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sical

더뮤지컬

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피처 | [SPECIAL] 지난 더뮤지컬을 읽다 [No.70]

글 |박병성 2009-08-05 6,748

 

9th Anniversary

지난 더뮤지컬을 읽다

 

<더뮤지컬> 9주년이 공교롭게도 70호가 된다. 초기에 비정기적으로 발행되다 격월간으로 다시 월간으로 전환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지난 <더뮤지컬>을 찬찬히 다시 읽었다. 그중에서 의미 있는 기사들을 다시 소개하려고 한다. 창간 준비호부터 69호까지를 대상으로 하려고 했으나 하나둘 소개하다 보니 어느새 주어진 페이지가 꽉 차버렸다. 그래서 일단 36호까지 중에 되돌아봤으면 하는 기사들을 정리했다. <더뮤지컬>의 지명도가 높지 않았던 시기의 기사들이고, 또 시간이 꽤 흐른 뒤라 내게도 새로운 재미를 주었다.

 

 

뮤지컬 배우 100명에게 물어보다  (2000년 8월 창간호)

뮤지컬 배우 93명을 대상으로 창간호 기념 설문을 했다. 이 기사에서는 당시 배우들의 생각들과 뮤지컬 환경을 느낄 수 있다. 2000년도에 배우들이 가장 좋아한 작품은 <레 미제라블>(28%), <미스 사이공>(14%), <렌트>(9%)>, <오페라의 유령>(7%) 순이었다. 1~2년 후에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같은 조사에서는 <캣츠>가 월등하게 높게 나왔는데 배우들에게 한 설문에서는 눈에 띄는 반응이 없었다. <레 미제라블>은 90년대에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 공연하지 않았던 작품 중에는 <미스 사이공>를 공연했으면 좋겠다는 응답자가 과반수에 가까운 46%에 달했다. 좋아하는 해외 여자 배우로 레아 살롱가가 1위를 차지한 것을 보면 당시 뮤지컬 배우들에게 <미스 사이공>의 인기는 대단했던 것 같다.
가장 존경하는 남녀 배우로는 남경읍, 전수경이 뽑혔는데, 둘의 위치는 지금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있다. 당시 가장 존경하는 연출가로는 윤호진(21%)을 제치고 김효경(40%)이 뽑혔다. 99년에 <바리>, <천파만파 장보고>, <베이비 베이비> 등 왕성한 활동을 한 것이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그는 시키의 <라이온 킹>이 한국 시장에 들어오는 데 옹호론을 폈고, 작품에서 한국 연출을 맡기도 했다. 김효경은 제자들이 무대에 서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국내 뮤지컬 환경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시키에서 연수를 받고 올 것을 권하기도 했다. 시키의 간판 배우였던 김지현은 1997년 김효경의 권유로 일찍이 시키에 입단했다. 당시 열악한 국내 뮤지컬 환경은 설문에서도 드러난다. 연간 수입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 중 87퍼센트가 800만원 미만이라고 답했다. 그중에는 300만원 미만이 10퍼센트나 있었다. 9년 전이라고 해도 당시 뮤지컬 배우들의 처우가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알 수 있는 설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뮤지컬 배우들의 개런티는 A급의 경우 1회 당 100만원을 넘어서고 있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브로드웨이의 원류를 찾아서 

(2000년 7월 창간 준비호부터 2000년 12월 4호까지 연재)

