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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OVER STORY] 이루어진 꿈, 조승우 [No.207]

글 |배경희 사진 |심주호 stylist | 홍한나 hair | 혜진, 장하늬 at 정샘물 인스피레이션 이스트 make up | 고연정, 최이현 at 정샘물 인스피레이션 이스트 2021-02-01 19,539

이루어진 꿈, 조승우

여기, 자신을 지탱하는 무게 중심이 있는 곳은 언제나 무대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20년이란 시간 동안 뮤지컬과 드라마, 영화계에서 한 번도 잊힌 적 없지만, 손에 쥐어지는 차고 넘치는 선택 가운데 뮤지컬을 단 한 번도 잊지 않았던 배우. 그리고 자신이 무대를 잊을 수 없는 까닭을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세상에 증명하는 배우. 그는 여전히 무대에 서기 전 이렇게 기도한다. 어제와 오늘, 내일이 같을 무대이지만 항상 오늘 처음 서는 것처럼 느껴지게 해달라고. 예언처럼 말하면 그의 기도는 이루어질 것이다. 그 자신보다 더 간절하게 그가 이 무대에 익숙해져서 이곳을 떠나지 않길 기도할 관객이 너무도 많으니까.




오랜 꿈이 현실이 될 때  

오늘은 배우 조승우의 뮤지컬 인생을 쭉 되짚을 거니까 옛날이야기부터 천천히 해볼게요. 그런데 승우 씨는 지나간 일을 잘 기억하는 편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똑같을 거예요. 기억하고 싶은 건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건 날려버리고. 그런 선택적 망각의 존재죠. 

그럼 뮤지컬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추억은 뭔가요. 
1995년에 <사랑은 비를 타고>가 초연돼서 붐을 일으켰던 때가 있어요. 삼성동 현대백화점 위에 있는 현대 토 아트홀이란 극장에서 공연하고, 남경읍 선생님, 남경주 형님, 최정원 누나, 이렇게 세 분이 출연하셨죠. 그 당시 ‘사비타’ 표 값이 만 오천 원이었던가? 그때 저는 계원예고 1학년생이었는데 사랑 티켓 학생 할인으로 그 공연을 진짜 많이 보러 다녔어요. 그리고 또, <브로드웨이 42번가>도 많이 봤고, <명성황후>랑 <드라큘라>도 여러 번 봤어요. 고등학생 때 서울예술단 작품들은 다 챙겨 봤고요. 계원예고는 학생들이 공연을 많이 볼 수 있도록 잘 챙겨줬거든요. 

승우 씨가 고교 시절에 공연을 많이 보러 다녔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죠. 중학교 3학년 때 친누나가 참여한 학교 공연 <돈키호테>를 보고 뮤지컬배우를 꿈꾸게 됐다는 일화도 유명한데, 데뷔 7년 만에 꿈을 갖게 해줬던 작품에 출연하게 됐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궁금해요.
<맨 오브 라만차>는 제 꿈이었어요. 언젠가 이뤄야 하는 꿈. 그런데 스물여섯에 막상 기회가 왔을 때는 제가 이 작품을 소화하지 못할 것 같아 쉽게 못 덤비겠더라고요. 사실, <지킬 앤 하이드> 초연을 끝내고 나서 오디컴퍼니 신춘수 대표님께 <맨 오브 라만차>를 하자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하지만 오랜 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어요. 극 중에서 세르반테스가 까라스코한테 “친구여, 난 오십 년을 사는 동안 생을 직시해 왔소”라는 말을 하는데, 아무리 배우라 해도 스물여섯 살짜리가 그 대사를 할 수는 없잖아요. 2년 후 2007년 공연을 제안받았을 때는 ‘이십 대의 패기로 나를 작품에 던져보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덤볐다가…, <지킬 앤 하이드>를 처음 준비할 때보다 훨씬 더 큰 두려움을 느꼈어요. ‘내가 사랑하는 작품을 망쳐버리면 어떡하지?’ 싶어서요. 첫 공연을 앞두고 무대에 서기 전에 너무너무 많이 긴장했는데, 공연이 끝나고 나서는 꿈을 갖게 됐을 때의 감동을 무대에서 느꼈어요. 그때 그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꿈과 이상을 포기하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라는 돈키호테의 대사가 중학생 조승우의 마음을 뒤흔들었다고 했잖아요. 그 대사가 여전히 제일 마음을 떨리게 할까요?
(잠시 상상하듯) 돈키호테가 황금 투구를 얻고 나서 영주님한테 기사 작위를 내려줄 수 있냐고 하는 장면 있잖아요? 실상은 여관 주인인 영주님이 “뭐, 해드리죠” 그러는데, 돈키호테는 혼자 막 상상해 본단 말이에요. 자신이 기사 작위를 받는 이 역사적인 밤을 후대 현인들이 어떻게 묘사할지 생각해 보자면서요. 그러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허영으로 가득 찼다면서 하늘에 기도해요. 온전한 나의 정신만을 소유하고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되어질 모습을 연모하겠다고, 어리석은 환락을 좇지 않고 여인들에게 예의를 갖추겠다고, 그리고 사랑하는 한 여인만을 바라보겠다고. 저는 대본에서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글로 읽히지 않고 그림으로 보여요. 무대 앞으로 쭉 걸어 나오면서 대사할 때의 그 이미지들이 막 상상되죠. 제가 굉장히 사랑하는 장면 중 하나예요. 그런데 <맨 오브 라만차>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모든 장면이 전부 다 좋아요. 그래서 제가 이 작품을 놓지 못해요. ‘친구여, 난 오십 년을 사는 동안 언제나 생을 직시해 왔소’ 이 대사가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공연하고 싶죠.

