇼, 톰 히들스턴…. 영국의 내로라하는 수많은 배우들이 거쳐 간 학교에서 그들이 숨 쉬던 공간에서 훈련을 받고, 셰익스피어, 크리스토퍼 말로, 노엘 카워드, 해롤드 핀터, 피터 쉐퍼, 톰 스토퍼드 등 엄청난 작가들을 배출한 영국이라는 나라에 살면서 나에 대해서 더 돌아보고 다시 마음을 잡는 1년을 지나온 것 같다. 배우 남윤호로서, 인간 유대식으로서, 영국에 살고 있는 Dash You로서, 앞으로 또 어떤 길을 어떻게 걸어갈지 모르겠지만, 이제 막 새로운 첫걸음을 떼었으니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두 번째 발걸음을 딛고 싶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2호 2018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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