창간 준비호 때부터 뉴욕 통신원으로 있었던 조용신의 글은 척박한 뮤지컬계에 브로드웨이의 선진 시스템을 전파하는 지식의 공급책이었다. ‘오! 브로드웨이’ 코너를 통해 노동조합이나, 비영리극단, 토니상 기사, 새로운 오케스트라 형태인 버추얼 오케스트라 등 브로드웨이의 시스템과 흐름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 첫 코너가 바로 ‘브로드웨이의 원류를 찾아서’로 시작하는 기사였다. 그리고 뮤지컬의 발생 단계부터 역사를 5회에 걸쳐 조명했다.
이 기사를 다시 읽다 보면 예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사실들이 좀더 눈에 들어온다. 뮤지컬의 황금기 이전 시기에 대해 다룬 기사가 아무래도 좀더 흥미로운데, 극본과 노래가 유기적으로 결합한 첫 작품인 <쇼 보트>가 나오기 이전까지만 해도 음악과 텍스트가 따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제작자들이 이전의 극 형식인 레뷔나 벌레스크 형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다시 읽으면서 새롭게(이전에도 있었지만 주위 깊게 보지 않았던) 발견한 대목이다. “돈을 대는 제작자들은 여전히 레뷔나 벌레스크처럼 기존 연기자의 레퍼토리를 보고 출연진을 선발하는 방식을 취했다. 가령 계약서에 ‘출연 시간은 10시부터 10시 10분까지로 한다’와 같은 황당한 조항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극작가와 작곡가가 통합된 뮤지컬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 뮤지컬의 발자취를 찾아서 (2001년 2월 5호부터 2001년 10월 9호까지 연재)
필자가 처음 <더뮤지컬>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쓴 글이다. ‘한국 뮤지컬’을 다각도로 조명해서 살펴보는 주제로 6호에 걸쳐 연재했던 기사였다. 첫 연재 기사였던 ‘뮤지컬의 발자취를 찾아서’(5호)는 예그린 시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한국 뮤지컬 역사를 정리한 글이다. 뮤지컬에 대한 지식이 거의 바닥이었던 필자가 담당하기에는 무리한 기획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지난 10년간 쓰여진 뮤지컬 관련 기사를 검색하고, 뮤지컬에 관한 논문을 찾아 읽었다. 무엇보다도 예그린악단에서 극작 및 기획을 맡았던 박만규 선생님(전 시립가무단 단장), 예그린악단 배우였던 강대진 선생님 등 한국 뮤지컬의 산 역사를 살아온 분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컸다. 강대진 선생님은 후에 원고 감수를 봐주시기도 했다.
고백하자면 그 기사에는 오류가 있다. 박경선, 김기용 등의 논문을 참고했고, 뮤지컬 관련 책자를 근거로 창작뮤지컬의 효시를 1966년 <살짜기 옵서예>라고 보았다. 그러나 최근에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짜기 옵서예>를 창작뮤지컬의 효시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많은 글에서 그렇게 써왔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해랑의 조연출이었던 전세권이 ‘제3세계’라는 극단을 만들고 1965년 8월 뮤지컬 <새우잡이>를 올린 기록이 있다. 1962년 유치진이 <포기와 베스>를 올렸는데 그때 이해랑이 공동 연출로 참여했으며 전세권이 조연출을 맡았다. 전세권은 이때의 경험과 1965년 메리 마틴이 내한하여 공연한 <헬로 돌리> 공연을 보고 뮤지컬에 매력을 느껴 뮤지컬 <새우잡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박만규 선생의 예그린악단을 추억하며 썼던 스포츠조선의 기사를 보면 이 공연이 그렇게 잘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개막 시간이 임박해 무대에서 막을 젖히고 객석을 보니 관객은 고작 5명, 극본과 연출은 물론 장치까지 손수 그렸던 전세권은 너무나도 기가 막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흥행은 비록 형편없었지만 <새우잡이>를 최초의 창작뮤지컬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그동안 나는 잘못된 사실을 설파하고 다녔던 셈인데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사실을 알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떠오르는 무대 위 카리스마 오만석

(2003년 6월 18호)

<더뮤지컬> 과월호를 훑어보는 재미 중 하나는 뮤지컬 스타들의 신인 시절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003년 3주년 기념호(19호)를 보니 박건형, 엄기준 등의 축하 멘트가 있었다. 이제는 스타가 되어 스케줄 잡기도 힘든 그들이지만 또박또박 눌러 쓴 필체와 글을 보면 당시 순수했던 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연예인이 되기 이전의 그들의 모습을 보면 묘한 느낌이 든다. 오만석 역시 빠르게 성장해서 뮤지컬 스타가 된 인물이다. 이때 그의 사진은 풋풋함 그 자체다.
이때 인터뷰에서도 오만석은 솔직함과 진솔함에 있어서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축구에 대한 애정까지도. 동료들이 감탄하는 ‘신이 주신 체력’의 발원지는 축구라며 이 인터뷰에서도 축구 애찬을 한참 늘어놓는다. 그의 꿈은 축구장을 갖는 것이란다. 골이 들어갈 때의 희열, 팀워크가 맞을 때의 감동은 공연과 비슷하지만 “공연은 정해진 틀에서 연습을 통해 하나를 만들어가면서 완성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라면, 축구는 예상할 수 없는 많은 경우의 수가 있어서 순간 순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라며 둘의 차이를 말한다. 잘 들어 보면 축구가 더 재밌다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이미지가 강한 그인데 대학교 때는 연기에 있어서 열등생이었다는 대목에 시선이 간다. “대학교 2학년 때 ‘연기 실습’이라는 수업이 있었는데 정말 연기를 못했어요. 제가 생각해도 그렇고, 교수님들도 그러셨고, 교수님들이 D를 줄까, F를 줄까 고민하실 정도였으니까요.” 오만석은 제대 후 첫 작품을 치열하게 준비하며 열등생의 이미지를 벗어버렸다. ‘노력하는 배우’라는 이미지가 그때부터 형성되었던 것 같다.

