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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청춘소음> 정욱진, 어른이 되면 [No.220]

글 |안세영 사진 |조현설 2023-01-26 883

<청춘소음> 정욱진
어른이 되면

 

층간 소음으로 인해 갈등하는 낡은 빌라 주민들의 이야기를 그린 창작뮤지컬 <청춘소음>이 초연을 올린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저마다 불안한 삶을 떠안고 살아가느라 벽 너머 이웃의 사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청춘들. 정욱진이 맡은 역할은 비좁은 월세방에서 글을 쓰며 언젠가 동화 『피노키오』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여행하기를 꿈꾸는 작가 오영원이다. 해맑고 개구진 소년의 이미지를 지닌 배우 정욱진. 그는 어른이 되어 꿈과 현실의 격차를 알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일상의 비극과 희극

 

대본을 읽고 인물들이 층간 소음 때문에 괴로워하는 장면에서 백분 공감했어요. 욱진 씨도 층간 소음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그럼요. 배우는 생활 패턴이 일반적인 직장인과는 다르잖아요. 대부분의 직장인이 아침 8시경 출근하는 것과 달리 저는 저녁에 일하고 다음 날 늦게 일어나요. 그런데 보통 인테리어 공사처럼 시끄러운 일은 사람들이 집을 나서는 아침 시간에 맞춰 시작하거든요. 2016년 <쓰릴 미> 첫 공연을 앞두고 긴장감에 시달리다 새벽 4시쯤 잠이 들었는데, 아침 8시부터 이웃집이 공사를 해서 엄청 시끄러운 거예요! 그래서 일찍 극장에 가서 소파에서 자고 첫 공연을 했던 게 아직도 기억나요.

 

극 중 오영원도 밤에 글을 쓰고 아침에 잠드는 작가이다 보니 아침 일찍 출근하는 위층 한아름과 소음 문제로 갈등을 빚잖아요. 혹시 본의 아니게 층간 소음을 유발했던 적은 없어요?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한 뒤에 샤워하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시끄럽다고 옆집 사람에게 혼난 적이 있어요. 그래서 한동안 이불을 뒤집어쓰고 노래하다가, 나중에는 시끄러운 차도를 따라 걸으면서 노래 연습을 했어요. 누가 옆을 지나가면 그때만 잠깐 목소리를 낮추고요. 자연스럽게 볼륨 조절 스킬이 늘더라고요. (웃음)

 

공연을 보면 관객들도 저마다의 사정 때문에 이웃과 갈등을 빚었던 일화를 떠올릴 것 같아요. 요즘은 외국을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나 판타지적인 내용의 뮤지컬이 많다 보니, 이렇게 소소한 일상의 풍경을 그린 작품이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해요.
저도 그런 면에서 신선함을 느꼈어요. 제가 2022년에 출연한 <라흐마니노프> <삼총사> <랭보>는 모두 외국 시대극인데, 이런 작품은 연습 초반에 외국식 이름이나 시대극 말투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려요. 반면 <청춘소음>은 바로 지금 여기가 배경인 만큼 대사가 일상어에 가까워요. 대본을 받아 읽는데 말맛이 좋아서 처음부터 대사가 술술 읽히더라고요. 출연을 결심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예요. 김미경 작곡가님과는 작년에 <디어 마들렌>의 트라이아웃 공연을 하면서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좋은 음악을 써주실 거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음악이 참 좋아요.

 

오영원이라는 인물은 설정이 독특해요. 여행 한 번 안 가보고 여행기를 쓰는 랜선 여행 작가라니!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춰서 인물을 구축하고 있나요?
층간 소음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모습, 그리고 글을 쓰며 행복해하는 모습. 이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영원은 자기가 하는 일에 나름대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거든요. 아름은 영원을 사기꾼이라고 몰아붙이지만, 저는 영원이 꼭 나쁘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아요. 배우도 모든 걸 다 직접 경험해 보고 연기하는 건 아니잖아요? 상상력을 발휘해서 표현하는 거죠. 실제로 가보진 않았지만 가본 것처럼 실감 나게 글을 쓰는 것도, 평범한 여행 기념품에 멋진 이야기로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도 작가로서 영원이 지닌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청춘소음>은 티격태격하던 남녀 주인공이 점점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는 로맨틱 코미디이기도 해요. 그만큼 상대역과의 호흡이 중요할 것 같아요.
영원과 아름은 공연 내내 거의 원수처럼 싸워요. 로맨틱한 합을 맞추는 것보다 싸움의 합을 맞출 일이 많은데, 그러면서도 귀여움을 잃지 않는 게 관건이에요.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처럼, 무대 위 인물들에게는 치열하고 비극적인 전투일지라도 객석에서 보면 웃음이 나고 사랑스러워 보이도록 연기하고 싶어요.

