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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차미>​, 차마 미웁지 않지만 호감은 아닌 이유 [No.201]

글 |정수연 공연 평론가 사진제공 |PAGE1 2020-06-18 3,786

<차미>
차마 미웁지 않지만 호감은 아닌 이유 

 

 

‘나’를 묻는 작품들

근래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둔 창작뮤지컬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레드북>과 <호프> 그리고 <마리 퀴리>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완전히 다른 소재와 다른 결을 가졌지만 이들 작품이 나아가는 방향은 같다. 한마디로 나는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거다. 이들이 출발하는 ‘나’의 자리는 초라해서 현실적이다. ‘난 뭐지?’를 묻는 <레드북>의 안나는 ‘나머지’일 뿐이고, 에바 호프는 ‘동네 미친년’이며, 마리 퀴리는 변방의 외국인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 아닌 것을 자기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안나는 스스로를 ‘나쁜 여자’라고 일컫고, 호프는 자기를 ‘원고’와 동일시하며, 마리는 ‘라듐’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은 점차 깨닫는다. 남들이 자기를 가리키는 말이 내가 아니고, 자기가 꽉 붙잡고 있는 것 역시 나 자신이 아니며, 심지어 자기가 이룬 성취 또한 자기 자신이 아님을 말이다.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 나임을 발견하는 사람들. 그 발견의 끝에 그들은 자기의 언어와 이름을 얻는다.
 

이런 흐름은 창작뮤지컬이 한 걸음 나아갔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오랫동안 창작뮤지컬의 큰 지류는 ‘난 널 사랑해’의 동성애적 금기와 ‘나는 너야’의 심리적 자기분열이었다. 이야기의 내구성보다는 소재의 클리셰에 무게가 실린 작품이었던 거다. 이런 부류의 작품은 양면성을 지닌다. 소재에 대한 관심도가 유지될 때 작품은 실제 완성도보다 훨씬 큰 반향을 갖지만 반대로 소재가 식상해지면 그만큼 시즌을 반복할 동력을 잃게 되는바, 창작의 총량에 비해 지금껏 공연되는 작품이 많지 않은 것은 단지 제작비나 캐스팅의 문제만은 아닌 셈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작품들이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재의 분위기에 갇히지 않고 다시 이야기라는 틀에 집중하는 흐름을 보여주니 말이다. 그동안 창작뮤지컬은 이야기를 너무 홀대해 왔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드는 데 공을 들이는 작품이 하나둘 쌓이고 있음은 분명 좋은 징조이다. 
 

<차미> 역시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의 맥락 위에 있는 작품이다. SNS에 존재하는 나와 현실을 살아가는 나. 둘 중에 어떤 나를 진짜 나로 선택할 것인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 그 흐름을 같이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결은 사뭇 다르다. SNS의 인물이 현실로 툭 튀어나오는 등 전체적으로 판타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드라마라기보다는 만화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밝고도 발랄하다. 어쩌면 이런 분위기야말로 뮤지컬이라는 형식에 가장 걸맞은 질문의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의 무거움이 아니라 상식의 가벼움 위에서 자라나야 할 생각이자 태도임을 일깨우니 말이다. 진지한 생각일수록 가볍게 나누는 법에 익숙해져야 하건만. 그런 일을 가장 잘해낼 장르는 다름 아닌 뮤지컬이다. 비록 이 작품에서는 증명되지 못한 사실이지만서도.

 

질문하는 자, 싸워야 하건만

가벼운 형식 위에 묵직한 질문을 얹기에 <차미>의 힘이 달리는 까닭은 여러 가지다. 일단 만화적인 설정을 현실과 섞는 과정에서 논리적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것부터가 문제다. 이런 문제는 이 작품이 의도하는 바와 실제로 설정하는 바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충분히 만화적이지만 정작 이 작품이 차미라는 인물을 설정하는 방식은 판타지라기보다는 희극에 가깝다. 예를 들어 차미가 현실로 튀어나와 차미호의 이름으로 취직을 하는 순간 가상의 인격이라는 틀은 깨지기 마련이다. 차미는 차미호에게 구애받지 않는 독립된 자아로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이 되는 거다. 이건 가상 인물을 다루는 판타지가 아니라 이란성 쌍둥이의 희극에 어울리는 설정이다. 이런 희극적 설정에 그래도 판타지의 옷을 입히겠다면 차미와 차미호는 행복하거나 난처하게 자주 포개지면서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두 자아는 현실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미호라는 이름으로 현실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이 여자를 SNS의 판타지로 볼 이유가 뭐가 있나. 그냥 동명이인으로 보면 되지.
 

