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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ZOOM IN] 해롤드 프린스, 브로드웨이의 큰 별이 지다 [No.192]

글 |조용신 공연 칼럼니스트 2019-09-11 4,402

해롤드 프린스
브로드웨이의 큰 별이 지다 

 

‘왕자’(Prince) 가문이지만 ‘왕’(King of Broadway)으로 불린 사람. 브로드웨이의 무대감독으로 출발하여 프로듀서를 거쳐 궁극에는 연출가로 활동하며 미국 뮤지컬의 예술성을 한 단계 높인 인물. 하지만 자신은 연출가가 아니라 자신을 연출가로 고용한 제작자라고 말하는 특별한 인물. 평생 하나도 받기 힘든 토니상 트로피를 무려 21개나 가져간 전무후무한 최대 수상 기록의 보유자. 브로드웨이의 큰 별 해롤드 프린스(1928-2019 )의 인생을 돌아본다. 

 

토니 어워즈 연출상 수상작 

<카바레>(1967)

<컴퍼니>(1971)

<폴리스>(1972)

<캔디드>(1974)

<에비타>(1980)

<오페라의 유령>(1988)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91세라는 나이가 보여주듯 해롤드 프린스는 브로드웨이 황금기라고 일컬어지는 20세기 중반부터 최근까지 무려 70년간 브로드웨이에서 현역으로 일해 온 베테랑중의 베테랑이다. 그 자신이 이미 전설의 일부지만 콜 포터, 리처드 로저스, 조지 아보트, 오스카 해머스타인, 스티븐 손드하임, 존 칸더, 앤드루 로이드 웨버 등 전설적인 인물들과 모두 일한 유일한 연출가이자 제작자이기 때문이다.

해롤드 프린스는 뉴욕 맨해튼 토박이로서 어머니는 공연 애호가였고 양아버지는 월스트리트가의 주식 중개인이었다. 브로드웨이가 지척인 중산층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극장에 대한 열정과 비즈니스 감각을 모두 익혔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졸업을 앞둔 19세의 나이로 당대 최고의 프로듀서 겸 연출가, 작가 조지 아보트(George Abott, 1885-1995)에게 편지를 썼다. 자신을 공짜로 써보고 제대로 일을 못하면 쫓아내라는 당찬 내용이었다. 업계의 젊은 피를 수혈하고자 했던 조지 아보트는 그의 호탕한 제안을 받아들였고 같은 팀의 무대감독 겸 프로덕션 매니저였던 로버트 그리피스(Robert E. Griffith, 1907-1961)는 그를 무대조감독으로 고용했다. 그의 장장 70년에 이르는 현역 커리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뛰어난 상사, 완벽한 조수

이십 대 초반에 무대조감독이 된  해롤드 프린스는 똑부러지고 진지한 성격 덕분에 이후 메인 무대감독이 되어 <티켓 플리즈>(1950)를 비롯해 <콜 미 마담>(1951), <원더풀 타운>(1954)을 이끌었고 프로덕션 매니저 역할도 겸하며 능력을 인정받은 뒤 또래의 젊은 창작자들과 합심해서 드디어 자신만의 쇼를 만드는 프로듀서로 데뷔한다.

그가 처음으로 제작했던 작품 <파자마 게임>(1954)은 파자마를 생산하는 공장 노조가 파업을 하는 내용으로 쇼 뮤지컬에서 보기 어려운 소재를 다루는데, 창작 콤비인 제리 로스와 리처드 아들러는 이십 대의 초짜들이었기에 투자자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오게 한 조력자는 바로 해롤드 프린스의 멘토이자 상사인 조지 아보트였다. 그는 ‘될 성싶은 떡잎’인 프린스의 데뷔작에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해서 까다로운 투자자들의 우려를 불식시켰고, 이 작품은 그해 토니어워즈에서 최우수 작품 후보에 오른다. 다음 작품인 <빌어먹을 양키스>(1956) 역시 작품상과 최고 제작자상, 작곡상 등을 휩쓸며 청출어람의 본보기를 보여주게 된다.

제작과 연출을 겸하는 조지 아보트를 롤모델로 삼은 해롤드 프린스는 1962년 <가족문제>에서 연출가로 데뷔해 <쉬 러브스 미>(1963), <베이커 스트리트>(1965), <슈퍼맨>(It's a Bird… It's a Plane… It's Superman, 1966)을 연달아 만들게 된다. 하지만 이 네 작품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는 거의 업계를 떠날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 작품을 위해 <파자마 게임>에서 안무가로 만났던 밥 포시를 다시 불러들여 작곡 존 칸더와 작사 프레드 엡 콤비와 함께 만든 작품이 <카바레>(1966)다.



