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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명성황후 [No.74]

글 |김영주 2010-01-05 6,221

상체에는 짧은 하얀 속옷을 입었을 뿐이며 허리 아래는 하얀 속바지를 입고 있었으나 무릎 아래로는 맨살이다. 위를 향한 채 이미 숨이 끊어졌고 주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잘 보니 자그마하고 마른 편으로 피부색이 하얀, 아무리 보아도 25,6세로 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였으며 죽었다기보다는 인형이 쓰러진 듯한 모습으로 영원히 잠에 빠져 있었다. 이 가냘픈 손으로 조선 팔도를 움직이며 영웅호걸들을 조종했던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의 죽은 모습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마도 이마 위에 엇갈려 있는 두 줄기 칼날 자국이 치명상인 듯했다. 방안에는 유해를 지키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참으로 처참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이윽고 우리는 시체를 홑이불에 싸서 수풀 속으로 끌고 가 석유를 끼얹고 장작더미에 싸 얹은 다음 불을 질렀다. 그때가  오전 8시 경이다.

 

을미사변 당시 공격조에 속해 있었던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가 회고록 「민후조락사건」에 쓴 사건 현장에 대한 묘사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적에 대해 경의를 표함으로써 자신들의 만행을 대의를 위한 것으로 포장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같은 책에 명성황후에 대해 ‘조선의 정치 활동가 중에 그 지략과 수완이 민후의 위에 가는 자가 없었을 만큼 왕비는 실로 당대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녀를 제거하는 것 외에 조선과 러시아가 결탁할 여지를 없앨 수 있는 방책이 없었다’고 썼다. 고바야카와 히데오는 사건 당시 한성신보사 편집장이었고 훗날 쿠슈 지역의 신문사 사장이 되는 인물이다. 그는 끔찍한 참변을 일으킨 자들이 떠돌이 ‘낭인’이라는 일본 측의 주장과 달리 어엿한 지식인이었다.
명성황후 민씨, 아명은 민자영, 혹은 민아영이었다고 전해지는 이 걸출한 여성은 인현왕후의 생부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6대손으로 태어났다. 명문가의 후손이었으나 아버지 민치록은 민자영이 9세 되던 해 세상을 떠났고 형제들이 모두 요절한 터라 편모슬하 고명딸로 자랐다. 대가 끊긴 가문을 잇기 위해 10촌 형제인 민승호가 양자로 입적을 하게 되는데, 이 의형제의 생가쪽 매형이 바로 흥선대원군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아비 없는 소녀를 왕후로 간택한 것은 그럴싸한 피붙이가 없어서 외척의 발호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춘추좌씨전」을 탐독하면서 역사와 정치에  관심을 보였던 영민한 소녀는 편들어줄 사람 하나 없는 구중궁궐에서 천천히 자신의 입지를 굳혀나가기 시작한다. 애초에 고종은 외가쪽 아주머니뻘이 되는 정비에게 관심이 없었으나 왕비는 스물두 살이 되어서까지 아버지의 그늘 아래 짓눌려 친정을 펼치지 못하는 젊은 왕의 고뇌를 꿰뚫어보았다. 젊은 부부는 난제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인 동반자로서 관계를 공고히 해나갔다. 왕비는 불효가 가장 큰 죄악인 유교 사회에서 아버지에게 직접 대적할 수 없는 남편, 국왕의 어려움을 간파하고 자신이 대리전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왕비의 친정어머니와 오라비와 그의 어린 아들까지 삼대가 폭사하고, 그에 대응하듯 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에서 폭파 사고가 일어나는 등 살벌한 정치 테러가 이어지기도 했다.