작품의 의미를 함축하기 위해 가져온 소설의 메타포 역시 애매하긴 마찬가지다. 현실의 청년은 ‘레디메이드 인생’을, 가상의 청년은 ‘옹고집전’을 읽지만 이 소설들은 줄거리에서 추출된 일차적인 정보로 인물을 설명하는 기능만 할 뿐이다. 현실의 청년은 기성품이요 완벽한 청년은 가상의 존재라는 단순한 정보 말이다. 책은 각자의 정체성을 상징하건만 서로 다른 사람의 책을 바꿔 들어도 사건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생기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야기에 자연스레 녹아들지 못한 채 작가의 의욕에만 그친 아쉬운 설정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모두 부차적인 문제이다.
 

이 작품의 선량함과 해맑음에 힘이 실리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 투쟁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언제나 ‘지금의 나’를 부정하는 곳에서 출발한다. 그 자리에서 ‘세상이 원하는 나’와 ‘있는 그대로의 나’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거다. 그래서 무엇이 진짜 나인지를 찾아가는 여정은 세상과의 싸움이든지 나 자신과의 싸움이든지 험난한 투쟁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레드북>의 안나가 사회의 편견과, <호프>의 호프가 과거의 상처와, <마리 퀴리>의 마리가 성과의 유혹과 싸우듯이, 차미호는 차미와 싸워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싸우지 않는다. 싸운 적도 없는데 어느새 서로 화해하더라. 왜 차미가 아닌 차미호라는 이름을 선택하게 되는지 이야기는 선명하지 않다. 생각나는 건 몇 번의 격려와 몇 번의 결심뿐이다. 아, 이 대책 없는 선량함을 어떡하지. 격려와 결심으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다고 진짜로 믿는 거라면 정말 어째야 하나.  

 

여전히 피상적인 ‘나’

이 작품이 유난히 설명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은 노래로 상황을 설명하고 노래로 자기를 고백하여 노래로 결심을 반복한다. 심지어 지문이어야 할 말까지(‘이제 들어가야겠다!’) 모두 대사가 되어 있더라. 이 작품에는 그저 상황만 있다. 차미가 활개를 치고 다닐 때 차미호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고, 예전부터 날 좋아했다고 고백하는 남자는 피해 다닌다. 내가 좋아하는 선배에게는 감히 말도 붙이지 못하고, 하는 일은 편의점 알바를 가는 것밖에 없다. 주인공 차미호는 이런저런 상황에서 정말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행동하지 않는 이야기에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오히려 이 작품에서 열일 하는 것은 배우 최성원과 서경수가 맡은 캐릭터들이다. 최성원의 무표정한 얼굴과 서경수의 과장된 몸짓이 만났을 때 터지는 웃음의 시너지는 꽤나 크다. 
 

우선 탓해야 하는 건 물론 극작의 기술이다. 좀 의외이기는 하다. <명동로망스>의 작가 조민형은 이미 <정글라이프>에서 직장인의 생활을 우화적으로 그려내는 솜씨를 보여준 바 있기 때문이다. 극작이 메우지 못한 틈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오히려 현실의 풍경이다. 자기를 긍정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의지를 다지며 그저 결심하고 또 결심하는 사람들의 안간힘이 이 작품에 무의식적으로 배어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짠하기도 하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의 음악은 따뜻함과 다정함으로 시종일관 밝고 경쾌하지만, 자주 자연스러운 말의 음역을 넘어서 애써야 도달해야 하는 가성 세계와 섞여버린다. 마치 결심을 다지는 일의 힘겨움을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차미호는 차미와 화해하고 차미가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며 행복해하지만 아마 곧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모습 역시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만약 ‘있는 그대로의 나’를 찾는 것이 이 작품이 바라는 결론이라면 먼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부터 있는 그대로 그려내기. SNS의 차미보다 더 구체적으로 담아내야 할 인물은 당연히 현실의 차미호이다. 하지만 덜 자란 것 같은 말투나 어린애 같은 몸짓이나 어울리지 않는 머리 스타일이나 맞지 않은 옷을 볼 때 현실의 차미호는 피상적인 존재에 불과하니 이를 어쩌나. 현실에 존재하는 평범한 인물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일에 이 작품은 능숙하지 못하다. 이것이 비단 이 작품만의 얘기일까.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 이들이 견뎌야 하는 것은 언제나 지금의 ‘나’인바, 이 작품은 차미호를 좀 더 자세히 바라봐 줘야 한다. 어느 시의 한 구절처럼, 그래야 예쁘다. 

 

*외부 필진의 리뷰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1호 2020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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