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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펀홈>, ​뮤지컬이 문학을 비행기 태우면? [No.203]

글 |정수연 공연 평론가 사진제공 |달컴퍼니 2020-08-13 3,354

<펀홈>
뮤지컬이 문학을 비행기 태우면? 


 

가족극의 전통

가족이라는 존재는 인류 공통의 화두이다. 가장 가까이에 있지만 서로를 가장 모르고 그런데도 서로를 안다고 착각하는 사이. 모든 드라마가 가족으로부터 시작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극은 갈등의 이야기인바, 가족만큼 붙어 앉아 갈등하는 관계가 어디 있겠나. 따지고 보면 오이디푸스의 비극도 가족 사이의 참변이고 햄릿의 비극 역시 가족 안의 다툼이니 세상의 모든 드라마를 한마디로 축약하면 가족극인 셈이다. 물론 오이디푸스나 햄릿은 가족이라는 말보다는 가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그들의 갈등은 자기만의 인생을 찾기 위한 것도, 자기가 선택한 사랑을 지키기 위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가치의 명분으로 부딪혔다. 그들의 이야기에 가족극이 아닌 비극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이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비극 역시 가족극의 하위 범주라는 사실.   
 

이것은 비범한 가문이 아니라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에서도 일상의 비극을 발견하게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사적 공동체로서 가족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이후 가족극의 틀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은 고뇌를 끌어안고 산다. 가족극 중 아무거나 떠올려보시라. 행복한 가족? 없다. 평범함의 표면 밑에 끊을 수 없는 관계와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뿌리 깊게 깔려 있음을 보게 될 뿐이다. 그래도 가족에겐 유대감과 안전함이 있어서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만큼 완고한 틀이요 저버리기 힘든 의무여서 자기만의 자유와 사랑을 선택하려면 떨치고 나서야 하는 세계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근대 이후의 가족극에 등장하는 많은 주인공들처럼 절규하거나 고립되거나 자기를 죽여야 할까. 화해와 화합은 불가능한 걸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이런 문제의식은 특히 미국의 현대 드라마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유진 오닐과 테네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에 이르기까지 가족극은 미국 드라마의 큰 축을 이루는 대표적인 장르이다. 가족으로 대변되는 현실의 질서와 억압에 대항해서 진정한 삶을 찾기 위해 갈등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미국의 현대 드라마가 일군 최고의 문학적 성취인바, 가족극은 미국적인 서사를 관통하는 이야기의 전통에 다름 아니다. 이런 문학적 전통은 비단 희곡에서뿐 아니라 뮤지컬로도 확장되어 이어져 왔다. <넥스트 투 노멀> 같은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은 뮤지컬에서 서사는 문학을 향해 깊어지고 형식은 연극을 향해 넓어졌더랬다. 브로드웨이라는 이름은 문학의 전통을 넉넉히 끌어안는 또 다른 전통의 이름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지점이다. 

 

전통을 이어받은 <펀홈> 

<펀홈> 역시 이런 문학적 전통을 충실히 잇고 있는 작품이다. 게이 아버지와 레즈비언 딸이라는 소재는 이 작품을 성 소수자의 이야기로 보이게 하지만 이 작품은 미국 현대 드라마의 중심 테마인 가족극의 주제 의식을 그대로 받아안은 이야기로서 ‘미국적인 가족극’의 전형을 보여준다. 단란하고 평범해 보이는 가족의 틀 안에서 욕망을 억누르고 살아가는 아버지와 자기의 정체성을 선언하고 자기로서 살아가는 딸이 엇갈리듯 서로의 삶을 이해해가는 이야기. 하지만 그 이해의 방식은 따뜻한 해피엔딩이 아니다. 가족 모두가 서로를 받아들인다는 가짜 화해나 지금까지의 삶을 반성하며 가족에게 돌아오는 비현실적 희망 따위는 애초에 없다. 이들 가족의 이야기가 공감을 이끌어내는 이유는 서로가 ‘함께할 수 없음’을 정직하게 직시하는 데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이야기는 자살인지 사고인지 모를 아버지 브루스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브루스는 이 가족의 균열에 핵심적인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지만 정작 그의 마음은 작품 전체에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그는 설명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누군가에 의해 설명되고 해석되어야 하는 온전한 타자이다. 이 작품이 이야기의 구조를 세 개의 층위로(앨리슨의 현재 시점, 가족 안에서의 아버지를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시점, 자신의 커밍아웃과 아버지의 죽음이 있었던 젊은 시절의 시점) 나눈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세 개의 시점을 넘나드는 사이 브루스의 말과 행동은 ‘캡션!’(삽화에 붙는 설명)을 외치는 딸 앨리슨에 의해 표면 밑에서 더 깊게 해석된다. 이해할 수 없던 과거의 장면을 비로소 설명하게 되면서 이 가족의 서사는, 비록 함께할 수 없어도, 화합의 희망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썩 친근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에게 가족극은 공영 방송의 주말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대가족 판타지이고, 미성년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아버지의 행동은 현실의 맥락에서 볼 때 범죄를 연상시키며, 아무리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라지만 존재감은커녕 주변인에 불과한 어머니의 캐릭터는 왠지 부당해 보인다. 이야기의 온도 역시 낯설다. 서로를 이해해 가는 아버지와 딸은 단 한순간도(마지막에 딱 한 번 나누는 대화에서조차도!) 뜨거워지지 않고 냉정할 만큼 덤덤하다. 40대의 앨리슨이 가족의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듯이 관객들 역시 이들 부녀의 감정에 이입되기보다는 그들의 풍경을 그저 지켜보게만 되는 거다. 확 끌어당기는 이야기이기보다는 계속 생각하며 따라가게 만드는 이야기라고나 할까. 감정을 크게 퍼 올리지 않으면서도 마음의 소리를 담아내는 데 부족하지 않은 음악의 방식에서도 이런 면모는 잘 나타난다. 여러모로 ‘한국적인 것’과는 꽤나 거리가 있는 작품임이 분명하다. 

