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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Culture In Musical] 스승과 제자의 향연 [NO.106]

글 |김영주 2012-07-10 4,214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고들 하지만 사실 자격을 가진 책임감 있는 누군가가 나를 붙잡고 뭔가를 가르쳐주는 시기는 정해져 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 학생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교육 시스템의 울타리 안에서 배우는 것 외에도 평생 교육원도 있고 노인학교도 있고 문화센터도 있다는 것은 잘 알지만 한 인간의 틀이 잡히기 전, 가능성이 우주 끝까지 펼쳐져 있는 시기의 배움과는 같을 수가 없다.

 

 

 

 

 

배움의 기쁨, 가르치는 행복
민족국가의 개념이 처음 생긴 근대의 유럽 국가들은 충성심을 가진 국민을 양성하는 것이 부국강병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교육제도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시대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교육은 특권계층에게로 한정되는데, 그리스 민주정의 모태였던 아테네의 경우 가정을 중심으로 한 사교육과 사립학교가 있었고, 청소년기의 신체 훈련이나 군사교육만이 공적으로 이뤄졌다. 아테네와 적대적인 관계였던 스파르타의 경우 국가가 주도하는 공교육이 있었지만 이는 스파르타가 계층 간 구분 없이 교육의 기회를 주는 선진 국가였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시민을 군인으로 키워내는 병영 국가였기 때문이다.


고대 아테네에서 권장된 사제지간의 형태는 현대의 도덕관념이나 상식으로 보면 당혹스러운 면이 있다. 지식으로나 인품으로나 존경받는 훌륭한 성인 남성이 아직 수염이 나지 않은 소년에게 명예로운 시민이자 지혜로운 교양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미덕들을 전수해주는 것이야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중년의 스승과 미성년자인 제자 간의 동성애가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형태로 추앙받았다는 것이 현대인의 눈에는 겸연쩍은 일이다. 


성숙한 어른이 아직 미숙한 존재에게 자신이 가진 지혜를 내주고 그 보답으로 어리고 아름다운 제자의 사랑을 받았던 이 고대 그리스식 수업은 헤드윅과 토미 노시스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헤드윅>이라는 작품 자체가 플라톤의 <향연>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항연>에서는 사제지간이 곧 연인이기도 했던 그리스의 풍속도를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관계를 통해 보여준다. 에로스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는 향연이 한참 무르익었을 때 술에 취한 불청객 알키비아데스가 난입하여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에 대한 기가 막힌 연설을 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를 가리켜 ‘문학사상 가장 아름다운 사랑 고백’이라고 말했는데 극도의 지혜와 미덕에 대한 찬미가 그 자체로 관능이 되는 순간을 스승이자 연인인 소크라테스에 대한 알키비아데스의 고백 속에서 엿볼 수 있다. 자신의 스승을 숭배하면서도 질투하고, 갈구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알키비아데스의 모습에서 토미 노시스의 한 면이 연상되기도 한다.


당시 이미 30대에 들어섰던 알키비아데스는 더 이상 소크라테스로부터 일방적인 가르침을 받는 소년이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영구히 수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르치는 이의 생각이 그대로 진리가 아니며, 스승 또한 진리를 탐구하는 한 사람의 학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서로가 인정하고 수평적인 동반자의 관계로 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스승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이었으니 더 높은 단계의 에로스를 향한 동행은 지속될 수가 없었다.

 

 

 

 

 

소통 없는 훈육의 한계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제도권이 만족할 만한 순종적인 국민을 양성하기 위해 존재했던 근대 유럽식 공교육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주제와 문제의식, 세대 간의 갈등이 특정 시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원작이 쓰인 시기이기도 했던 19세기 말 학교의 풍경은 표현주의적인 기법을 선택한 이 작품에서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철학과 예술을 이해하면서 도시를 수호하는 시민으로서의 힘과 용기까지 가진 훌륭한 개인을 키우는 것이 목적이었던 고대 그리스와 국가주의가 기승을 부렸던 19세기 말 독일에서의 교육이 같은 의미일 리가 없다.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는 어떤 교감도 존재하지 않는다. 호메로스나 베르길리우스의 고전을 배우지만 그 작품의 내재적인 의미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라틴어를 열심히 외울 만큼 성실한가, 맡겨진 과제를 순종적으로 충실히 해내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스프링 어웨이크닝>에서 묘사되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교실의 풍경은 21세기에 만들어진 청소년 극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독일의 교육제도를 받아들인 일본과, 그 일본의 지배를 받은 흔적이 사회 시스템 곳곳에 남아 있는 한국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이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교육제도 아래서 교사는 학생에게 지식과 지혜를 전수하는 스승이 아니라, 자신만의 목표도 없이 내던져진 또래 집단과의 경쟁에서 낙오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상기시키며 채찍질을 하는 조련사에 가깝다.


10대를 주인공으로 한 대부분의 뮤지컬에서 교사와 학생들의 관계는 <스프링 어웨이크닝>만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로 희화화되거나 큰 존재감 없이 구석으로 밀려나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위키드>에서는 엘파바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딜라몬드 교수처럼 다른 곳에서 침묵하는 세상의 어두운 면을 깨우쳐주는 스승 또한  존재한다.

 

 

 

 

이루어지지 않아야 하는 사랑
앞서 고대 그리스에서 권장되었던 사제지간의 사랑을 이야기했지만 근대 이후로는 스승과 제자가 서로 간에 경애 이상의 감정을 갖는 것이 사회적인 터부가 되었다. 성인과 미성년자의 연애가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에는 한쪽의 심신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수직적인 권력관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이유가 큰데 이 문제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에서는 한층 더 심각해질 수 있다.


물론 <내 마음의 풍금>에서 홍연이가 선생님을 사랑하듯 어린 학생이 선생님을 향해 풋사랑을 키워 나가는 것은 누구나 경험할 법한 한때의 감정으로 용인되지만 <번지점프를 하다>처럼 교사가 제자를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형태가 되었을 때는 그에 대한 사회적인 반감이 훨씬 더 커진다.


하지만 이런 통념을 잘 알고 또 납득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은 뜻하지 않은 사고처럼 엉뚱한 장난을 치기도 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는 하지만, 교사로 첫 부임을 한 스물세 살 강동수가 얼마나 어른일 수 있었을까. 스스로를 당연히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책임감도 가지고 있던 인우에게 일어난 일은 또 어떻게 보아야 할까. 다시 그리스인들의 지혜를 빌려와 보자. 스승 또한 삶을 배워 나가는 한 사람의 학생일 뿐이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6호 2012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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