 

 

 

2004 Issue Maker  (2004년 2,3월호 21호)
무가지로 발행되던 <더뮤지컬>이 21호부터 유가지로 전환됐다. 그리고 이때부터 인물 표지를 하기 시작했다. 인물 표지의 첫 주인공은 이건명, 서영주, 성기윤, 엄기준, 조정은, 김영주, 김소현, 배해선, 김선영이었다. 처음 기획 단계에서는 당시 주목해야 할 뮤지컬 배우 10명을 뽑아보자는 취지였는데, 허리에 통증을 느낀 류정한이 촬영 당일 오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 9명만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지금 보면 역시 선정 하나는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때부터 <더뮤지컬>의 표지에 배우들이 떼로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중에서 김도현, 김무열, 이율, 조정석이 표지에 등장했던 2007년 6월호가 서점 판매율 68퍼센트로 로, 그동안   <더뮤지컬>의 가장 높은 판매율을 보였던 조승우 표지를 앞서고 1위를 차지했다. 가장 인상 깊은 떼 촬영은 역시 굿바이 <지하철 1호선> 기념촬영이었다. 그동안 <지하철 1호선>에 참여했던 배우 61명이 촬영에 임해주었다. <지하철 1호선>이 끝난다는 아쉬움과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동참해준 것이다. 계속 되는 촬영에도 불구하고 ‘하나 둘 셋’ 하면 어김없이 한 배우의 서너 살박이 딸아이가 해맑게 ‘치즈’ 하고 분위기를 띄어주어서 매번 배우들이 활짝 웃을 수 있었다(이 사진 둘째 줄 오른편에서 브이 자를 그리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앞으로 이보다 더 많은 인원이 표지에 등장하는 일이 있을까? 세상일은 모를 일이다. 남경읍 선생님 30주년을 맞아 한 기념촬영 역시 기억에 남는다. 남경읍 선생님과 제자들을 표지 인물로 잡고 기념 콘서트 제작발표회가 있는 장소에서 표지 사진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제작발표회가 낮 시간이라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는 않았다. 양꽃님, 김다현, 최재웅, 이율 등이 표지 촬영에 동참해 주기로 했다. 조승우도 섭외를 했는데 매니저가 스케줄이 안 된다며 거절을 했다. 그런데 행사장에 조승우가 나타났다. 그것도 우리 표지 의상 컨셉인 블랙 앤 화이트 정장을 입고. 그는 엉겹결에 같이 사진을 찍었는데 그것이 표지 촬영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올 1월호(64호) 표지도 기억에 남는다. 1월호 표지 주인공은 <쓰릴 미>의 나와 그, <오페라의 유령>의 팬텀, <드림걸즈>의 다나 존스,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멜키오와 벤들라, <노트르담 드 파리>의 에스메랄다와 콰지모도, <주유소 습격사건>의 뻬인트 등이다. 올해 공연하는 작품 속 주인공들을 럭셔리한 저택에 모아놓고 촬영을 했다. 이는 우리 책에 뮤지컬 판타지를 그려주시는 박희정 선생님이 일러스트로 그려주신 덕에 가능했던 일이다.

 

 

 