예전엔 승우 씨가 몇 작품에만 계속 반복해 출연하는 게 섭섭할 때가 있었어요. 온전히 관객 입장에서요. 그런데 2015년 <맨 오브 라만차>를 보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좋은 작품과 함께 깊어져 가는 배우를 보는 건 뮤지컬 팬으로서 누릴 수 있는 행복 중 하나겠다. 그때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뮤지컬 장르에서 활동할 때 유독 신중하게 출연작을 선택하는 배경에는 완벽을 추구하는 성향이나 관객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게 작용하나요?
제가 재연을 많이 하다 보니 활동한 기간에 비해 작품 수가 적잖아요? 저도 물론 새로운 작품에 대한 갈증은 있어요. ‘지킬’, ‘라만차’, ‘헤드윅’, ‘스위니’…, 이 작품들 말고 또 어떤 작품을 만나게 될지 제 자신도 궁금해요. 나이를 더 먹기 전에 다른 작품을, 다른 역할을 해보고 싶긴 한데, 영화나 드라마가 저한테는 일종의 창작극이다 보니 그런 갈증을 조금 참을 만하다고 해야 하나. 제 경우엔 새로운 작품을 찾으러 다니려면 그에 대한 갈망과 열정이 뒤섞여 마음속에서 뭔가 번쩍여야 하거든요. 전구에 불이 탁 켜지듯이.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저는 초연 욕심이 있어요. 배우와 창작진, 스태프 들이 워크숍 하듯 공동 작업을 한 후에 그걸 관객분들에게 선보였을 때의 희열 때문에요. 예를 들면, <조로> 때는 ‘조로’라는 큰 나무에 잎이 자라나고 열매가 열리기까지 모든 팀원들이 다 같이 ‘이게 좋겠다’, ‘저게 좋겠다’ 하면서 함께 작품을 만들어갔어요. 모든 작품을 그렇게 작업할 순 없겠지만, 초연은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크잖아요. 하지만 요즘에는 초연 작품이 예전처럼 많지 않은 데다 나이에 부딪쳐서 못 하게 되는 경우가 꽤 많아요.

왜요, 나이에 안 맞는 것 같아서요?
네, 캐릭터 나이가 너무 많거나 너무 적거나 그래요. 물론 제가 이미 지나온 시기의 역할은 인생 경험이 있으니까 그 감정을 끄집어내서 할 순 있겠죠. 근데 그렇게 하고 싶진 않더라고요. 특히 청춘이란 특정 연령대의 예민한 감수성은 연기로 흉내내서 표현할 수 없어요. 제가 지금 <렌트>의 로저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너무 어색하지 않을까요.

