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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STAGE DESIGN] <데스노트> 무대 디자인, 신의 게임판 위에 놓인 인간 [No.212]

글 |안세영 사진 |오디컴퍼니 2022-09-23 4,767

<데스노트> 무대 디자인
신의 게임판 위에 놓인 인간

 

이 노트에 이름이 적힌 자는 죽는다! <데스노트>의 모든 이야기는 사신 류크가 지루함에 못 이겨 인간 세계에 떨어트린 노트 한 권에서 시작된다. 노트의 힘을 빌려 악인을 심판하는 구세주 ‘키라’로 거듭난 라이토와 그런 키라의 정체를 밝히려는 탐정 엘, 둘의 치열한 대결 뒤에는 이 모든 것을 재미있게 지켜보는 사신이 있다. 오디컴퍼니가 새롭게 제작한 이번 프로덕션의 무대 디자인 콘셉트는 ‘장난스러운 신들의 게임과 그 위에 놓여진 인간이라는 말’. 사신의 초월적 힘에 놀아나는 위태로운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무대 바닥과 천장, 벽면 전체에 LED 디스플레이를 설치해 게임 화면처럼 변화무쌍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데스노트>의 무대 세트, 조명, 영상, 소품 총괄 디자인 디렉터를 맡은 오필영 디자이너에게 그 제작 과정을 들어보았다.

 

 

신이 그은 선이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


공연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째깍거리며 돌아가는 무수한 시계 바늘의 영상이다. 이 시계 바늘 하나하나는 사신의 눈에 보이는 인간의 남은 수명을 가리킨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되면 영상 속에서 류크의 손이 나타나 시계들을 하찮은 잡동사니 치우듯 확 쓸어버리고 그 위에 ‘DEATH NOTE’라는 타이틀을 적는다. 이처럼 <데스노트>의 세계관 안에서는 사신이 노트에 쉽게 써넣은 획 몇 개가 인간의 생사를 결정한다. 오필영 디자이너는 바로 이 점에 착안해 선이라는 요소가 전체 무대 영상을 이끌어가게 만들었다. “신이 그은 선이 인간 세계를 좌우하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장면마다 다양한 형태의 선으로 공간을 구성했어요. 연출가와 협의해 배우들이 선을 벗어나지 않도록 동선을 짜서 통제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했죠. 또한 작품 속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일이 신에게는 단지 재미있는 장난에 불과하기 때문에, 영상의 시점(Perspective)을 계속 바꾸어 장난스러운 게임처럼 보이게 만들었어요.”


일반적으로 공연 무대에는 프로젝터를 이용해 벽면에 투사하는 프로젝션 영상이 주로 사용된다. 하지만 <데스노트>는 바닥, 천장, 벽면 전체에 소자 간격이 3mm인 고해상 LED 패널 1380장을 설치해 입체감 있고 선명한 영상을 보여준다. “신이 인간들에게 ‘여기서 놀아’ 하고 정해준 공간 외에는 모두 검은 무지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그러려면 밝은 무대와 어두운 무대 바깥의 대비가 뚜렷해야 하는데, 프로젝터를 사용하면 아무리 다른 조명의 밝기를 낮추어도 지금처럼 영상이 선명하게 보일 수 없어서 LED를 도입했죠.” 하지만 너무 눈부신 빛은 관객의 눈을 피로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적정 수준의 밝기를 찾는 것이 중요했다. 현재 무대 영상의 밝기는 LED가 낼 수 있는 최대 밝기의 3분의 1 수준에 맞춰져 있다. 사람의 눈은 빛에 익숙해진 뒤에는 작은 빛도 또렷하게 보기 때문에 후반부로 갈수록 밝기를 더 낮추었다.