작품 속 숨어 있는 문화 코드를 찾아라

(2004년 6,7월호 23호)
뮤지컬 속 배경이 되는 각 나라의 문화를 소개한 ‘꼭지’였다. 정세원과 이주희 기자가 이 꼭지를 위해 고생 깨나 했다. 세계지도를 놓고 지역 별로 나눈 아이디어도 좋고 여러 면에서 좋은 기획이었다. 지금 같으면 좀더 예쁜 지도에다가 지면도 더 할애해서 보기 좋게 했을 텐데l 디자인적인 아쉬움이 있지만 다시 읽어봐도 알찬 내용이다.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일라이자가 사용하는 사투리 코크니는 Cock`s egg(수탉의 알)에서 나온 말로 런던 동부 과일 행상들이 속어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스페인’을 ‘스파인’으로, ‘레인’을 ‘라인’으로 발음한다. 런던 사투리는 듣기를 포기하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닌가 보다.
<맘마미아>에서 도나는 소피가 하얀 웨딩드레스를 고집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정교에서는 주로 신부의 어머니가 입었던 웨딩드레스를 물려 입고, 신랑이 세례를 받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또 스카이는 소피에게 “난 육지로 가서 증인 둘만 놓고 결혼하고 싶었어”라고 하는데 그리스의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보증인이다. 보통 신랑의 대부나 존경받는 사람이 보증인이 되어 준다. 
<오페라의 유령>의 배경이 되는 파리 오페라 하우스는 1875년 샤를 가르니에가 지은 건물이다. 1896년 샹들리에의 균형추가 떨어져 관객이 죽고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으며 오페라 극장 지하는 파리 코뮌의 기지로 사용되면서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파리 코뮌이 만들어놓은 지하 호수, 미로 같은 거울과 여러 가지 시설물들은 유령이 나타나기에 적합했다.
<카바레>에서 엠씨의 죄수복에는 노란색 별과 분홍색 역삼각형 표식이 달려 있다. 나치가 유럽 거주 유태인에게 치욕의 표시, 죽음의 표시로 노란색 별을 달도록 강요하면서 이 표식은 이후 ‘다윗의 별’이라 불리게 되었다. 분홍색 역삼각형의 표식은 레인보우 깃발보다 오래된 동성애 사회의 상징으로 나치 시대 수용소에서 동성애자를 식별하기 위한 마크로 사용되었다.
이 기사는 다시 한번 그대로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알찬 내용이 많다. 여기서는 몇 가지 맛뵈기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알 듯 말 듯 헷갈리는 저작권 (2005년 10,11월호 31호)
당시만 해도 저작권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낮았다. 그러나 예전 같으면 인지상정이라고 나눠 쓰는 미덕으로 넘어갔을 일들이 뮤지컬 시장이 커지고 발달하면서 그에 따른 권리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그래서 의도한 기획이다.
국내에서 벌어진 판례를 들어 제작권에 대한 개념을 설명한 글이었는데 법적인 용어에 익숙하지 않아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에 공연계에서 저작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들이 이루어지기도 했고, 전문가를 초빙해 컨퍼런스가 열리는 등 저작권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졌다. 이 글은 저작권에 대한 기초적인 인식을 가지게 하는 데 유용한 기사였다.
기사에서 보여준 판례 중 법적으로 납득되지 않은 사례가 있다. 글을 쓰면서도 잘못된 판결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1994년에 벌어진 사건이라 재판부도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약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작곡가 S는 공연기획자 J에게 작곡 의뢰를 받고 6곡을 작곡하였다. 초연 후 같은 달 8회 추가 공연하였고, 이후에 모두 8차례에 걸쳐 310회 공연을 하였다. 공연기획자 J는 처음 작곡료를 지급한 후 6차 공연 때 소정의 금액을 지급하였을 뿐 추가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작곡가가 저작권 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J가 추가로 저작권료를 지급하기로 한 사실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저작권은 기획자가 아니라 창작자인 작가와 작곡가가 가진다. 작곡가와 작가가 월급을 지급하는 회사 소속 사람이 아닌 한 기획자는 약속된 공연에 대해서 이용권만을 가진다. 그러므로 약속된 공연 이외에 추가로 공연을 할 때는 계약서에 특별한 조항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면 기획자에게 공연할 권리가 없다. 잘못된 판결을 보면서 그동안 우리에게 저작권이란 개념이 얼마나 희미했나를 알 수 있었다. 이제는 그때에 비하면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졌다.

 

 

 

 

 