좀 다른 이야기지만, 배우 조승우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나이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영화 <말아톤>에서 명연기를 보여줬을 때 겨우 스물다섯이었다, 이런 식으로요. 혹시 승우 씨도 ‘이 사람은 몇 살 때 이런 연기를 했지’ 하고 의식해 본 적 있어요? 
이 연령대에 어떻게 그런 연기를 하지? 저는 이런 말이 좀 웃기다고 생각해요. 배우가 나이에 비해 연기를 잘한다는 게 말이 될까 싶은? 생각해 보면 아역 배우들 중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건 그들이 어린 나이치고 연기를 잘한 게 아니라 자기가 맡은 인물을 캐릭터에 맞게 잘 해낸 거예요. 나이하고 연기는 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나이를 기준 삼아 연기를 평가하고 싶진 않아요.




연달아 만난 대표 인생작 

<지킬 앤 하이드> 2004년 초연은 배우 조승우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연이에요. 그 작품의 성공으로 삶의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 텐데, 그때를 되돌아보면 어떤 기억이 먼저 떠올라요?
첫 공연을 마치고 커튼콜 하러 나갔을 때 관객들 눈을 보고 울음이 터졌어요. 너무 벅차서. 그때 그 기억이 되게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못 해낼 것 같아 도망치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두려움을 누르고 도전해서 무언가를 성취했다는 그 희열감. <지킬 앤 하이드>는 저 조승우라는 사람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된 작품이에요. 배우로 일어서기 시작한 계기가 됐다고 할까. 물론 그 이전에 2000년부터 뮤지컬을 해왔지만, <지킬 앤 하이드>를 통해 공연 관계자나 관객분들에게 뮤지컬배우로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맞아요, 정말 많은 게 바뀌었죠. 

<지킬 앤 하이드>가 국내 초연 10주년을 맞았을 때 <더뮤지컬>에서 역대 배우들에게 짧은 글을 받았던 적이 있어요. 그때 승우 씨가 ‘이 작품이 나에게 준 선물은?’이란 질문에 ‘오만함과 자만심, 무너짐’이라고 답해서 인상적이었어요. 굉장히 솔직한 답변 같았거든요. 
초연 때 한 달 정도 공연했던가. 공연 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어요. 짧은 기간에 크게 성공했으니 배우나 스태프는 물론 제작사도 당연히 기뻤겠죠. 그래서 그해 연말에 조금 무리해서 앙코르 공연을 잡은 거예요. 음, 16년이 지났으니까 말해도 되겠죠? 사실 연말 공연 전에 <말아톤> 촬영이 예정돼 있어서 앙코르 공연은 초연 때처럼 두세 달 연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같은 공연을 몇 달 만에 다시 하는 거라 해도 캐스팅이 바뀌면 다른 공연이나 다름없거든요. 근데 제가 자만했죠. 제작사도 자만했던 것 같고요. 예전에 연습했던 기억을 믿고 충분한 연습 없이 무대에 섰는데, 공연 중에 성대결절이 생겨서 원래 내던 소리를 못 냈어요. 그러면서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죠. 게다가 그때는 <말아톤>이 엄청 흥행해서 인간 조승우가 되게 이상해졌던 시기예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나이에 승승장구했으니, 들뜨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요? 그 상태를 자각하지 못하고 거기 머무르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요. (웃음)
<지킬 앤 하이드> 초연을 끝냈을 때는 내가 못할 작품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앙코르 공연을 할 때 예전처럼 기량을 못 내니까 답답해서 매일 절실히 기도했어요. 그러다 제 어렸을 때 모습이 눈앞에 보인 거예요. 그저 무대에 서기만 하면 행복해하던 그 소년이. 이름을 알리고 부를 얻게 되면서 사람들이 잘 해주고 높게 평가해 주는 것에 무뎌지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그때 느꼈어요. 특히 비싼 돈을 내고 공연을 보러 와주는 관객들, 그들의 수천 개 눈동자가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건 문제 있는 거다, 이런 생각이 드니까 소름이 쫙 끼치더라고요. 저는 솔직히 안 그럴 거라 생각했거든요. 상황이 달라져도 안 변할 줄 알았어요. 그리고 일이 잘될수록 더 완벽하고 싶으니까 점점 예민해졌어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는 사람은 그게 누구든 멀리하려고 했고, 일할 때 방해받는다는 생각이 들면 굉장히 독하게 굴었어요. 그러니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게 참 미안했죠. 다행히 그런 상태가 오래가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서 바로 깨졌지만요. (웃음)

