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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칼럼] 우리는 왜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보고 눈물 흘리는가

글 |김소정(뮤지컬 평론가) 사진 |쇼노트 2025-05-20 2,028

제4회 국립극장 젊은 공연예술 평론가상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김소정 뮤지컬 평론가가 매월 한 편의 뮤지컬을 깊이 있게 분석하는 평론을 연재합니다.


 

‘불륜 미화 드라마’. 이 작품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수식어이다. 그러나 과연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단순히 개인 간의 불륜으로만 보는 것이 맞을까? 무대 위의 세계는 단순히 현실 세계의 사실적인 재현이 아니며, 인물은 단지 한 명의 개인이 아닌, 상징성을 내포한 개인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프란체스카와 로버트는 각각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인물이며, 이들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 더 나아가 이들 사랑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65년 아이오와(매디슨 카운티는 미국 아이오와주에 위치한 군)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농촌 지역사회로, 사람들은 마을을 방문하는 타인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고, 서로를 감시하며 평가하며 살고 있다. 여자들은 아내로서 엄마로서 살림하며 아이를 양육했고, 남자들은 집안의 한 가장으로서 농업과 목축으로 생계를 유지해 갔다. 1965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20년이 되는 해였고, 미국은 승전국으로 세계를 제패했다. 동시에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며, 여성 역할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며 전통적인 주부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여성들이 생겨나고 흑인 권리 신장을 위한 민권법이 통과되는 등 사회적으로 혼동과 격변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로버트 제임스 윌러의 동명 소설(1992)을 원작으로 하며, 1995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뮤지컬의 극작은 마샤 노먼(Marsha Norman), 작곡은 레이슨 로버트 브라운(Jason Robert Brown), 연출은 바틀렛 셔(Bartlett Sher)가 맡았다. 2014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었으며, 그해 토니 어워즈에서 작곡상과 오케스트레이션상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2017년 초연되었고, 이번이 삼연(연출 김태형)이다.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의 사랑은, 개인의 불륜이 아니다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불륜을 정당화 혹은 미화한다는 평을 받아왔다. 서정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음악 때문도 있지만,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관객들이 느끼는 감정, 혹은 그 태도에 의해서일 것이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특히 2막 후반부 객석 곳곳에서 눈물을 흘리며 훌쩍거리는 관객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아니, 객석은 눈물바다이다. 왜 관객은 프란체스카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의 사랑 이야기를 보며 눈물짓는 걸까? 바로 이들의 사랑은 단순히 개인 간의 불륜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어쩌면 지금까지도 다른 형태로서 유효한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프란체스카가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온 이민자이고, 로버트는 미국 출신의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작가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프란체스카는 아이오와에 살고 있고, 로버트는 텍사스 출신이라는 것이다. 프란체스카는 ‘전쟁으로 인해 무력하게 꿈, 더 나아가 자아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적국이었다가 동맹국으로 돌아섰지만, 국민들은 전쟁의 혼란과 아픔을 그대로 겪어야 했고, 이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던 소녀 프란체스카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유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자유를 찾아 버드를 따라 미국으로 온 프란체스카는, 이민자들이 영어를 배우고, 미국 사회에 동화되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던 당대 사회 사조에 따라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거세당한 채 미국인으로서 살아가기를 강요받았다. 그에게는 단지, 전형적인 혹은 전통적인 미국 백인 중산층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삶만이 허락된 것이었다. 고향을 그리워하지도 않았고, 갈 수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프란체스카는 남편과의 전화 마지막 말에는 늘 ‘차오(Ciao, 이탈리아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인사말)’라고 덧붙이며 자신의 근원적 뿌리를 잊지 않으려 했다.