최적의 캐스팅을 찾아라 (2006년 4,5월호 34호)
이 호의 특집은 ‘캐릭터’였다. 캐릭터를 유형별로 묶어서 분석하기도 하고, 또 같은 배역에 캐스팅된 배우들의 특성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니아들의 설문을 통해 가상 캐스팅도 알아보았다. 2006년 기사이기 때문에 당시에는 작품이 한국에서 공연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공연된 것들이 여럿 있다. 그 당시 관객들은 각각의 캐릭터에 누가 캐스팅되기를 바랐을까?
<레 미제라블>의 자베르 - 재작년 한국 공연 소식으로 배우들과 팬들을 들뜨게 했었는데 결국 무산되었다. 내 후년에는 한국 캐스팅 공연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누가 캐스팅 될까? 당시 자베르 역에 대해 물었는데 김성기가 가장 많은 지지를 얻었고 다음으로 김법래가 거론되었다. 아무래도 중후하고 울림 있는 노래가 중요하기 때문에 목소리가 좋은 배우들이 선정됐던 것 같다. 
<헤어스프레이>의 에드나 - 거대한 몸을 지닌 트레이시의 어머니 에드나 역은 뉴욕 공연에서 하비 피어서타인이 맡아 화제가 되었다. 설문에서는 중성적이라는 느낌 때문인지 <프로듀서스>에서 게이 연출가를 맡은 이희정이 뽑혔고 남경읍이 그 다음을 이었다. <헤어스프레이>는 2007년 연말에 공연되었는데 에드나 역에는 정준하와 김명국이 캐스팅됐다.
<캣츠>의 럼텀터거 - 바람둥이 고양이 럼텀터거 역에 어울리는 배우를 묻는 설문에 자유로운 로커 이미지가 강한 송용진이 먼저 거론됐고, <42번가>에 출연했던 황정민이 그 다음을 이었다. 가수 비나 박건형 등 주로 춤을 잘 추는 배우들의 이름도 보인다. 작년 한국 캐스트 공연에서는 떠오르는 신예인 김진우와 빅뱅의 대성이 꼬리를 흔들며 섹시하게 허리를 돌리면 암고양이들이 거부하지 못하는 럼텀터거에 캐스팅됐다.
<에비타>의 에비타 - 에비타가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부르는 ‘Don’t Cry For Me, Argentina’는 뮤지컬을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곡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에바 역으로는 배해선과 그 다음으로 이혜경, 김선경 등이 거론됐다. 실제 2006년 공연에 배해선이 김선영과 함께 에바 역에 캐스팅됐다. 설문을 한 같은 해에 올라간 유일한 작품이어서 그런지 에비타 역만 설문과 같은 배우가 캐스팅됐다. 체 역에 대한 설문에는 이석준과 오만석이 거론됐고 실제로는 남경주가 맡았다.
당시 설문에서는 이외에도 콰지모도, 모린, 대장금 등의 캐릭터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시키 한국 진출을 어떻게 볼 것인가? (2006년 8,9월호, 36호)
2006년 뮤지컬계 최고의 화두는 일본 최대 극단 시키의 한국 진출이었다. 시키가 샤롯데 시어터의 개관작으로 <라이온 킹>을 올리려고 하자 제작자들은 이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2월 뮤지컬 협회를 출범하고 시키의 한국 진출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집단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대해 7월 13일 본지 주최로 관계자를 모아 공개 토론회를 개최했다. 시키 한국 진출에 찬성하는 김효경 교수와 반대하는 남기웅 뮤지컬협회 사무국장을 축으로 원종원 뮤지컬 평론가, 송한샘 프로듀서, 이원종 연출가와 함께 3시간여 동안 열띤 토론을 벌였다.
논의한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협회 측은 국내에 제대로 된 뮤지컬 전용극장이 없는 상태에서 샤롯데 시어터의 개관작으로 일본 극단의 <라이온 킹>이 들어오는 것을 문제 삼았다. 그것도 일본의 창작품이 아닌 브로드웨이의 작품을 일본 제작사가 공연하는 브로드웨이 작품이라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은 우리도 일본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인 <지킬 앤 하이드>나 <갬블러>를 공연한 적이 있고, 롯데라는 사기업이 자신의 극장을 어떤 제작사에게 줄 것인지는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두 측의 의견이 모두 설득력이 있었다. 양측의 논리가 팽팽히 맞서다 보니 토론회의 논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감정이 격해지고 서로를 비방하는 말들도 오고 갔다. 아쉽게도 나는 그것을 통제하지 못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진땀이 난다.
뮤지컬 협회가 강하게 반대했지만 그해 10월 <라이온 킹> 공연이 올라가고 1년간 공연을 했다. 돌이켜보면 협회 측에서는 당연히 반대를 해야 했지만 들어오겠다는 시키를 막을 방도는 없었다. 거대 극단인 시키가 한국 시장에 들어오면서 상대적으로 허약한 국내 뮤지컬 시장의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문광부로부터 다양한 지원을 약속받은 것이 협회 측의 큰 성과였다. 다음해인 2007년 보컬 트레이너를 초빙하여 배우들을 트레이닝 시킬 수 있었던 것도 국가의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온 킹> 공연은 1년간 공연하여 총 177억의 제작비가 들었으며, 140억 7천만원의 수익을 올려 37억 정도의 적자를 봤다. 그러나 시키 측에서는 한국 시장을 경험한 수업료였다며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한 진통을 겪고 나서 2007년 한국뮤지컬 대상 시상식 오프닝 작품이 <라이온 킹>이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말이 정치계에만 있는 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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