<지킬 앤 하이드> 다음으로 초연 록 뮤지컬 <헤드윅>을 택해서 당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죠. 조승우 신드롬이 한창일 때 트랜스젠더 록커로 소극장 무대에 서다니, 엄청 파격적인 행보처럼 보였을 것 같긴 해요.
<헤드윅>은 제가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했던 작품이에요. <헤드윅> 같은 뮤지컬은 세상에 또 없잖아요. 뉴욕의 작은 드래그 퀸 클럽에서 시작된, 일반적인 뮤지컬과는 태생이 다른 작품이니까. 공연 형식도 모노드라마에 가깝다 보니 배우에게 많은 자율성이 주어지는데, 저는 이 공연을 헤드윅이 어떤 공간을 빌려서 콘서트를 한다고 생각했어요. 뮤지션이 관객들과 교감하면서 술술 자기 이야기를 하는 그런 콘서트. 그래서 초연 때 문어체였던 대사를 다 구어체로 바꿨어요. “내 노래 들려줄까? 이 노래가 어떻게 만들어졌냐면, 옛날에 엄마가 이런 적이 있었어. 아, 토미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하지?” 이런 식으로요. 항상 어떻게 하면 좀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을 했어요. 제 공연 녹음을 들으면서 기억하고 싶은 애드리브는 노트에 적은 다음 그걸 바탕으로 업그레이드, 또 업그레이드! 찾아보면 집에 <헤드윅> 노트가 되게 많을걸요. 

<헤드윅>은 출연할 때마다 러닝타임을 새로 쓰다가 10주년 시즌에 무려 3시간 40분 공연이란 기록을 남겼잖아요? 오랜 시간 이 작품과 함께하면서 많은 고민을 한 결과겠지만, 애드리브로 공연을 그렇게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게 짜릿했을 것 같아요. 솔직히 좀 오만해질 것도 같고. (웃음)
아니에요, 저 되게 소심해요. <지킬 앤 하이드> 때 오만해지고 자만심을 가졌을 때도 “난 이렇게 잘해!” 이런 생각은 별로 안 했어요. 제 안에는 자신감과 두려움이 항상 공존해 있어요. 새로운 역할을 만났을 때는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더 크고요. (인터넷에 동료 배우들의 조승우 연기 예찬이 읽다 말 정도로 많은데도요?) 예전에 설앤컴퍼니 설도윤 대표님이 저한테 천재라고 해주신 적이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감사하지만 동의할 수는 없어요. 제가 봤을 때 저는 못하는 게 너무 많거든요. 지금 저한테 “<레 미제라블> 장 발장 할래요?” 그러면 저는 “아, 못합니다” 그럴 거예요. <오페라의 유령>에서 팬텀 역할 가능하겠냐고 하면 “못합니다, 저는 못해요” 하겠죠. 이렇게 구멍이 많은 천재가 어딨어, 저는 천재 아니에요. 전 절대 못하겠다 싶은 작품은 포기도 빨라요. 대신 내가 감히 못할 것 같은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을 보면 좋은 자극을 받죠. 

그럼 혹시 관객들에게 배우로서 신용을 잃었다고 느꼈던 순간도 있어요? 
아니요.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려고 해서 그런가. 세상이란 게 그렇더라고요. 저라는 배우가 많은 사람에게 박수 받는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제 연기를 좋아할 순 없어요. 열심히 캐릭터를 고민해서 후회 없이 연기했는데, 누군가는 “뭐야, 왜 저렇게 연기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단 말이죠. 사람마다 각자 취향이 다르고, 생각하는 방향도 다르니까. 이젠 그런 반응에 좀 초연해졌어요. 제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면, ‘좋아, 됐어, 이걸로 만족하자’ 하고 저를 다독일 수 있어요. 설령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더라도 ‘다음에 할 때 더 도전해 보면 되지’ 이렇게 넘겨요. 예전에 완벽주의 성향이 강했을 때는 그런 마음을 못 가졌거든요. 누구 한 사람에게라도 연기 못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막 억울했어요. 내가 이걸 왜 못했지 이러면서. 그럼 그날은 새벽 네다섯 시까지 잠을 못 자요.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 늘 배짝 말라 있었던 거예요. (웃음) 이제는 최고가 될 수 없음을 알기에 최선을 다하는 게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마음의 여유가 생긴 거죠.




