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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 어떤 수난곡, 마리 앙투아네트 [No.192]

글 |김영주 공연 칼럼니스트 2019-09-28 5,234

어떤 수난곡,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이 바꾼 운명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대한 군주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 부군 프란츠 요제프는 당시 왕족으로서는 극히 드물게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였다. 마음이 통하고 보니 운 좋게도 정치적인 상황까지 맞아떨어진 보람이 있게 두 사람은 무려 열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합스부르크는 혼인할지어다’의 그 합스부르크 가문을 이끄는 수장답게 마리아 테리지아는 정략결혼 판에 카드로 낼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을 최대치로 생산한 것이다. 

다산으로 주변국 왕실의 부러움을 산 여제의 열다섯 번째 아이 마리아 안토니아는 뛰어난 자질을 타고난 빛나는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소녀는 밝고 활기찬 성격이었지만 공부에는 영 취미가 없었다. 당대 유럽 왕실에서 가장 지적인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타고난 재기에 비해 집중력이나 인내심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승권이 주어지는 아들이었어도 열다섯째 자식쯤 되면 훈육에 각별한 관심이 쏠리지 않는 법이니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만약 자매 중 가장 아름다웠던 언니가 천연두에 걸려 얼굴이 망가지면서 프랑스 왕실과의 혼담이 꼬이지 않았다면,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은 그저 마리아 안토니아로 역사 속에 흐릿하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이 특별할 것 없는 명랑한 소녀를 프랑스 왕태자비 마리 앙투아네트로, 그리고 최후에는 사형수 루이 카페의 아내이자 그 자신도 사형수인 카페 부인으로 만들어서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 세워놓았다. 

열네 살의 나이로 프랑스 왕태자비가 된 이후로 마리 앙투아네트라고 불리게 된 소녀는 그로부터 최후의 순간까지 등 뒤에서 ‘오스트리아 여자’라는 모멸적인 호칭을 들어야 했다. 루이 15세의 딸인 시고모부터 저잣거리의 평민들까지 그런 쪽으로는 혁명 전부터 이미 평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크 황실은 유럽 각국의 계승권을 가지고 치열한 라이벌전을 벌이는 사이였고 전쟁 또한 당연히 잦았다. 더 큰 적이 생겨서 갑자기 화친을 맺기로 하고 혼약을 성사시킨다고 해서 오랜 적대국에 대한 묵은 감정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얌전하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던 루이 16세는 선대의 프랑스 왕들과 달리 공식 정부를 두지 않았다. 왕비는 그저 왕실 한쪽에서 후계자를 낳는 존재이고 안주인으로서의 실질적인 권력은 왕의 애첩에게 주는 것이 프랑스 왕실의 관행이었다. 남편의 외도를 국가적으로 공인받는 치욕을 겪지 않아도 되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겠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절대왕정 아래서 신음하는 백성들은 분노를 쏟아낼 샌드백을 필요로 하는 법이었다. 

왕의 옆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아름답고 부도덕한 여인에게 주어진 숨은 역할 중에는 이렇듯 ‘공공의 적’ 노릇도 있었다. 궁정 여인들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가득한 외설적인 팸플릿은 그 시대에 최고로 인기를 끄는 대중적인 포르노이자 가짜 뉴스였는데, 원래대로라면 왕의 정부가 주인공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애첩조차 거느릴 수 없도록 소심한 국왕을 쥐고 흔드는 오스트리아 여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어떤 왕의 정부보다 강렬한 증오를 받으며 그 역할까지 감당해야 했다. 결혼 후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7년 동안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 음탕한 레즈비언이었고,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자기 자식과 근친상간하는 타락한 지옥의 여왕이 되었다. 절대왕정의 반석 위에 있던 시절에는 이 근거 없는 낭설들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에 티끌만큼의 영향도 미치지 못했겠으나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간 이후 그 추악한 루머는 왕비를 단두대에 세우는 공식적인 죄목이 된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의 패배자 