 

한편, 로버트는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고, 미국인이지만 자기 고향에 머물지 않고 ‘온 세계를 떠돌며 각지에서 벌어지는 혹은 보이는 현상/사람을 찍어서 기록’하는 사진가이다. 텍사스는 1836년부터 1845년 동안 미국 내에서 유일하게 독립국이었던 유일한 주였고,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상징으로서 자주 언급된다. 로버트에게 간간이 보이는 자유로이 이곳저곳을 떠도는 카우보이의 이미지는 미국의 개척정신을 보여줌과 동시에 높은 자립성과 자율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1960년대 미국은 ─ 본 작품에서도 히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만연해 있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 전쟁 후 귀환한 남성들을 중심으로 한곳에 머물며 집을 짓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것이 하나의 이상적인 삶으로 규정되었던 때였다. 그렇기에 로버트는 가족과는 연락이 끊겼으며, 정처 없이 떠돌아야 하는 직업 때문에 아내에게 이혼당한다. 즉, 프란체스카는 근본은 이탈리아인이지만, 지극히 미국적인 삶을 살아내고 있고, 로버트는 미국인이지만,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인물이 된다. 이를 시각적으로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이 집으로 돌아오면 항상 신발을 벗는 프란체스카와, 항상 신발을 신고 있는 로버트의 상반되는 모습이다. 

 

프란체스카는 전쟁의 희생양이었고, 로버트는 사회를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지오그래픽 사진작가들은 단순히 사진을 찍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미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문화 중재자로서 미국 중심의 사고관에서 벗어나 외부 세계의 풍경과 다양한 삶의 방식을 기록했다.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의 만남, 더 나아가 그들의 사랑은 단순히 개인의 만남이 아닌, 전쟁에서 적대국이었던 미국과 이탈리아 간의 화해이자 동시에 미국 전통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아이오와와 그것과 반대편에 있는 독립성과 자율성을 상징하는 텍사스의 만남이다. 상실의 감정을 느꼈던 이들의 상처 봉합의 장이자, 미국 내 이분화되어 있던 것들이 마주하는 시간이다.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지고 사는 이들의 대면, 그리고 서로를 이해함으로써 발생하는 사랑은 아픔과 갈등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온전히 치유할 수 있는 순간을 선사하며, 이는 생애 단 한 번밖에 오지 않을 정도로 극히 드문 순간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미국의 국가 정체성과 개인 정체성을 반영해 온 ‘미국 뮤지컬’이 사회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어찌할 도리 없이, 무력하게 휩쓸려 자신의 소중한 꿈과 자아 정체성, 존재마저 잃어버린 채 삶을 그저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하는 하나의 속죄이자, 위로로 읽힌다. 더 나아가, 전쟁이라는 거대한 인간사의 비극이 아니더라도, 현재 우리는 여전히 개인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사회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쉽게 거세당한 채, 사회의 틀에 맞춰 살아간다.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잃은 채, 감정은 깊은 심연에 묻어 두고 매시간을 보내왔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위로받고, 누군가를 통해 그 상처를 극복하며 자신의 망각되었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고, 극히 드물다. 그렇기에 관객은 무대 위 프란체스카와 로버트를 보며 대리 위로와 치유됨을 느끼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건 결국 삶을 살아낸 프란체스카의 이야기: 시대의 희생자에서 주체로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언뜻 보면,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의 사랑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사실, 이 작품의 가장 핵심은 자신의 존재를 잊고 살던 프란체스카가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여정에 있다. 그렇기에 작품의 오프닝을 여는 것도, 클로징을 닫는 것도 프란체스카이다. 프란체스카가 어떻게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떠나 미국 아이오와로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설명하는 아이 엠 송(I AM SONG)인 넘버 ‘집을 짓다’로 극이 시작된다. 전쟁 이후에는 모든 것이 파괴된 상태로, 인간은 자신들의 안정적이고 정착적인 삶을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집을 원하게 된다. 또한,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에 와서 새로운 이름을 갖고, 새로운 말투를 쓰며 살아가게 된 이민자였던 프란체스카에게 집을 짓는다는 것은 이전의 삶은 버리고, 새로운 이곳의 삶에 온전히 집중하겠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로버트로 인하여 넘버 ‘집을 짓다’에서 드러나던 왈츠풍의 멜로디는 넘버 ‘뭐였을까’와 ‘날 흔들지마’를 거치며 점차 불안한 멜로디로 발전한다. 그러다 결국, 프란체스카는 로버트와 사랑에 빠지게 되며, 넘버 ‘기나긴 시간을 건너’를 부르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이후 프란체스카는 자신의 말 못 했던 과거를 모두 로버트에게 털어놓는다. 앞서 언급했듯 프란체스카는 단순한 이민자가 아니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 너무나도 무력했던 어리고 꿈 많았던 소녀는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이탈리아에 모두 놓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즉, 프란체스카는 집이 있었지만, 집에 없었다. 그리고 온 세상을 떠돌며 사진을 찍는 로버트에게는 집이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기에 집에 있었다. 그렇기에 프란체스카의 결핍은 로버트에 의해 채워지게 된다. 혼자만 이 마을에서 이탈리아의 음식과 문화를 즐겼던 프란체스카는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고,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외로움을 로버트에게 말한다. 프란체스카는 로버트와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던, 펜넬을 넣은 야채스튜, 모카 포트로 내린 커피를, 오랜만에 고향에 온 듯 행복하게 즐긴다. 아이오와로 오기 전 나폴리에 머물렀던 로버트이기에 가능했으며, 로버트가 나폴리의 현재를 담은 사진 잡지를 프란체스카에게 선물하면서 프란체스카의 멈췄던 시간이 흐른다.