언젠가는 이어지는 운명의 끈

최근 5년 사이 출연작 가운데 가장 의외였던 작품은 2015년에 공연된 <베르테르>예요. 오래전 인터뷰에서 서른 전에 다시 해보고 싶은 작품이라고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예전 공연을 놓친 저는 조승우의 베르테르를 영영 못 볼 줄 알았거든요. 베르테르로 돌아오기까지 13년이 걸렸는데, 당시 마음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요?

제가 <베르테르> 15주년 공연을 하게 될 줄은 저도 예상하지 못 했어요. 굉장히 갑작스럽게, 드라마틱하게 결정된 일이었죠. 제작사에서 트리플 캐스팅으로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참여하기로 했던 배우에게 사정이 생겨서 제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거예요. 당시 출연 중이었던 <맨 오브 라만차>를 끝내고 열흘 후에 곧바로 <베르테르>를 시작하는 일정으로요. 다신 못 할 거라 생각했던 작품을 시간이 흘러 우연히 만나게 되다니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았어요. 공연하면서 다른 작품을 연습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에요. 다행이었던 건, (전)미도도 저랑 같은 상황이었던 터라 같이 <맨 오브 라만차>를 공연하고 <베르테르>를 준비하면서 힘을 얻었죠. 구소영 음악감독님도 많은 힘이 되어줬고요.  

오랜만에 다시 <베르테르>를 만나 보니 어땠어요?
연습실에서 눈물이 터져서 연습하다 멈춘 적이 있어요. 저녁에 공연하러 가기 전 음악 연습을 하는 날이었는데, 마지막 곡 ‘발길을 뗄 수 없으면’ 전주를 듣고 눈물이 터진 거예요. “그대는 어쩌면 그렇게 해맑을 수 있는지” 이게 첫 소절 가사잖아요? 그런데 “그대는” 이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전주가 시작되자마자 2002년 공연 때의 추억들이 마구 생각나서 감정이 북받친 거죠. 도저히 노래를 못 하겠어서 구소영 음악감독님을 쳐다봤더니 누나도 울고 있었어요. 우리 왜 이러냐면서 막 웃다가 다시 또 울고. <베르테르>를 지금 이 시기에 만날 운명이었나 보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의 기억은 잊을 수 없어요. 

신인 시절에 했던 작품들은 아무래도 각별한 면이 있을 것 같아요.  
2002년 <베르테르>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도 소극장도 아닌 컨벤션센터(현재 체임버홀)에서 간이 의자를 놓고 했어요. 공연 초반에는 관객이 많지 않았는데, 나중엔 추가 좌석을 만들어야 했죠. 스태프들이랑 같이 보조석을 깔고 거기 종이 좌석표를 붙일 때 얼마나 행복하던지. 엄밀히 말하면 극장이 아닌 이곳에 관객들이 우리 작품을 보러 와서 같이 울고 박수 쳐주는 게 너무 신났어요. 공연을 잘 끝내고 나서 심상태 대표님, 구소영 음악감독님, 고선웅 연출님, 정민선 작곡가님, 그리고 모든 배우들이 호프집을 빌려 회식했던 것도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어요. 호프집에서 앙상블 형들이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좋은 사람들을 만나 관객들에게 인정받는 좋은 작품을 공연했다는 사실이 진짜 행복했어요. 

