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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균열을 파고든 목소리 <데미안> 김현진 [No.221]

글 |이솔희 사진 |맹민화 2023-03-09 1,381

균열을 파고든 목소리
<데미안> 김현진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무대로 옮긴 <데미안>은 한 명의 배우가 어느 날은 싱클레어를, 또 어느 날은 데미안을 번갈아 연기하는 2인극이다. 2020년 초연에 이어 3년 만에 다시 <데미안> 무대에 선 김현진은 한층 깊어진 마음으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싱클레어의 성장 여정에 발을 맞추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알에 더욱 큰 균열을 내기 위해. 

 

 

또 한번의 성장

 

3년 만에 다시 <데미안>을 만난 소감이 어때요?
첫 공연 날,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엄청 떨리더라고요. 오랜만에 다시 <데미안>의 싱클레어로 관객 앞에 서서 긴장도 됐고, 저에게 이 작품이 예전과 얼마나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지 기대도 됐거든요. 연습실에서 아무리 작품을 여러 번 연습했을지라도 공연은 관객을 만나야만 완성되는 거니까요. 

 

이번 시즌 공연은 캐릭터부터 무대, 음악, 안무 등에 여러 변화가 생겼어요. 가장 크게 느꼈던 변화는 어떤 부분이었나요?
재연 연습을 시작하면서 오세혁 연출가님이 작품을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비유해서 설명해 주신 게 기억에 남아요. 초연 때는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항상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면 이번 시즌에는 두 인물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전하다가, 공전을 통해 생의 어느 지점에서 한 번씩 만나는 것에 가깝다는 설명이었죠. 제게는 그 차이가 굉장히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했으니 자연스럽게 그 인물을 연기하는 마음가짐에도 변화가 생겼겠네요. 
초연 때는 우선 <데미안>이라는 작품과 가까워지는 게 가장 중요했으니까 원작 소설에 대한 연구를 정말 많이 했어요. <데미안>에 영향을 준 칼 융의 분석심리학 공부도 했고요. 그런데 이번 시즌에는 “내 안에서 솟구치는 길을 따라 살고 싶었을 뿐”이라는 싱클레어의 말처럼 제 안에서 솟구치는 감정에 집중해 보려고 했어요. 초연을 준비하면서 정리해 두었던 자료들도 최대한 보지 않으려고 했죠. 초연 당시의 저에게는 정말 많은 도움이 됐지만, 지금의 제게는 저를 가로막는 하나의 울타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됐거든요. 자료 속의 지식은 이미 제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을 테니, 이번에는 그 무엇보다 내 안에서 피어나는 감정들에 집중하자고 마음먹었어요.  

 

현진 씨가 연기하는 캐릭터에는 항상 치밀한 분석이 담겨 있다고 느꼈는데,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 작품에 다가간다니 인상적이에요.
<데미안> 연습 과정에서 배우들과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어쩌면 제가 여태까지 보여드렸던 치열한 모습들이 두려움에서 기인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조건 잘해내야 한다는, 관객분들께 좋은 무대를 보여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옭아맸거든요. 그 두려움이 제가 작품 속으로 파고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저의 진짜 감정을 가로막는 울타리가 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데미안>은 제 안에 있는 것을 솔직하게 꺼내 놓을수록 치유되는 작품이라서, 이번에는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있는 감정을 꺼내어 표현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어요. 초연 때는 <데미안>이 제게 설렘으로 다가왔다면, 이제는 모험심에 조금 더 가깝다는 느낌이 들어요. 