 

초연작은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 배우가 중요한 역할을 하잖아요. 보람이 큰 만큼 힘든 점도 있겠죠?
보통 3인극은 서로 대사를 주고받으며 전개되는데, 이 작품은 혼자 책임져야 하는 장면이 많아서 부담감이 컸어요. 영원이 혼자 상상 속 여행을 떠나거나 혼잣말을 하는 장면이 많거든요. 하지만 그게 또 이 작품만의 재미이기도 해요. 배우의 상상력과 개성을 녹여낼 수 있는 여지가 많아서 각자의 매력이 잘 드러나는 무대가 될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저보다 젊은 연출님과 함께 작업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래서인지 연습실 분위기도 활기차요. 마치 오디션 경연 프로그램처럼 같은 대목을 배우마다 돌아가며 연기하는데, 서로의 연기를 지켜보면서 웃고 박수 치고 좋은 점은 배우면서 즐겁게 연습하고 있어요. 코로나 때문에 아직은 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상황인데, 공연을 보면서 잠시나마 영원과 함께 상상 속 여행을 떠나보시길 바라요. 

 

 

부딪혀 살아보는 여행

 

실제로 여행을 좋아해요?
너무 좋아하죠. 외국 여행 경험은 많지 않지만 국내 여행은 틈나는 대로 자주 가려고 해요. 굳이 멀리 떠나지 않더라도 서울 안에서 여기저기 낯선 곳을 돌아다니는 것도 좋아하고요. 제가 공연계 애주가 모임에 속해 있는데, 모임원들과 함께 서울 곳곳의 분위기 좋은 술집을 찾아다니곤 해요. 아, 요즘에는 팔도 막걸리를 수집하는 게 취미예요. 저희 할아버지가 양조장을 하셨던 터라 뒤를 이어 막걸리 소믈리에 자격증을 따보려고 했는데, 코로나가 퍼지면서 자격증 학원에 신청자가 몰려서 포기했거든요. 대신 수집으로 방향을 바꿨어요. 드라마 촬영이나 공연을 하러 지방에 가면 무조건 한 병씩 사 와요. 이제 한 30병 정도 모았는데 딱 100병까지 모으는 게 목표예요!

 

전작 <랭보>의 방랑 시인 랭보와 <청춘소음>의 여행 작가 영원은 성격은 다르지만 ‘글’과 ‘여행’이라는 키워드로 연결된다는 점이 흥미로워요.
일부러 그렇게 차기작을 고른 건 아닌데 시기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어요. 1월 1일에 “이제 여행을 멈춰야 한다”라고 말하며 <랭보> 마지막 공연을 올리고, 1월 3일에 <청춘소음> 첫 공연을 올리며 다시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거죠! 게다가 <랭보>는 랭보가 ‘영원’에 다다르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청춘소음>에서 제가 맡은 역할 이름이 바로 ‘영원’이잖아요? (웃음) 이 순서대로 공연할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또 하나 재미있는 공통점은 두 작품에 모두 인생을 정의하는 문장이 나온다는 거예요. <랭보>는 “인생은 불행의 연속이다”라는 랭보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고, <청춘소음>의 영원은 연재 글 첫머리에 “인생은 여행이다! 여행은 부딪혀 살아보는 것!”이라는 문구를 반복적으로 사용해요. 언뜻 보면 서로 다른 견해를 나타내는 것 같지만, 저는 그 안에 숨은 의미가 일맥상통한다고 봐요. 랭보 역시 인생을 여행하듯 살았거든요. 불행 또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계속 부딪히며 살아나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면서요.