2002년 공연과 2015년 공연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지만, 승우 씨가 스스로 느낀 가장 큰 차이점은 뭐였나요?
2002년에 제가 했던 베르테르는 연기가 아니었어요. 실제로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거든요. 개인적인 경험을 녹여내서 감정을 폭발시키기도 하고 갈무리하기도 하고 무대에서 모든 걸 쏟아내면서 진심 그대로 연기했어요. 이런 걸 무대 연기의 순기능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커튼콜 때 걸을 힘도 없을 만큼 공연에 모든 에너지를 썼는데, 관객들의 눈빛과 박수에 5퍼센트였던 배터리가 단숨에 100퍼센트로 충전되는 느낌을 경험했죠. 나 진짜 뮤지컬배우구나, 뮤지컬 하길 정말 잘했다,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어요. 2015년 공연도 이 작품을 다시 만나게 돼서 행복하게 공연했지만,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청년 느낌은 안 났던 것 같아요. 베르테르의 사랑에는 무모함이 있어야 하는데, 자꾸 이성이 감성을 누르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20주년 공연은 아무래도 못하겠다고 했어요. 저는 이제 사랑 이야기를 하려면 <닥터 지바고>를 해야죠. 제 나이에는 그런 감성이 어울리니까. (웃음) 

안 그래도 이쯤에서 <닥터 지바고>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먼저 말을 꺼내주시다니 고맙습니다. (웃음) 저는 승우 씨에게 <닥터 지바고>는 아픈 손가락 같은 작품 아닐까 생각했어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분명 더 아프게 느껴지는 손가락이 있기 마련이니까. 
아니요, 그 작품 아픈 손가락은 아니에요. 예전엔 그렇게 표현했는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아요. 대중적으로 흥행하지 못했더라도 앞으로 계속 발전해 갈 것 같아서요. <닥터 지바고>는 작품성만 놓고 보면 분명히 가치 있는 작품이에요. 음악이나 드라마를, 그 작품이 품고 있는 향기를 생각해 보면 그렇죠. 2012년에 초연했을 때 공연 시간이 세 시간을 넘었던 기억이 나는데, 어두운 내용을 길게 공연했으니까 관객분들이 보시기에 쉽진 않았겠구나 싶어요. 하지만 뭐든 삼세판은 해봐야 한다고 하잖아요? 지금까지 두 차례 공연됐으니까, 한 번 더 기회가 있는 거죠. 저도 언젠가 꼭 다시 할 거예요. 

배우 조승우의 뮤지컬 목록에 가장 새롭게 이름을 올린 <스위니 토드>는 어떤 기억으로 남았나요. 4년 전쯤 승우 씨가 이 작품을 처음 준비할 때 진행했던 인터뷰에서 뭐가 가장 두려운지 물었더니 스스로의 조급함이라고 답했던 게 기억나요.
그때는 사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스스로 “너 이거밖에 못해?” 이러고 있었을 때라. 배우들에게 손드하임 음악은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직접 경험해 보니까 음악을 이해하기 전까지 제 자신이 음치, 박치가 된 것 같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티켓이 오픈되고 몇 장 팔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깨를 짓누르는 중압감이 너무 커서 개막 당일까지도 도망가고 싶었어요. 프리뷰 첫 공연 15분 전에 다 같이 모여서 “한번 해봅시다!” 파이팅을 외칠 때, 무섭고 두려워서 손발이 차가워지는데 죽을 것만 같았어요. 한참 주저앉아 있다가 기도 한 번 ‘빡’ 하고 무대로 ‘탁’ 나갔죠. 근데 관객분들이 시작부터 공연을 즐기는 거예요. ‘파이 송(The Worst Pies in London)’이 끝났을 때는 객석에서 발을 구르면서 웃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때 느꼈죠. 이 작품은 작품이 나를 끌고 가주는구나. 긴장을 풀고 릴렉스한 상태로 작품에 나를 맡기면 되는데, 발악해서 작품을 끌고 가려고 하니까 힘들었던 거예요. 스티븐 손드하임은 정말 대단한 작곡가인 것 같아요. 모든 곡 가사와 음에 담긴 의미가 명확해서 그대로 해낸다면 인물의 감정선이 표현돼요. 제가 굳이 연기를 더 하려고 하지 않아도요.




