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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ULTURE INTERVIEW] 오스트리아에서 지휘봉을 들다 - 린츠 주립극장 뮤지컬 지휘자 한주헌 [No.228]

글 |안세영 사진 |표기식 2023-10-16 998

 

 

유럽에서 가장 현대적인 극장으로 손꼽히는 오스트리아의 린츠 주립극장. 오페라, 발레,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올라가는 이곳에서 뮤지컬 상임 지휘자를 맡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한국인 지휘자 한주헌이다. 유럽의 유서 깊은 오페라 극장에서 뮤지컬을 지휘하며 그는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지난 8월 한국을 찾은 한주헌 지휘자를 만나 독일어권 뮤지컬의 현주소에 대해 들었다. 

 

 

 

 

영화 음악 작곡가에서 뮤지컬 지휘자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제천국제영화음악제에서 필름 콘서트 지휘를 맡으셨어요. 유럽에서 활동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제천국제영화음악제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나요?
이십대에 영화 음악 작곡가로 일했는데, 그때 함께 일한 동료들이 제천영화음악제에 많이 참여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난해 처음으로 음악제에서 필름 콘서트를 기획했을 때 지휘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죠. 필름 콘서트는 배경 음악을 제거한 영화를 상영하는 동시에 오케스트라가 라이브로 음악을 연주하는 콘서트예요. 작년에는 <봄날은 간다>와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 올해는 <올드보이>의 필름 콘서트를 맡아 지휘했어요. 올해 음악제에서는 지난 3월 세상을 떠난 영화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를 기리는 헌정 공연의 피아노 연주를 맡기도 했고요.

 

영화 음악 작곡가로 활동하시다가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하신 이유는 뭐예요?
원래는 선화예술고등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드라마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는 걸 듣고 반해버렸죠. 이제는 헐리우드가 아닌 한국에서도 드라마와 영화를 위해 이런 음악을 만드는구나 깨닫고 흥미를 느꼈어요. 그래서 진로를 바꿔 M&F라는 영화 음악 제작 회사에 들어갔어요. 2000년부터 2008년까지 그곳에서 일하며 <싱글즈> <말죽거리 잔혹사> <마파도>를 비롯한 많은 영화 음악 작곡에 참여했어요. 2007년 드라마 <대장금>이 뮤지컬로 옮겨졌을 때 뮤지컬 넘버 일부를 작∙편곡하기도 했고요. 당시 한국 영화의 붐에 힘입어 교향악단이 영화 음악을 연주하는 콘서트도 늘어났는데, 이번에는 그걸 보고 지휘에 매력을 느꼈어요. 그래서 2009년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학을 떠났죠. 독일 만하임 국립 음대에서 오케스트라 지휘를 공부했어요. 

 

음대 졸업 후 독일 오페라 극장에서 먼저 지휘자로 경력을 쌓으셨다고 들었어요. 오페라 극장에서 일하면서 어떻게 뮤지컬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유럽의 오페라 극장은 전통적으로 오페라뿐 아니라 발레, 연주회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으로 시즌 프로그램을 구성해요. 그런데 2000년대를 전후해 뮤지컬이 추가되기 시작했어요. 오페라 애호가가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관객이 줄어드니까, 젊은 층을 극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뮤지컬이라는 대책을 강구한 거죠. 제가 상임 지휘자로 일했던 독일 프라이베르크 시립극장Mittelsaechsisches Theater도 마찬가지였어요. 제가 그곳에서 처음으로 지휘한 작품이 뮤지컬 <선셋 대로>인데 그 공연이 대히트를 쳤어요. 그러자 오페라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보수적인 극장 관계자들도 뮤지컬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됐죠. 2014년부터 2019년까지 그곳에서 오페라, 뮤지컬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공연을 지휘했어요. 

 

2019년 9월부터 현재까지 오스트리아로 린츠 주립극장 뮤지컬 상임 지휘자를 맡고 계시잖아요. 뮤지컬 제작 단체로서 린츠 주립극장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린츠 주립극장Landestheater Linz이 2013년 새롭게 개관한 음악 극장Musiktheater은 유럽에서 가장 현대적인 공연장으로 유명해요. 무대가 크고 최신식 설비가 갖추어져 있어 다양한 연출이 가능하죠. 게다가 린츠 주립극장은 유럽 극장으로서는 드물게 뮤지컬 파트를 따로 분리하여 운영하는 곳이에요. 12명의 뮤지컬배우가 소속되어 있고, 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브루크너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연주해요. 이곳에서 올라가는 뮤지컬 공연은 매번 티켓이 매진될 만큼 인기가 있어요. 독일어권 뮤지컬배우 사이에서는 꿈의 무대로 여겨지죠. 