 

넘버 ‘널 알기 전과 후’, ‘단 한 번의 순간’에서 프란체스카는 “떠나자”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로버트에게 어렵게 “떠나자”라고 답해준다. 그러나 계속해서 현실을 일깨우는 남편의 전화벨 소리, 아이들을 버릴 수 없었던 프란체스카는 결국 로버트와의 이별을 선택한다. 프란체스카는 시대의 희생양이었지만, 자신의 가슴 아픈 과거로 변명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리고 숨겨왔던 과거의 아픔을 로버트와 함께 있는 시간 동안 직면함으로써, 용기를 내어 자신이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나흘의 시간 동안, 프란체스카는 변했다. 그를 변하게 만든 동기는 로버트였다. 아내/엄마로서의 역할에 대한 도덕적 방어기제가 작동하기도 했겠지만, 프란체스카는 이미 자기 자신을 찾았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로버트를 따라갈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 프란체스카는 잃어버렸던 미소를 되찾고, 삶의 행복을 다시금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는 로버트에게 가족 몰래 전화하지도 않았고, 아내와 엄마의 역할도 더욱 충실히 해나간다. 프란체스카는 딸을 결혼시키고, 또 골칫덩어리였던 아들을 의대에 보내는데, 매 순간 웃고 있다. 프란체스카는 더 이상 과거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고향을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그러다 로버트의 죽음 이후 받은 한 통의 편지를 읽으며 넘버 ‘괜찮아요. 사랑이니까’를 부른다. 이 넘버에서 프란체스카는 자신의 삶을 감각하며 잘 살아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로버트를 사랑했고, 지금도 그러했음을 고백한다. 이를 끝으로 아이 엠 송으로 시작했던, 프란체스카의 이야기가 아이 엠 송으로 끝난다. 프란체스카는 자신이 그렸던 로버트의 모습과, 로버트가 찍었던 자신의 모습을 교차적으로 배치하며 무대 위에서 홀가분하게 떠나간다. 그런데, 이렇게 뮤지컬이 추구하는 ‘진정한 나 자신 되기(Be Yourself)’를 찾아가는 프란체스카의 이야기는 단지 프란체스카라는 한 여인의 단편적인 삶을 보여주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프란체스카는 당대 여성의 모습(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누군가의 아내 혹은 엄마로만 살아야 했던)뿐 아니라, 전쟁이라는 사회의 구조적 폭력으로 인해 자아를 상실했던 그 시대의 사람들의 눈물로 가득 찬 이야기를 대변하는 존재자이다. 그리고 시대의 희생자에서 결국, 삶을 살아내는 주체로 나아간 강한 여성이었다.