다시 한 번 꿈꾸며

이번 인터뷰에서 꼭 물어보고 싶었던 건 <오페라의 유령> 초연 오디션 에피소드예요. 제작사 직원 실수로 불합격 통보를 받고 영화 <후아유>를 찍게 된 걸로 알고 있는데, 나중에 ‘이쪽이 아니라 저쪽 길을 갔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을지 궁금하더라고요. 

<오페라의 유령> 오디션 과정은 정말, 너무나 길고 힘들었어요. 배우가 할 수 있는 온갖 걸 집요하게 다 시키는 느낌? 저는 라울 역에 지원해서 라울과 크리스틴의 듀엣곡인 ‘All I Ask of You’를 연극 대사처럼 읽고 시로 읊어보란 주문을 받았던 게 제일 기억나요. 게다가 오디션을 왜 그렇게 길게 보는지, 30분 넘게 계속돼서 적응 못하고 힘들어하다… 도중에 나와 버렸어요. 더 이상 보여줄 게 없어서 못하겠다고 하고요. 그때 도망가는 저를 잡으러 나왔던 사람이 박칼린 음악감독님이랑 서범석 형이었을 거예요. “왜 그래, 다 보고 가!” 이러면서. (웃음) 그날 이후에 한 번 더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니지 또 기다리래요. <후아유>를 할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영화사 쪽에 계속 양해를 구했어요. 아직 오디션 결과 발표가 안 났다고 하면서요. 그러던 중 집 우편함에 탈락 카드가 잘못 도착한 거예요. 그땐 그 사실을 몰랐으니까 그길로 바로 <후아유>를 계약하러 갔어요. 뭐, 제 인연이 아니었던 거죠. 만약 그런 해프닝이 없었다면, 제가 라울을 하게 됐다면…. 글쎄요, 이미 공연된 작품이니까 어떤 말이든 제 마음에만 담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의 뮤지컬 출연작 중에서 가장 자주 생각나는 작품은 뭐예요? 힘들 때마다 꺼내보는 추억 같은 작품이요.
극단 학전에서 한 <의형제>요. 2000년에 이 작품으로 데뷔했고, 그 시기가 저한테는 참 소중해요. 제 데뷔 시절 추억들은 전부 학전 극장에 남아 있어요. 그리고 <의형제>는 다시 공연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더 생각나요. 영국 작가가 쓴 <블러드 브라더스>를 원작으로 하는데, 무슨 이유인지 자세히 모르지만 공연이 못 올라가고 있거든요. 김민기 선생님이 우리 정서에 맞게 번안을 참 잘하신 작품이라 아쉽죠. <의형제>는 공연에 참여했던 모든 배우들이 그리워해요.

배우이기 전에 관객으로서 좋아하는 작품은 뭘지 궁금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레 미제라블>이에요. 이제 시간이 좀 지났으니까 말하자면, 국내 초연 오디션에서 자베르 역에 지원했다가 떨어졌어요. 잠깐, 그러고 보니 저는 캐머런 매킨토시 작품은 다 떨어졌네요? (웃음) <오페라의 유령>도 떨어지고, <레 미제라블>도 떨어지고,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났으니까 이것도 이야기해도 되겠지? <미스 사이공> 영국 공연에 ‘엔지니어’로 오디션을 봤다가 떨어진 적이 있어요. (홍)광호가 참여했던 그 프로덕션 공연에 저도 오디션을 봤거든요. 충무아트홀에서 <맨 오브 라만차>를 공연하고 있을 때였는데, <미스 사이공> 국내 제작사에서 연락이 와서 영국 공연 오디션을 보겠냐고 하더라고요. 나를? 내가 엔지니어를? 깜짝 놀랐죠. 이야기를 들어보니, 영국 프로덕션에서 동양인 역할에 서양 배우를 쓰지 않으려고 아시아 프로덕션 쪽에 배우를 추천해 달라고 했대요. 급하게 영어로 오디션 영상을 찍어 보냈어요. 그런데 영국 가서 본 최종 오디션에서 떨어졌어요. 런던에서 광호랑 같이 공연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아무튼 제 최애 작품은 <레 미제라블>이에요. 고등학생 때 앨범을 통째로 외워가면서 이 작품으로 혼자 노래를 배웠거든요. 그때 버전별로 산 음반들이 아직도 집에 있어요. 장 발장은 테너라 제가 소화를 못 하고, 자베르는 언젠가 한번 해보고 싶어요.