굶주린 백성들을 향해 ‘빵이 없으면 과자(또는 케이크 또는 브리오슈)를 먹으라고 하죠’라는 멍청한 말을 해서 혁명의 불씨를 던졌다는 유명한 악성 루머는 이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덧씌워진 국민적인 중상모략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역설적으로 증언해 주고 있다. 베르사유의 안주인으로서 화려한 연극과 음악회를 즐기는 패션 아이콘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는 자신이 태어난 환경을 기준으로 했을 때 상대적으로 사치를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이 사냥을 하다가 실수로 다치게 한 백성을 직접 찾아가서 사과하거나 자신의 마차에 치인 어린아이를 왕궁에 데려와서 치료하며 보살피기도 했다. 사치품을 선물로 사달라고 조르는 어린 딸에게 성 밖의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잠잘 곳과 먹을 것이 있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한다고 엄격하게 훈육해서 원망을 받기도 했다. 호프부르크 왕궁에서의 어린 시절 가정교사들에게 들었던 평가처럼 마리 앙투아네트는 기본적으로 상냥한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지속적인 의지와 집중력이 현저하게 부족했다. 백성들의 삶이 어떤 사회적인 모순 때문에 고통스러운지에 대한 이해와 책임감이 없이 이뤄진 선행은 시혜적이었고 일시적인 변덕에 가까웠다. 

정리하자면 자연인으로서 루이 16세와 그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선량한 사람들이었지만 격변의 시기에 무지는 죄가 되었다.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 자신의 삶과 모순되게도 딸들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쳤지만 오직 막내딸인 마리 앙투아네트만이 그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며 어떤 정치적인 야심도 품지 않았다. 하지만 대혁명이 일어나고 왕실의 운명이 벼랑 끝에 서자 우유부단한 남편을 대신해서 결단을 내리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저 놀기 좋아하고 격식을 싫어했던 해맑은 왕비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 후에야 기대 이상으로 자신의 역할을 해냈지만 수많은 불운이 겹치고 그보다 더 강력한 역사의 물결이 휘몰아치자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류에게 엄청난 진보를 안겨준 프랑스 대혁명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인간사의 고통스러운 모순이 가득하다. 가장 선량한 왕족들은 왕과 왕비에게 신의를 지키다가 끔찍한 고통과 치욕 속에 목숨을 잃었다. 반면 그 누구보다 탐욕스럽게 백성들을 수탈했던 이들은 해외로 도피한 후 혁명 세력을 자극하는 언행으로 왕실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본국으로 도피했다가 왕비를 구하기 위해 다시 돌아왔던 랑발 공비는 공개적으로 왕비를 비난하라는 요구를 거부한 죄로 내려치는 망치에 머리를 맞아 살해당한 후 시신마저 찢겨 나갔다. 하지만 한때 랑발 공비를 밀어낼 만큼 왕비의 총애를 받았고 그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서 엄청난 부를 쌓았던 폴리냐크 백작 부인은 누구보다 빨리 국외로 도피했고 오늘날 모나코 왕실의 선조가 되었다. 국가 재정을 파탄 내는 데 큰 역할을 했던 루이 16세의 야심 찬 두 남동생은 재빨리 오스트리아로 넘어가서 형의 죽음을 부추겼고 훗날 반동의 물결을 타고 루이 18세와 샤를 10세로 즉위한다. 반면 그 남매들 중에서 가장 종교적으로 신실한 인물이었던 선량한 엘리자베트 공주는 오빠의 곁을 끝까지 지키다가 어린 조카에게 음탕한 행위를 가르쳤다는 모욕적인 죄를 뒤집어쓰고 올케 마리 앙투아네트의 뒤를 이어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마리 앙투아네트,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대공으로 태어나 프랑스 왕비가 되었던 그를 단두대에 세운 결정적인 잘못은 무엇일까. 그는 분명 완전무결한 사람이 아니었고 시대의 변화와 그에 대응해야 하는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어떤 잘못도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성이라는 점보다 더 그를 강력하게 단두대 앞에 서게 했던 원인이 되지 않았다. 루이 16세에게 주어졌던 마지막 예우조차 없이 처형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머리카락을 잘리고 손이 묶인 채 가축 수송용 마차에 실려 처형장까지 끌려가는 동안 왕비의 모습은 구경거리로 노출되었다. 화려하게 치장한 57대의 마차와 함께 군중의 환호 속에 프랑스로 시집을 왔던 열네 살의 황녀는 증오에 찬 야유를 받는 서른여덟 살의 사형수가 되어서도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생의 마지막 시기에 그 자신이 편지에 썼던 것처럼, 인간은 오직 고통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 마리아 안토니아는 그 깨달음을 시대의 격변, 개인의 비극 한 가운데서 증명해 낸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2호 2019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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