 

싱클레어와 데미안, 두 인물을 번갈아 가며 연기하는데, 각각의 인물로 무대에 설 때 어느 부분에 초점을 맞추나요? 
싱클레어를 연기할 때는 성장에 초점을 맞춰요. <데미안>이라는 이야기 자체가 싱클레어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싱클레어가 성장을 통해 변화하는 모습을 잘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해요.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자신을 둘러싼 울타리를 뛰어넘을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이기 때문에 어느 한 지점에 올라서 있는 선도자의 역할에 집중하고요. 두 캐릭터를 번갈아 가며 연기하기 때문에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각각의 캐릭터로 등장하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존재라는 것이 더욱 마음 깊숙이 다가와요. 특히 데미안 역을 맡을 때는 데미안뿐만 아니라 크로머, 피스토리우스 등 싱클레어에게 깨달음을 주는 존재로도 등장하는데, 이렇게 <데미안> 속 여러 인물을 동시에 연기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가는 여정은 결국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더 잘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2인극에서 두 인물을 동시에 연기한다는 건 대본을 전부 외워야 한다는 뜻이잖아요. 무대에 서기까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해내고 난 뒤의 뿌듯함은 더욱 크겠죠? 
그래서 <데미안>을 향한 애정이 남달라요. 공연을 올리기 위해서는 작품의 텍스트와 음악이 전부 제 안에 새겨져야 하는 거니까, 연습 과정에서 내가 이 작품을 써 내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어요. 인물들이 느끼는 모든 감정이 전부 내 안에서 솟구쳐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상대방의 캐릭터를 상상해 보는 것과 직접 두 역할을 경험할 때의 감정은 확연히 다르거든요. 전자는 내비게이션을 보고 길을 따라가는 느낌이라면, 후자는 내가 이미 가본 적 있는 길을 다시 가보는 느낌인 거죠. 아는 길이니까 자신감도 있고, 그럼에도 그 길 위에서 새로운 것들이 보여서 재밌기도 하고, 또 내가 이 길을 통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설레기도 하고. <데미안> 무대에 오를 때의 마음이 항상 그래요. 

 

<데미안>이라는 작품이 현진 씨에게 준 가장 큰 깨달음이 있다면요?
“어떤 탄생도 죽음 없이는 태어나지 않는다. 어떤 날개도 뛰어오르지 않으면 증명되지 않는다.” 싱클레어의 대사에 제가 이 작품을 통해 깨달은 모든 것이 담겨 있어요. 성장이 반드시 한 계단 위로 올라가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추락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오히려 더 큰 날갯짓을 위한 도약의 순간일 수도 있고, 추락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도 있죠. 이런 깨달음을 얻으면서 스스로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내가 깨트려야 하는 알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의심을 해보게 됐어요.

 

관객들은 <데미안>을 통해 어떤 깨달음을 얻어가길 바라나요?
작품 속에서 마음을 뺏는 한 문장을 발견하셨으면 좋겠어요. 관객분들이 <데미안>이라는 작품을 전부 이해하고 극장을 나서는 것도 좋지만, 비록 그렇지 않다 해도 <데미안>이 전해주는 어떤 한 문장이 관객분들의 마음에 남기를, 그래서 그 문장이 관객분들이 새로운 문장을 써 내려가는 시작점이 되어주기를 바라요. 제가 <데미안>에 출연하게 된 것도 하나의 문장이 제 마음속에 들어왔기 때문이었거든요. 

 

현진 씨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한 문장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네요. 
초연 때는 ‘폐허 속에 빛나는 별’이라는 문장이 정말 많이 와닿았어요. 그때 제 마음이 폐허처럼 느껴졌던 것 같아요. 모든 걸 다 쏟아내서 내면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그러면서도 그 속에서 빛나는 별을 찾고 싶다는 희망이 있었어요. 이번에는 ‘마침내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라는 싱클레어의 마지막 대사가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한 사람이 성장해 가는 여정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지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벅참을 느꼈거든요. 그래서 그 문장을 무대에서 몸소 경험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

 

<데미안>을 다시 만나기까지 3년이라는 제법 긴 시간이 걸렸어요. 폐허처럼 느껴졌던 마음에 조금은 안정이 찾아왔을까요?
<데미안>을 다시 하기로 마음먹은 건, 제가 여전히 불안정하기 때문이에요. 만약 저 스스로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면 <데미안>이라는 작품이 예전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인간은 끊임없이 불안한 존재잖아요. 저는 이제 그 불안감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아요. 예전에는 불안감을 떨쳐내고 그저 안정을 찾고 싶었다면 이제는 불안조차 껴안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극 중에서 데미안이 “떼어낼 수 없으면 사랑하라”라는 말을 하는데 저에게는 불안감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리더라고요. 저는 여전히 불안하지만, 이제 제가 그 불안감을 떼어낼 것인가, 아니면 떼어낼 수 없으니 사랑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느껴요. 