뮤지컬의 영역으로 들어온 정치

해롤드 프린스는 2차 대전 중 독일에서 군 생활을 한 경험이 있는데 당시 베를린의 한 클럽에서 본 클럽 사회자가 주도하는 노골적인 풍자 쇼를 떠올리며 <카바레>의 컨셉을 생각했다. 동명의 영화로도 잘 알려진 소설 『싱글맨』 의 작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단편 「베를린 이야기」를 통해 당시 베트남 참전을 반대하는 미국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정치적인 작품이었다. <카바레>는 흥겨운 음악이 나오지만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사회자의 냉소적인 유머 감각을 내세운 쇼로서, 1931년 나치 치하에 베를린에 실존한 킷캇 클럽(Kit Kat Klub)을 배경으로 유대인 차별과 호전적인 제국주의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클럽에 모여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풍자하며 노는 특별한 공간을 그려냈다. 해롤드 프린스는 극 중 사회자 역할로 무명에 가까웠던 배우 조엘 그레이를 일찍이 발굴해 작품 개발부터 참여시켰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통해 연출가 해롤드 프린스는 <카바레>의 앞선 네 번의 실패를 모두 만회하며 생애 첫 토니어워즈 연출상 트로피를 거머쥔다. <카바레>는 1972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져 조엘 그레이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품에 안는다.

해롤드 프린스는 <카바레>에서 독일 출신 망명 작곡가인 쿠르트 바일의 작품들을 면밀히 연구했고 바일의 미망인이자 오페라 <서푼짜리 오페라>의 주연을 맡았던 로테 레냐를 하숙집 주인인 슈나이더 부인 역에 캐스팅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프린스의 마지막 브로드웨이 연출작인 <러브뮤지크>(LoveMusik, 2007)가 바일과 레냐 부부의 사랑이야기로 만든 레뷰 형식의 작품일 만큼 쿠르트 바일에 대한 그의 사랑은 일관되었다.



 

뮤지컬 연출가의 역할 규정과 실천

뮤지컬 연출가는 프로덕션의 중심 포지션으로서 리더십을 갖추고 수많은 예술가들(창작자와 디자이너)을 통솔하며 그때그때 빠른 결정을 내려 뚝심 있는 추진력으로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와도 같은 라이브 쇼를 만들어야 한다. 창작의 출발선에서부터 무대화가 가능한 그림을 제시하고 훌륭한 기성 배우들과 협업하며 가능성 있는 신인 배우들을 발굴하는 감각도 갖춰야 한다. 오늘날 이러한 뮤지컬 연출가의 덕목을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조지 아보트와 해롤드 프린스이다.

두 사람은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지 않고 능력과 책임감을 지닌 연출가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세대는 달랐다. 조지 아보트가 뮤지컬은 전통적으로 관객에게 솜사탕 같은 환상과 즐거움을 줘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이른바 쇼 뮤지컬의 문법을 무대 위에서 자유자재로 요리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해롤드 프린스는 뮤지컬에게 필요한 대중성의 근원을 비극성으로 본 인물이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해롤드 프린스가 이후 미국 뮤지컬의 예술적인 지평을 넓히는 파트너로 스티븐 손드하임을 낙점하면서 구체적인 대안을 만들어내는 데 영향을 준다. 해롤드 프린스가 업계 베테랑으로 자리 잡은 1960년대 이후 뮤지컬이 대중음악의 지위를 상실하면서 뮤지컬 창작자들은 오히려 뮤지컬 음악이 대중들의 귀를 즐겁게 해야 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났다. 특히 프린스-손드하임 콤비는 그 선두에 서서 새로운 시대에 뮤지컬이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연구와 시도를 계속했고, 그 결과 드라마의 기본인 비극성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었다.

 

프린스-손드하임, 그 위대한 협업

사실 해롤드 프린스와 스티븐 손드하임은 각각 21세와 19세인 1949년부터 업계 친구로 지냈는데, 첫 번째로 함께한 작품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57)라는 사실은 두 사람의 작품 취향이 일치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우연에 의한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린 중심 캐릭터들의 이야기로 유럽에서 일반화된 오페라의 낭만주의 비극 정서와 통한다. 이러한 취향은 당시 쇼 뮤지컬 중심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는 변방으로 치부되었는데 두 사람의 이후 작업은 그 취향을 대안으로 만들어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뮤지컬의 다양성을 일구어냈다.

두 사람은 <로마에서 일어난 기묘한 사건>(1962)에서 제작자와 작사/작곡가로 다시 만났고 8년 후에는 드디어 <컴퍼니>(1970)에서 연출가와 작사/작곡가로 만나 예술적 동지로서의 파트너십이 비로소 시작되었으니 우정을 나눈 지 21년 만의 일이었다.