 

 

프란체스카와 그를 바라보는 두 명의 응시자

이 작품에는 프란체스카와 타자로서 서 있는 두 명의 응시자가 존재한다. 로버트는 카메라로 세상을 응시하는 자이며, 그는 결코 그 세상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철저한 타자로서 세계와 순간적으로만 만난다. 그러나, 로버트는 계속해서 “난 여전히 무언가를 찾아다니고 있죠. 때로는 시간이 다 지워진 채로 잠시 길을 잃고 헤매죠. 카메라 속을 볼 때면 나란 존재는 사라져”(넘버 ‘난 왜 이곳에’)라고 말하는데, 이는 진정한 자아의 결핍으로 보인다. 모든 인간 개인은 타자와의 관계 맺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할 수 있는데, 로버트는 타자와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단지 표면적으로만 응시(gaze)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로버트가 프란체스카를 만나는 순간, 카메라를 내려놓고 응시자로서의 위치에서 벗어난다. 로버트는 “이제야 알겠어. 기나긴 시간을 건너 이끌려 왔어, 너에게. 프란체스카. 하늘을 맴돌며 머물 곳이 있나, 한참을 날아 이제야 찾아낸 것은 바로 너, 지금의 우리”(넘버 ‘기나긴 시간을 건너’)라고 프란체스카에게 말한다. 프란체스카와의 만남은 로버트가 더 이상 세상을 일방적으로 ‘응시’하는 자리에 머물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타자(프란체스카)의 시선 안에 포착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며, 응시의 반전을 경험하게 된다. 즉, 그 순간 로버트는 응시의 주체에서 응시의 객체(대상)로 위치를 전환하게 되며, 이러한 변화를 통해 스스로의 내면적 결핍과 진정한 자아를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 인간은 응시하길 원하는 동시에, 응시되어지길 원하는 본능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자아를 형성한다. 응시당하는 존재가 된 로버트는 비로소 세상 안에 있을 수 있게 되고, 그동안 집이 없이 정처 없이 떠돌던 상태에서 프란체스카라는 집을 발견하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프란체스카와 헤어진 로버트는 또다시 세상 밖에 응시자로 돌아가게 된다. 로버트는 주관적인 그림을 그리는 프란체스카와 달리, 순간적·객관적이고, 눈이 아닌 렌즈라는 매개를 통하며, 상이 거꾸로 맺히는 원리를 가지고 있는 카메라로 세상을 본다. 카메라는 그에게 있어 그를 대변하는 또 다른 정체성으로서의 도구이다. 이처럼 카메라가 ‘주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감정과 느낌 공유의 부재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마지막, 로버트가 자신이 찍은 모든 사진을 태울 때, 자신의 감정이 담겨 있고, 자신을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었던 프란체스카의 사진만은 태울 수 없는 것이다. 로버트에게 프란체스카는 단순히 강렬하지만 짧게 지나갔던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유일하게 그를 응시자라는 고독한 시선에 벗어나게 해준 존재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응시자는 바로, 프란체스카-버드 부부와 가장 가까운 이웃인 찰리-머지 부부이다. 찰리-머지 부부는 버드가 농업박람회에 가 있는 동안 프란체스카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그들은 버드-프란체스카, 프란체스카-로버트의 관계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버드와 프란체스카와 교류는 하지만, 그들은 철저히 제삼자로서, 외부에서 그들을 지켜본다. 프란체스카와 로버트를 둘러싼 그들의 대화는 오로지 프란체스카와 로버트가 무대 위를 떠났을 때에만 등장한다. 그들은 결코 무대 위에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그들의 무대 위 등장 시점과 위치는,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어쩌면 이 작품의 작가가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신이 프란체스카처럼 사랑에 빠졌으면 어떻게 했을 건지 묻는 머지의 질문에 찰리는 “당신에게 그럴 이유가 충분히 있겠지”라고 이야기한다. 머지-찰리 부부는 로버트와 금지된 사랑에 빠진 프란체스카를 비난하지 않는다. (사실, 버드도 프란체스카의 불륜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나오는데,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으며, 죽기 직전 프란체스카의 꿈을 이뤄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이야기한다.) 단지 로버트와 떠날지, 가정을 지킬지 혼란스러워하는 프란체스카에게 가 머지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위로할 뿐이다. 그렇기에 머지-찰리 부부의 짧은 대화는, 작가가 이 작품에서 관객들이 로버트와 프란체스카 간의 사랑을 단순히 불륜으로서 바라보며, 도덕적·윤리적으로 비난의 시점으로만 보길 원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장치이다. 그리고 동시에, 은밀하게는 당시 개인의 정체성과 꿈은 잃어버린 채,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로서만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살아야 했던 여성의 불합리한 삶에 온정의 시선을 보낸다. 그들은 사회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여성이 받을 수 있는 온갖 공격이 정말 타당하고, 옳은 것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본디 응시의 대상이 되는 주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정의할 힘을 잃어버리기 일쑤이다. 응시자가 응시하는 대상의 정체성을 표면적으로 쉽게 규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기만 했던 응시자인 로버트는 프란체스카의 삶에 대해 아무런 평가나 조언도 하지 않는다. 그저 프란체스카가 온전히 스스로 결정할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찰리-머지 부부 또한 프란체스카의 행동에 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본디 타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권위적인 권력을 가졌던 응시자는, 이 작품에서는 그 권력을 내려놓고, 대상과 관계 맺으면서도, 거리를 두며 응시의 대상이었던 프란체스카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나가고, 그를 정립할 수 있게 묵묵히 응원한다. 