 

린츠 주립극장은 1년에 몇 편의 뮤지컬을 무대에 올리나요?
매 시즌 오페라 6~7편, 발레 4편, 뮤지컬 5~6편이 무대에 올라요. 단, 한국처럼 몇 달 동안 한 작품을 계속 공연하는 게 아니라 매일 다른 작품을 공연해요. 뮤지컬 한 편이 8~10개월에 걸쳐 총 30~35회 공연하는 식이에요. 그래서 한 주에 네 편의 다른 뮤지컬을 공연한 적도 있어요. 심지어 네 작품 모두 같은 배우가 주연을 맡았죠. (웃음) 한국인이 보기에는 낯선 시스템이지만 유럽 오페라 극장의 전통적인 시스템에 뮤지컬을 접목한 거라고 보시면 돼요. 물론 매일 무대 세트를 바꿀 수 있을 만큼 극장 시설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그동안 린츠 주립극장에서 공연한 뮤지컬을 살펴보니 브로드웨이 뮤지컬부터 유럽 뮤지컬까지 종류가 다양하더라고요. 라이선스 뮤지컬의 경우 오리지널 연출 그대로 공연하나요?
<스쿨 오브 락>처럼 브로드웨이와 똑같이 연출했던 작품도 있지만, 대체로 연출과 무대 미술에 변화를 줘요. 제가 직접 음악을 편곡할 때도 많아요. 동명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뮤지컬화한 <메리와 맥스Mary And Max>는 원래 피아노 반주만 있던 뮤지컬 넘버 30여 곡을 모두 오케스트라 편성에 맞춰 편곡했어요. 동명 영화를 뮤지컬화한 <캐치 미 이프 유 캔>은 브로드웨이에서 15인조 브라스 밴드가 음악을 연주했는데, 제가 현악기를 더하고 규모를 키워 마이크 없이도 사운드가 풍성하게 울려 퍼지도록 편곡했어요. 그렇다고 모든 뮤지컬을 풀 오케스트라 반주로 공연하는 건 아니에요. <펀홈>처럼 규모가 작은 작품은 편곡 없이 그대로 공연하기도 해요.

 

뮤지컬에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사용되다 보니, 클래식 연주자로 이루어진 브루크너 오케스트라로서는 낯선 도전의 연속일 것 같아요. 
그래서 반감이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뮤지컬에 참여하는 걸 좋아하더라고요. 일단 객석 반응이 다른 공연과는 확실히 다르거든요. 관객이 극장을 가득 메우고 열광적으로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니 연주자도 행복할 수밖에요. 또 뮤지컬은 오페라와 달리 레퍼토리가 무궁무진하고 항상 새로운 작품이 올라가니까 재미있어 해요. 재즈 연주를 선보여야 했던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경우, 낯선 재즈 용어를 익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모두 즐거워했어요. 다음 시즌에 공연할 <투씨Tootsie>에서도 재즈를 연주하는데 다들 서로 하겠다고 난리예요. (웃음)

 

 

 

 

낯설지만 매력적인 독일어 뮤지컬

 

2021년 린츠 주립극장에서 세계 초연을 올린 <파도The Wave>는 ‘독일어 뮤지컬 극장상’에서 최우수 작품상, 작곡상, 극본상, 연출상,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고 들었어요. 어떤 작품인가요?
<파도>는 한 역사 교사가 대중이 얼마나 쉽게 전체주의에 물들 수 있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학생들을 상대로 실험을 하는 이야기예요. 교사는 엄격한 규칙을 세우고 똑같은 제복을 입혀 학생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결속하게 만들어요. 그러자 학생들은 점점 맹목적으로 변해가죠.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소설 『파도The Wave』가 원작인데, 이 소설은 독일에서 <디 벨레Die Welle>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흥행한 바 있어요. 뮤지컬은 미국 작곡가 오어 마티아스가 대본와 음악을 썼어요. 참고로 독일어 뮤지컬 극장상Deutsche Musical Theater Preis은 매년 오스트리아, 독일, 스위스에서 독일어로 공연된 뮤지컬을 대상으로 수여하는 상이에요. 독일어권에서 유일하게 뮤지컬만을 대상으로 하는 시상식으로 명성이 높아요.