 

무대 활동 외에 드라마에도 종종 얼굴을 비치고 있잖아요. 색다른 환경에서 연기하는 건 어때요?
제가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 처음에는 낯선 촬영 현장에 적응하는 게 힘들었어요. 현장을 편하게 느끼기 시작한 건 2021년에 방영된 <오월의 청춘>이라는 드라마에 출연하면서부터예요. 이 작품은 배경이 광주라서 출연 배우 가운데 전라도 출신인 저와 김보정 배우가 사투리 감수를 맡았어요. 촬영에 들어가기 한 달 전부터 감독님, 작가님과 사전 작업을 함께하고, 아역들에게 사투리를 가르쳤죠. 그러다 보니 촬영할 때도 낯을 가리지 않고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어요. 이때를 기점으로 현장에서 덜 긴장하게 됐어요. 원래 저는 신나는 연기를 해야 할 때 백스테이지에서 가벼운 장난도 치고 뜀뛰기도 하면서 감정을 끌어올리고 무대에 들어가거든요. 드라마 촬영 때는 얼어 있다가 제 촬영 순서가 오면 바로 연기에 돌입하다 보니 감정을 잡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누가 절 이상하게 보든 말든 필요한 준비를 하고 촬영에 들어가요.

 

무대에서는 순수한 이미지의 역할을 연기할 때가 많은데, 2022년 방영한 <돼지의 왕>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소방서 옆 경찰서>에서는 악역으로 등장해서 새로운 모습을 봤어요.
공연을 병행하며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는 역할을 고르다 보니 주로 짧게 등장하는 악역을 맡게 되더라고요. 그래도 조금씩 어설프고 귀여운 면이 있는 악역들이라서 저만의 색깔이 묻어났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 나이가 이제 30대 중반에 접어들잖아요. 무대에서는 아직 <삼총사>의 달타냥, <랭보>의 랭보처럼 17세 역할을 연기할 때도 있지만, 드라마에서는 제 나이에 어울리는 역할을 맡으니까 자연스레 색다른 모습을 보여드리게 되는 것 같아요. 참고로 <청춘소음> 속 영원의 나이는 28세인데, 제목부터 ‘청춘’이 들어가기 때문에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웃음)

 

영원은 어릴 적 『피노키오』를 읽으며 작가를 꿈꾸었지만, 어른이 되어 피노키오처럼 거짓말만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잖아요. 욱진 씨도 나이를 먹으면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낀 적이 있어요?
현실을 외면하고 글쓰기에만 매달렸던 17세의 랭보처럼 저도 온종일 머릿속에 연기에 대한 생각만 가득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하루빨리 좋은 배우로 성장해서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꿈은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꿈 말고도 지켜야 할 것들이 늘어났어요. 대신 과거의 제가 몰랐던 사실을 깨달았어요. 삶의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역설적으로 연기는 더 깊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요. 결국 연기라는 건 다양한 인물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충분히 이해하고 표현하는 거니까요. 삶의 어떤 경험도 헛되지 않다는 걸 깨닫고 나니까 오히려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연기가 더 재미있어졌어요.

 

지난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해를 준비하는 시기예요. 새해에는 어떤 배우가 되고 싶어요?
20대에는 어떤 배우가 되고 싶냐는 질문을 받으면 쉽게 대답하곤 했는데, 경력이 쌓일수록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한두 마디 말로 정의하는 게 조심스러워요. 사실 저에게 2022년은 배우 생활을 시작하고 가장 힘든 한 해였어요. 아버지가 편찮아서 큰 수술을 받기도 했고, 계획했던 드라마와 공연 출연이 무산되면서 뜻하지 않게 휴식기를 가졌거든요. 그 모든 일이 다 지나가고 다시 즐겁게 공연할 수 있는 시기가 찾아온 것에 감사할 따름이에요. 그럴싸하게 멋 부린 대답을 내놓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즐겁게 일하는 배우이고 싶어요. 제가 즐거워야 저를 보는 관객분들도 즐거울 테니까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0호 2023년 1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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