조금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배우로서 어떤 때 외롭다고 느껴요?
사람들이 삼십 대가 되면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난다고 하잖아요? 저는 마흔에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일 년에 몇 작품씩 하다 보니까 어느덧 사십 대가 됐는데, 문득 제 진짜 모습이 뭔지 모르겠는 거예요. 지난 삶을 돌아보면 내가 연기했던 역할들만 생각나고, 사람 조승우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는? 그러니까 허탈해지더라고요. 인생의 절반을 살았는데 내가 내 자신을 모른다고? 지난봄에 십오 년 동안 키운 우리 강아지를 떠나보내고 펫로스 증후군을 겪으면서 생각이 더 많아졌어요. 그래서 이제는 한 작품을 끝내면 스스로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져봐야겠다 싶더라고요. 가까운 곳으로 잠시 여행을 떠난다든가 하는 식으로. 작년에 제주도에 가서 좋은 풍경 보고, 맛있는 거 먹으니까 힐링이 됐거든요. 아무 생각 없이 슬렁슬렁 걸어 다니는 것도 참 좋았고. 저는 원래 집돌이라 여행을 별로 안 좋아했어요. 그런데…, 여행을 다니려고 마음먹었더니 코로나가 터져서! (허탈한 웃음) 후배들한테도 작품을 끝내면 어디로든 훌쩍 떠나라고 했더니 주위에서 저보고 많이 변했대요.

배우 인터뷰에서 많이 듣는 이야기는 ‘열심히 노력해서 잘하겠다’는 거예요. 작가라면 하루에 일정 분량의 글을 쓰는 게 노력일 수 있고, 무용수는 정해진 시간만큼 신체 훈련을 하는 게 노력이겠지만, 배우들이 할 수 있는 노력은 뭘지 그 말이 항상 추상적으로 들렸어요. 승우 씨의 연기 기본 방침이랄까,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노력법이 있을까요? 
저는 후배들한테 연기 이야기를 많이 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각각 다른 사람이 다른 역할을 맡는 건데, 제가 어떻게 조언할 수 있겠어요. 대신 이런 이야기는 하죠. 네가 맡은 역할에 대해서는 이 지구상에서 네가 제일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고. 모든 것에서 영감을 쓸어 담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상상을 많이 해보는 게 좋아요. 예를 들면 드라마 <비밀의 숲>을 찍을 때 일기를 참 많이 썼어요. 황시목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감정이 들까? 그의 모든 것에 ‘왜?’, ‘어떻게?’라는 궁금증을 갖기 시작하면 수많은 물음표들이 모여서 캐릭터가 만들어져요. 그래서 저는 뭔가 떠오를 때마다 핸드폰 메모장을 켜요. 몇 월 며칠 몇 시, 지금 이 풍경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뭘까, 물음표. 흐린 오늘 날씨에 예전엔 몰랐던 감정이 느껴지는데 이 느낌은 뭘까, 또 물음표. 이런 식으로 느낌표보다 물음표가 많은 일기를 쓰면 나중에 다 도움이 되더라고요.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 이야기이지만요.

마지막 질문으론 이걸 묻고 싶어요. 조승우의 인생을 뮤지컬 앨범으로 만든다면 첫 곡과 마지막 곡으로 뭘 넣을래요?
어우, 되게 신선한 질문인데요? 아, 너무 어려운데. 서곡으로는 <베르테르>의 ‘금단의 꽃’이 어울릴 것 같아요. 왜냐면 제 유년기가 되게 어두웠거든요. 슬픔이 ‘촤아아아’ 가라앉아 있는 상태였다고 할까. 어렸을 때는 외로움이 많았어요. 맨 마지막 곡은 되게 밝은 음악, 밝은데 멋있는 음악. 아! <레 미제라블>의 ‘One Day More’가 좋겠다. “원 데이 모어(내일로)~” 하하. 마흔하나, 딱 지금까지 인생의 엔딩곡으론 이게 좋을 것 같아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7호 2020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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