 

린츠 주립극장에서 공연한 뮤지컬 가운데 기억에 남는 작품이 또 있나요? 
동명 스웨덴 영화를 무대화한 <천국에 있는 것처럼Wie im Himmel>이 기억에 남아요. 건강 문제로 은퇴 후 귀향한 세계적인 지휘자가 시골 마을의 아마추어 합창단을 이끌고 비엔나에서 열리는 합창 대회에 나가는 이야기예요. 원작 영화에 나오는 ‘가브리엘라의 노래gabriellas sång’라는 곡이 유명하죠. 뮤지컬은 스웨덴 부부 극작가와 독일 작곡가가 함께 만들었어요. 2021년 린츠 주립극장에서 공연할 때 제가 음악감독을 맡았는데, 등장 인물 하나하나가 사랑스럽고 따뜻한 이야기 속에 학교 폭력, 가정 폭력과 같은 사회 문제를 녹여낸 점이 좋았어요. 

 

국내에서는 오스트리아 뮤지컬이라고 하면 대부분 비엔나 극장 협회VBW, Vereinigte Bühnen Wien가 제작한 <엘리자벳> <모차르트!> <레베카>를 떠올려요. 주목할 만한 다른 뮤지컬 제작 단체나 작품이 있을까요?
비엔나 극장 협회는 비엔나 시가 오래된 극장 세 곳을 인수합병하여 만든 단체인데, 브로드웨이처럼 한 작품을 장기간 공연하는 게 특징이에요. 린츠 주립극장처럼 활발하게 뮤지컬을 제작하는 극장으로는 독일 뮌헨의 게르트너플라츠 극장Gärtnerplatztheater이 있어요. 라이선스 뮤지컬뿐 아니라 창작뮤지컬도 많이 선보이는 곳이에요. 독일어권 창작뮤지컬 가운데 인기 있는 작품으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명 싱어송라이터 팔코의 일대기를 그린 <팔코falco>, 동명의 독일 드라마를 무대화하여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50년대를 살아가는 어머니와 세 딸의 이야기를 그린 <쿠담 56Ku’Damm 56>이 있어요. 주목할 만한 작곡가는 토마스 차우프케Thomas Zaufke예요. 린츠 주립극장에서도 2019년 그가 작곡한 뮤지컬 <호박색 눈을 가진 토끼Der Hase mit den Bernsteinaugen>를 공연했는데, 독일 뮤지컬 극장상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작곡상을 받았어요. 한때 부유했으나 나치에게 재산을 몰수당한 유대인 가문의 5대에 걸친 이야기를 담았죠. 린츠 주립극장은 내년에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의 이야기를 그린 토마스 차우프케의 신작 <여왕Die Königinnen>을 선보일 예정이에요. 

 

흥미로운 뮤지컬이 많네요. 독일어권에서는 주로 어떤 뮤지컬이 인기가 있나요?
이렇다 할 트렌드는 없지만, 제가 느끼기에 역사나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극장 측에서도 단순히 흥겨운 쇼보다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보여주고 싶어 해요. 개인적으로 <넥스트 투 노멀> <디어 에반 핸슨> <펀홈>처럼 깊은 정서적 울림을 주는 뮤지컬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곳의 분위기가 저와 잘 맞는 것 같아요. 뮤지컬배우에게 모두 똑같은 발성이나 창법을 요구하지 않고, 각자의 개성을 존중해 준다는 점도 좋아요. 린츠 주립극장에 소속된 배우들만 봐도 경력이 아주 다양해요. 빈 소년 합창단 출신도 있고, 락 밴드 보컬이나 재즈 보컬로 활동하던 친구도 있죠.

 

낯선 문화권에서 지휘자로 활동하는 데 따른 어려움은 없으세요?
처음에는 힘들었죠. 프라이베르크 시립극장이 자리한 동독은 서독에 비해 문화가 보수적이에요. 동양인인 제가 지휘자로 부임하니까 다들 경계하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하지만 헤어지기 전에는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가 됐어요. 린츠 주립극장에서 일하는 지금도 저를 처음 만나는 객원 배우들은 먼저 다가오기를 망설여요. 동양인인 제가 과연 독일어를 할 수 있을까 의심하는 거죠. 외모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활동하는 이상 계속 안고 가야할 어려움이라고 생각해요.

 

혹시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기회가 되면 한국에서도 뮤지컬 지휘를 해보고 싶어요. 한국 뮤지컬을 독일어권에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고요. 올해는 한국 드라마를 통해 제가 작곡한 음악을 들려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오스트리아로 돌아가면 소프라노 조수미 선생님과 함께 드라마 OST 녹음을 진행할 예정이에요. 저의 최종적인 꿈은 언젠가 제가 작곡한 음악으로 콘서트를 여는 거예요. 그게 뮤지컬 음악이든 될지 영화나 드라마 음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양하게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8호 2023년 9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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