 

 

‘사랑 이야기’는 어쩌면 진부한 소재이거나 누군가에는 지루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랑 이야기는 당대 사회적 맥락을 은유적으로 담아내고, 기존의 사회체제에 대항하는 저항의 메시지를 담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가벼워 보이지만 그 어떤 것보다 깊이 있는 것일 수 있다. 뮤지컬 <멤피스>에서 흑인 펠리샤와 백인 휴이의 사랑은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1950년대 미국 남부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불합리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며,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행위였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코제트에 대한 판틴의 사랑, 마리우스를 향한 에포닌의 대가 없는 헌신적인 사랑은 죄수였던 장 발장이 성자에 이르기까지 인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재 상연 중인 뮤지컬 <나의 소란스러운 서림에서> 또한 로맨스 소설 속 숨겨져 있는 저항의 메시지를 소재로 하고 있다.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역시 ‘사랑’이라는 익숙한 틀 안에 숨어 있는, 시대와 사회,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물론, 그 사랑이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명백히 불륜이라는 형태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사랑 이야기와는 다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불륜’이라는 도덕적 경계 밖의 사랑은 더 깊숙이 감춰졌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있어 어쩌면 효과적인 하나의 수단일지도 모른다.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의 이야기는 단순한 감정의 교류를 넘어서,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던 상실된 자아의 회복과 개인의 존재가 억압받았던 구조 속에서 피어난 저항이자, 치유 혹은 위로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관객이 흘리는 눈물은 로맨틱한 분위기에 휩쓸려 무의식적으로 흘리는 것이 아니다. 각자 내면 깊이 자리한 결핍을 마주하고, 그 결핍이 어느새 치유받고 있다고 느낀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결과이다. 결국, 이 작품은 우리에게 조용히 손을 내밀며 묻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거대한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리고 말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는데 고생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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