 

극 중 싱클레어는 에바부인에게 “어느 길로 걸어가야 할지 찾고 있다”라고 말하잖아요. 현진 씨는 배우로서 어느 길로 걸어가야 할지 답을 찾았나요?
답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에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제 자신이 재능이 많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무대에 서면서도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생각 때문에 스스로를 많이 괴롭혔어요. 배우로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매일 밤 고민에 빠지고, 컨디션 조절을 위해 삶의 패턴을 바꾸고…. 매 순간 캐릭터로서 살아 있기 위해 제 일상을 반납하면서까지 애썼어요. 그러다 보니 배우 김현진이 아닌 인간 김현진으로 살아 있는 순간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나는 누구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데미안>이라는 작품이 더 와닿더라고요. 그 질문이 바로 <데미안>이 시작되는 지점이니까요. 

 

관객에게 김현진이라는 배우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킨 작품은 2019년에 공연된 <쓰릴 미>예요. 그 후 약 4년간 쉼 없이 무대에 올랐는데, 그동안 스스로 성장했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어요?
<데미안> 대본 연습을 하면서 데미안은 왜 자꾸 싱클레어의 곁을 떠나는 걸까 고민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해야만 싱클레어가 오롯이 혼자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더라고요. 성장은 언제나 외로움을 수반하는 법이니까요. 저도 다른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온전히 저라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성장했다고 느껴요. 타인이 기대하는 나, 누군가가 바라보는 나를 넘어서 내가 기대하고, 내가 바라보는 나를 생각하기 시작했죠. 물론 여전히 다른 사람의 말에 상처받고 흔들릴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나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배우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시선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직업이잖아요. 그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을 찾아낸 건가요?
타인에게 영향을 받아 흔들린다고 느낄 때, 더 이상 흔들리지 않도록 나 자신을 다잡아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그냥 흔들리게 두는 게 정답일 때도 있더라고요. 예전엔 시소에 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안정감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시소가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오는 불안함을 견디면 결국에는 수평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죠. 그러니까 더 이상 시소가 올라가고 내려갈 때 두렵지 않아요. 흔들림 속에서도 버티고 서 있어야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 잊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데미안』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죠.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왔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저는 겁이 되게 많은 편이라 운전면허를 따고 10년 넘게 운전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 더 늦기 전에 운전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지리에 익숙한 대학로를 갈 때만 차를 가지고 다니다가, 점점 용기가 생겨서 혼자 드라이브도 떠나보고, 여행도 다녀왔어요. 그러면서 내 안의 두려움이 깨졌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알을 깨고 나온다’는 표현이 거창한 성장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벼운 도전일지라도 나를 둘러싼 벽을 한 겹씩 깨고 나가는 과정이 반복되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데미안>을 통해서 다양한 얼굴을 지닌 배우라는 걸 또 한번 입증하고 있어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관객에게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어요? 
관객분들이 보내주시는 편지를 읽어보면, 저라는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위로로, 누군가에게는 용기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도전으로 기억되고 있더라고요. 제가 관객분들의 기억 한편에 새겨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말 감사해요. 다만 지금보다 더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는 웃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관객분들이 저와 함께한 순간을 떠올리면서 웃음 지을 수 있길 바라거든요. 요즘 들어 문득 든 생각인데, 예전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이 속상했어요.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를 떠나가는 경우가 생기면서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제는 만남의 기간이 길든 짧든 우리가 각자의 인생에서 한순간이라도 함께 보낸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별똥별이 우리의 눈앞을 지나가는 건 찰나이지만 그 별똥별을 본 기억은 평생 남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고 관객분들도 저라는 배우를, 제가 보여드린 공연을 그렇게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인생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최고로 반짝이는 순간이었다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1호 2023년 2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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