조선인으로 명성황후 암살사건에 동조한 인물로 지목 받는 유길준은 자신의 죄를 부정하면서도 미국인 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명성황후를 세상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썼다. 그는 왕비가 프랑스의 마리 앙투와네트와 영국의 메리 여왕보다 더 악하다고 평하면서 그 이유로 조선의 민중들이 ‘국왕은 한낱 인형이고, 왕비가 그 인형을 가지고 노는 사람’이라고 수군댄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유길준은 흥선대원군과 대적하는 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명성황후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를 진압하기 위해 임오군란 때처럼 청나라의 힘을 빌렸고, 후에는 일본과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온 조정은 물론이고 전 세계를 둘러보아도 민씨 일족을 제외하고는 그녀의 적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회적인 문제를 배제하더라도 황후의 삶은 고된 것이었다. 어린 시절 형제자매와 아버지를 모두 잃은 그녀는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낳았지만 그중 왕세자 척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돌을 넘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왕비가 금강산 봉우리마다 재물을 바치며 왕세자의 무병장수를 비는 굿을 하여 왕실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비판은 정당한 것이겠지만 그 배경을 고려한다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민씨 일족을 과도하게 중용했지만 이는 순조와 철종 시대에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왕권을 침해하는 세도정치로 전권을 휘둘렀던 것과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다. 여흥 민씨 일족 역시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고종의 불안정한 왕권에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한 세기만 일찍 태어났다면 그녀의 삶의 문제들도 화려한 구중궁궐 안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암투 정도로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굳게 걸어 잠갔던 세계를 향한 문을 더 이상 붙들고 있을 수 없게 된 격동의 시대에 정치권력의 중심에 있던 황후에게는 수없이 많은 공격이 쏟아졌다. 동시대인들 중 그녀를 높이 평가했던 것은 서구의 선교사와 학자, 외교관들이다. 명성황후에 대한 그들의 묘사는 대체로 일치하는데 ‘창백할 만큼 흰 피부, 작고 마른 체형, 우아함과 지성미를 갖춘 귀부인, 놀라운 수완의 외교술’로 요약할 수 있다.
조선의 스물다섯 번째 왕비이자 대한제국의 첫 황후였던 이의 복잡한 삶을 반증하듯 당대와 후세가 그녀를 호명하는 이름을 여러 가지이다.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명성태황후’라는 길고 긴 추촌명에서 온 명성황후부터 민왕후, 민후, 민비, 민자영까지. 사람들은 파란만장하게 살다가 비극적으로 죽은 이에 대한 자의적인 평가에 따라 그 이름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그녀를 부른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의 국정교과서에서도 그녀를 ‘민비’라고 일컬었다. 여흥 민문 출신의 왕비, 즉 ‘민비’가 조선왕조에 셋이나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후세의 호칭으로는 부적합하다. 하지만 공화국이 수립된 후에도 여전히 보수적인 한국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민비’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느니 ‘여자가 너무 똑똑해서 탈’이었다는 말과 함께 몰락한 왕조의 어두운 기억으로 묻혀져 있었다. ‘명성황후’에 대한 재평가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식민사관을 몰아내자는 움직임 안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의식이 달라졌던 것도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한몫을 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뮤지컬 <명성황후>가 ‘독립운동을 하듯’ 비장한 사명감으로 만들어졌다. 척박한 환경에서 맨손으로 고군분투하며 서거 100주기를 맞은 비운의 국모를 기리는 대극장 창작뮤지컬을 만든다는 것은 대중들에게 문화적인 독립운동처럼 인식되었고 이어 공영방송 KBS에서 대하 사극 <명성황후>를 방송했다. 인간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은 영웅으로 완성되는 역사적인 인물을 그려내는 데 일가견이 있는 이하연 작가의 필력과 타이틀롤을 맡은 이미연의 열연에 힘입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마지막 황후’의 위상은 공고해지는 듯했다. 조수미가 노래한 ‘나 가거든’의 뮤직비디오는 뮤지컬 <명성황후>에서도 단 한 곡의 아리아로 여성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황후의 기사’ 홍계훈 장군을 이루지 못할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부각시켰고, 야설록의 소설과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역시 가상의 관계를 표면에 내세웠다. 홍계훈은 미천한 출신으로 임오군란 당시 왕비를 구해 장군이 되었고, 결국은 왕비의 최후에 함께 죽어간 무인이었으니 후세의 상상에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만은 아니다. 이렇게 비운의 황후는 비극적인 가상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었다.
명성황후가 민족혼의 상징으로 ‘미화’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최근에는 ‘명성황후의 진실’이라는 식의 글들이 인터넷상에서 자주 보인다. 정당한 비판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악의적이고 감정적인 비난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움직임은 평가절하와 악의적인 왜곡으로부터 명성황후를 구하기 위해 그녀의 실책과 과오, 한계에 대해 묵인했던 것에 뒤따르는 반동일 것이다. 모욕과 미화 사이, 저주와 찬양 사이에서 진짜 그녀를 찾아내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것은 끝내 화공 앞에 앉거나 카메라 앞에 서지 않았던 조선의 마지막 국모가 남긴 사진과 초상화를 찾는 것처럼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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