두 사람의 작품들 가운데 1970년대에 발표된 <컴퍼니>(1970), <폴리스>(1971), <리틀 나이트 뮤직>(1973), <스위니 토드>(1979) 등은 ‘컨셉(Concept) 뮤지컬’이라 불린다. 컨셉 뮤지컬은 드라마의 전개나 내용보다 표현 방식이 중요하다. 컨셉 뮤지컬은 주로 작품의 전체적인 연출과 세트에 의해 규정되며, 이 같은 작품들의 대척점에는 조지 아보트로 대표되는 ‘통합(Integrated) 뮤지컬’이 있다. 통합 뮤지컬이 완성도 있는 드라마와 감미로운 음악을 바탕으로 각각의 특징적인 장면을 하나의 구조 아래 쌓아올리는 볼거리 종합 선물 세트라고 한다면 컨셉 뮤지컬은 표현하는 방식이 이야기보다 상위개념에 있는 형식이다. <컴퍼니>는 연애와 결혼, <폴리스>는 젊음에의 회한, <리틀 나이트 뮤직>은 거짓과 허세, <스위니 토드>는 광기와 멜로를 ‘사실적’이기보다 ‘예술적’인 방식으로 추구한다. 그는 단일 세트를 선호하며 마치 모더니즘 미술처럼 외형적으로는 비현실적이지만 그 의도와 표현을 곱씹어볼 수 있는 심미안을 관객들에게 불러일으킨다. 이는 리얼리즘적인 화려한 디테일이 중시되던 브로드웨이 메인스트림과 비교해서 혁신적인 접근이었다. 참고로, 1970년대 후반 해롤드 프린스는 <스위니 토드>가 올라가는 시기에 대서양을 오가며 <에비타>의 연출을 맡았는데 에바 페론이 당대 매스컴에 의해서 성녀 혹은 정적이 되는 정치/사회 현상에 집중하는 해석을 선보이며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팝 음악과 묘하게 조화되는 해롤드 프린스의 색깔이 유지되었다. 


지상 최대의 쇼를 연출하다 <오페라의 유령>

스티븐 손드하임과의 마지막 협업인 <메릴리 위 롤 어롱>(1982)은 브로드웨이 창작자들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과감한 신인 기용과 함께 실패로 끝났다. 이후 해롤드 프린스는 헨릭 입센의 동명 희곡을 뮤지컬로 만든 <인형의 집>(A Doll's Life, 1982)을 연출하는데, 그 역시 큰 실패를 거두고 전성기는 끝났다는 악평을 듣게 된다. 계속되는 실패의 나락에서 그를 구한 것은 바로 <오페라의 유령>이었다. 오늘날 가장 흥행에 성공한 뮤지컬 작품이지만 애초에 원작이 가진 어두운 분위기와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대중적인 멜로디가 잘못 만나면 자칫 어색한 3류 공포물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원작 특유의 스산함을 극대화하며 추락하는 샹들리에로 대표되는 아날로그적인 무대 스펙터클을 구현하며 재미와 진중함을 다 갖춘 명작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노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1990년대에도 노장의 취향과 실력은 변하지 않았다. 존 칸더-프레드 엡 콤비가 오랜만에 발표한 신작 <거미여인의 키스>(1993)는 남미의 형무소를 배경으로 동성애자인 몰리나와 혁명 주모자로 잡혀 들어온 발렌틴이 그 안에서 나누는 우정과 독재 권력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히는 인간의 존엄성,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환상 등이 어우러지는 파격적인 내용으로, 이는 해롤드 프린스의 뛰어난 연출로 마무리되었다. 또한 신인 작곡가인 제이슨 로버트 브라운과 함께 만든 <퍼레이드>(1998)는 누명을 쓴 한 죄 없는 유대인 남자를 린치한 남부 폭도들의 실화를 담았다.

그의 활동이 곧 미국 뮤지컬이 전 세계 라이브 엔터테인먼트에서 예술적인 양식화의 길을 걷는 커다란 여정이었다. 그는 고전 뮤지컬 음악의 두 대표 장르인 클래식(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과 재즈(카바레)에서 시작하여 대중음악이 로큰롤 시대로 바뀐 이후에 시대의 변화를 반영해 브리티시 팝(오페라의 유령)으로 어두운 자아의 내면을 노래하는 ‘다크 프린스(Dark Prince)’ 스타일을 선보였고 드라마성이 강조된 손드하임(스위니 토드)과 포스트-손드하임(퍼레이드)에 이르는 브로드웨이 쇼튠의 변천사를 온몸으로 체득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제 포스트 프린스는 누구일까? 브로드웨이의 많은 후배 연출가들이 현재 뮤지컬을 이끌고 있다. 그들 중에는 연극 연출가나 안무가 출신의 베테랑으로 기능적인 면이 뛰어난 인물들도 많지만 ‘총체적인 인물됨’으로 그를 뛰어넘을 만한 연출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왕자’로 태어나 ‘왕’이 된 그가 떠난 빈자리는 앞으로도 클 것 같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2호 2019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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