공연 도중 영상이 꺼지는 일이 없도록 사고 대비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 바닥 LED 위로는 장면에 따라 다양한 대도구가 지나가는데, LED 패널 하나가 1톤 무게를 견딜 수 있기 때문에 미사의 콘서트 장면에서 6톤짜리 조명 타워가 들어서도 바닥 영상은 끄떡없다. 혹시라도 LED 패널이 꺼지면 무대 밑에서 그 부분만 재빠르게 교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160분간 고해상도 영상을 끊임없이 재생해야 하는 컴퓨터는 최고 사양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메인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그 기능을 대신할 수 있는 백업 컴퓨터도 추가로 마련되어 있다. 공연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400개가 넘는 큐 사인에 맞춰 영상을 전환하는 오퍼레이터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사전에 영상 길이가 계산되어진 장면도 있지만, 대부분 매일 달라지는 배우와 음악의 호흡에 맞춰 자연스럽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인 오퍼레이터 외에 비상 상황에서 투입할 수 있는 보조 오퍼레이터를 따로 두고 있다.

 

 

 

디자인 파트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


<데스노트>는 무대 세트, 조명, 영상, 소품을 통틀어 디자인하는 창작 집단 ‘이모셔널 시어터(Emotinal Theatre)’의 첫 작품이기도 하다. 뮤지컬계에서 무대디자이너로 오랜 경력을 쌓아온 오필영 디자이너가 이곳의 총괄 디자인 디렉터를 맡고 있다. “작품 개발에 오랜 시간을 들이는 브로드웨이와 달리 국내 공연계에서는 디자이너가 단기간에 작업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다른 파트 디자이너들과 충분히 소통하면서 작업을 진행하기가 어려워요. 이런 제작 환경에서 효율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다가 이모셔널 시어터를 만들게 됐죠.” 이모셔널 시어터에 소속된 무대, 조명, 영상, 소품 디자이너는 늘 함께 모여 일하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쉽게 의견을 나눌 수 있다. 서로의 영역을 경계 없이 넘나들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장면별로 시각적 표현 목표를 정해놓고 그 목표를 이루는 과정을 모두가 함께했어요. 영상에 등장하는 건물은 무대디자이너가, 거리의 조명은 조명디자이너가 담당하는 식이었죠. 디자인 파트의 경계를 허물고 더욱 긴밀하게 협업했어요.”

 


자체적으로 개발한 사전 시각화(Pre-visualization) 시스템도 작업의 효율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가상 공간에 실제와 똑같은 형태의 무대를 3차원으로 구현해 놓고 원하는 대로 조명과 영상 등을 조정해 가며 공연 장면을 시연해 볼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을 통해 극장 셋업 전에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며 언제 어떤 조명과 영상을 사용할지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제작자, 연출가와도 사전에 합의를 마쳤기 때문에 테크 리허설 기간에 쉽고 빠르게 디자인 수정을 마칠 수 있었다.


현재 이모셔널 시어터에는 10여 명의 디자이너와 어시스턴트가 소속되어 있으며, 향후 더 많은 현장 디자이너를 수용할 예정이다. 오필영 디자이너는 졸업 후 일자리를 찾기 힘든 공연계 디자인 전공자에게 현장에서 일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창작자에게도 제작자에게도 더 좋은 제작 환경을 만들어 한국 공연계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이모셔널 시어터의 목표입니다.” 

 


오필영 디자이너가 말하는 <데스노트> 장면별 영상 콘셉트

 

 

라이토와 엘의 공간
라이토의 방 배경에 있는 커다란 창문은 그의 범행이 대담해짐에 따라 변화가 생긴다. 초반에 라이토가 데스노트를 숨겨놓고 조심스레 사용할 때는 창문에 커튼이 쳐져있다. 그러다 커튼이 흔들리고 빛이 새어 들어오면서 키라를 연호하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마치 라이토를 향해 “사람들은 널 원해! 더 대범해져!”라고 속삭이듯이. 후반에 이르면 라이토는 커튼이 걷힌 환한 방에서 거침없이 데스노트를 꺼내 사용한다. 어긋난 신념을 좇아 한 방향으로 곧게 나아가는 라이토의 외골수적인 면은 창틀의 직선적인 격자무늬에도 반영되어 있다. 반면 엘의 방 창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굳게 닫혀있다. 이는 자기 머릿속 생각에만 빠져 사는 엘의 폐쇄적인 캐릭터를 보여준다. 엘의 또 다른 활동 공간인 수사 본부는 바닥을 체스판 무늬로 디자인해, 키라를 잡기 위한 수사가 엘에게는 게임이나 다름없음을 드러냈다.