 

단순하지 않은 미덕

그럼에도 이 작품이 지닌 흡인력은 세다. 공연의 화술이 기여하는 바는 크다. 이 작품의 무대 언어는 서사의 결을 능숙하게 받아안는다. 예를 들어 공간을 양면으로 나누어 무대를 가운데 두고 서로를 마주보게 되는 객석은 이야기의 서사적 구조를 잘 끌어안은 공간적 설정이다. 당사자이자 관찰자인 주인공 앨리슨의 관점을 객석으로 확장한 공간의 배치인 셈이다. 조명 역시 적극적이다. 사각형과 원형의 조명은 극 중 인물들의 물리적 공간과 내면의 심리를 드러내는 실질적이고도 상징적인 장치로 큰 역할을 한다. 빈번하게 사용되느라 자칫 설명적이기는 해도 의미를 담은 공간의 언어로 ‘열일’하는 조명은 오랜만이라 반갑다. 아역 배우들의 연기는 극에 활기를 불어넣고 40대 앨리슨을 맡은 방진의는 캐릭터와 완벽한 싱크로를 보여주더라. 
 

브루스 벡델을 연기한 최재웅은 여러모로 아쉽다. 관록의 배우답게 그의 연기는 안정적이지만 브루스 벡델이 지닌 여러 겹의 정체성을 표현하기에는 적잖이 평평해 보이더라. 토니 어워즈의 남우주연상이 이 역할에 돌아간 것을 보면 이 캐릭터가 그만큼 복잡다단하단 뜻일 텐데 말이다. 앨리슨이 기억으로 소환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은 복합적이고 예민해야 하건만 이들이 만들어내는 의미의 겹은 그다지 두텁지가 않다. 어린 앨리슨의 시점은 아버지의 이야기이고 젊은 앨리슨의 시점은 앨리슨의 이야기인 만큼 같은 정체성을 가진 두 사람의 각각 다른 선택이 분명한 대조를 이루지 못한 채 흘러가 버리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결과일 것이다.
 

그래도 이 작품의 미덕은 훼손되지 않는다. 이 작품에는 공연다운 공연을 보는 흡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단선적인 이야기를 하나의 감정으로 밀어붙이는 뮤지컬과는 달리 이 작품은 오히려 감정으로부터 거리 두기를 함으로써 이야기를 따라가는 또 다른 통로를 찾게 만든다. 작품이 연극적인 느낌을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단순하지 않은 이야기 덕분이고, 단순하지 않게 보여주는 공연다운 화술 덕분이다.  
 

<펀홈>이 큰 흥행을 거둘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이 던지는 생각거리는 만만치가 않다. 그중에서도 자기네들의 극적 전통을 뮤지컬이라는 장르로 잇는 방식이 그렇다. 이 작품은 미국의 문학적 전통에서 최고의 성취를 일궈낸 가족 멜로드라마를 계승하는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브루스와 앨리슨이 ‘비행기’를 타며 최고의 균형을 이뤄냈던 것처럼 문학적 서사와 뮤지컬 장르도 멋진 어우러짐을 만들어낸 셈이다. 우리 창작뮤지컬이 생각해 봐야 할 지점이다. 창작은 아예 없는 데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계승하는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해 아래 새것은 없는 법이니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3호 2020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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