 

류크와 렘의 공간
류크와 렘은 둘 다 사신이지만 성격은 정반대다. 류크가 인간을 지루함을 달래줄 장난감 정도로 여긴다면, 렘은 인간에게 연민을 느끼며 도와주고 싶어 한다. 작품 속에서 류크가 ‘보잘것없는 인간들끼리 힘을 겨뤄봤자 아무 의미 없다’ 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존재라면, 렘은 ‘그러니 싸우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자’ 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두 사신의 상반된 캐릭터를 공간이 지닌 정서로 표현했다. 류크가 라이토와 함께 있는 공간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직선적이다. 반면 렘이 미사와 함께 있는 공간은 따듯하고 부드러우며 곡선적이다. 대표적으로 2막의 ‘잔인한 꿈’ 장면에서 렘의 등장과 동시에 직선의 공간이 곡선의 공간으로 전환되는 걸 볼 수 있다.

 

 

다양한 선의 활용
사신의 초월적 힘을 상징하는 선은 때때로 흰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하는데, 여기에는 명확한 규칙이 있다. 사람들이 정체불명의 살인자를 신처럼 떠받들며 붙인 이름 ‘키라’가 언급될 때, 그리고 라이토가 데스노트를 이용해 바로 눈앞에 있는 상대를 죽였을 때, 라이토 자신이 느끼는 흥분과 자극을 표현하기 위해 예외적으로 붉은 선을 사용한다. 가사에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선을 형상화한 장면도 있다. ‘선을 넘지마’라는 곡에서 경시청 국장 소이치로는 아들 라이토에게 “절대 넘으면 안될 선이 있다”라고 충고하지만, 라이토는 이미 그 선을 넘어서 있다. 서로 다른 사상을 지닌 두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선을 집어넣었다. ‘변함없는 진실’ 장면에서는 엘이 혼돈에 빠졌다가 다시금 진실을 찾겠다고 다짐하는 심리적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선을 사용했다. “거짓과 진실의 경계를 포착해, 사느냐 죽느냐 갈리는 경계선”이라고 노래하는 대목에서 엘은 실제로 무대 위에 그어진 경계선을 뛰어넘는다.

 

 

다이내믹한 테니스 경기
라이토와 L의 테니스 경기는 2막에서 둘의 에너지가 가장 크게 맞부딪히는 장면이기 때문에 그 다이내믹함을 어떻게 표현할지가 관건이었다. 테니스는 본래 두 명이 서로 마주 보고 하는 경기지만, 무대에서 그렇게 하면 관객이 배우의 표정 연기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일본 오리지널 공연은 회전무대를 사용해 이 문제를 해결했지만, 우리는 바닥 영상을 활용했다. 바닥의 테니스 코트를 시시각각 이동시키며 경기를 주도하는 쪽이 객석으로 얼굴을 향하고, 끌려가는 쪽이 등을 보이도록 만들었다.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는 부분에서는 코트를 둘로 나눠 두 인물 모두 객석을 바라보게 했다. 테니스 경기는 공 없이 안무로 표현되지만, 공을 받아치는 쪽 코트에 번쩍이는 빛이 들어와 눈으로 경기 흐름을 쫓을 수 있다. 배우의 움직임에 딱 맞춰 빛이 번쩍여야 하기 때문에 이 장면에서 영상 오퍼레이터는 늘 긴장 상태다.

 

 

메세지를 담은 마지막 장면
‘레퀴엠’이 흐르면서 창고 안으로 모래가 쏟아져 들어오는 마지막 장면은 고심 끝에 가장 나중에 완성했다. “힘 있는 자도 힘 없는 자도 사라져 가네”라는 가사처럼 극 중에서 힘을 과시했던 인물들도 결말에 이르면 다른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덧없이 사라진다. 이 장면의 초연한 정서를 어떻게 뒷받침할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모래로 무대 위 모든 사건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내기로 결심했다. 류크가 사과를 깨물면서 폭력적으로 공간을 뒤흔들고 떠난 뒤, 차갑고 날카롭고 어두웠던 공간은 금빛 모래로 뒤덮여 점점 따스한 공간으로 변해간다. 이제 사신은 떠났으니, 남은 인간들은 의미 없는 싸움을 멈추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자는 메시지에 방점을 찍고 싶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2호 2022년 5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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