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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 칠서(七庶)의 한(恨) [NO.170]

글 |박보라 사진제공 |서울예술단 2017-11-16 4,405


한국적인 정체성을 지닌 서울예술단의 새로운 선택은 <칠서>다. 이번 작품은 광해군 당시 일어난 계축옥사, 즉 ‘일곱 서자의 난’을 모티프로 창작됐다. 작품과 사건에 만연한 조선 시대 서얼의 서러움을 알아봤다.


“소인이 대감의 정기를 타 당당한 남자로 태어났사오니 이만한 즐거움이 없사오되, 평생 서러워하기는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옵고 형을 형이라 못하여 상하 노복이 다 천히 보고, 친척과 고구(故舊)도 손으로 가리켜 아무의 천생(賤生)이라 이르오니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에 있으오리까?” - 허균, 『홍길동전』 중





차별이 쏘아 올린 공

광해군 6년 1613년 5월에 일어난 계축옥사, ‘칠서의 옥’ 혹은 ‘일곱 서자의 난’은 일곱 명의 서자 출신이 역모를 꾀했다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서얼들이 조선왕조에 조직적으로 저항한 최초의 움직임으로 그 의미가 깊다. 17세기 조선은 임진왜란의 후유증 속에서 신분 질서가 흔들리고 새로운 사회를 향한 갈망이 고조됐던 시기였다. 사건에 가담한 일곱 명의 서자는 서양갑, 심우영, 박응서, 이경준, 박치의, 박치인, 김경손이다. 이들 모두 아버지가 고위 관직을 지닌 명문가였지만 불행하게도 서자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로 숱한 차별을 당했다. 자신들을 죽림칠현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사람들은 이들을 향해 강변칠우로 말하기도 했다.


계축옥사의 시작은 문경 새재에서 발생한 살인강도 사건이었다. 서울과 부산의 왜관을 왕래하면서 장사하던 상인을 노린 이 사건은 범인이 상인을 죽이고 은화 수백 냥을 훔쳐 달아났다. 단순한 화적떼가 벌인 강도질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을 피살된 상인의 노비가 단서를 쫓고 범인을 미행하여 근거지를 알아내,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실체가 발각되고 만다. 범인들은 ‘칠서’라 불리던 서자 일곱 명이었다.


이들은 1613년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서 윤리가 필요 없는 집이라는 뜻의 무륜당을 지었다. 이곳을 근거지로 소금장수, 나무꾼 등으로 행세하며 전국에서 화적질을 일삼았다. 칠서는 강도질로 빼앗은 은을 가지고 무사들을 끌어모아 대궐을 공격하는 역모를 구상하고 있었다. 당시 조사로 밝혀진 바는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과 모의해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역모의 원인은 서자라는 굴레 때문에 벼슬길이 막힌 것에 대한 원한이었다. 이들은 광해군 등극 초에 서얼의 차별을 없애달라는 상소를 올린 바 있는데 이를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었다. 이어 칠서들은 신분제라는 족쇄 때문에 사회 진출에 제한을 받았던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했다.


광해군과 조정은 칠서와 연관된 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인연이 닿은 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고 죽어 나가는 경우도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밝혀진 칠서의 한은 엄청났다. 당시 열네 살이던 심우영의 아들은 “아비가 늘 ‘이 나라에서는 쉬운 일이 없으니 네가 크면 누르하치를 불러와라’라고 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만주족 군대를 데리고 와서라도 서얼 차별의 원한을 갚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계축옥사를 계기로 광해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김제남이 사사됐다. 또 영창대군은 이듬해인 1614년 2월 피살되고 만다. 광해군은 훗날 이 일의 영향으로 왕위에서 밀려난다.





뿌리 깊은 차별

서얼은 양반의 자손 가운데 첩에게서 태어난 자손을 말한다. 아버지의 신분에 따라 형식적으로 양반의 신분을 따랐으나 사실상 중인으로 취급하여 사회적으로 심한 차별을 받았다. 특히나 조선 초 서얼 차별은 가혹했다. 서얼들은 문과와 무과는 물론 생원과 진시조차 응시하는 것이 제한됐을 정도였다. 부친이 적자 형제를 남기지 않고 죽었을 때도 서자들은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해 제사와 상속에서 부친의 조카들에게도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 서자의 법정 상속분은 7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당연히 시간이 흐를수록 서자들의 억울함과 원한은 깊어졌다. 서얼들을 금고하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쉽게 변하지 못했다. 임진왜란 등을 계기로 서자들이 무관직으로 진출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문관직에서의 차별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서얼은 고위 관료나 양반 사회로의 진출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승문원의 이문학관이나 규장각의 검서관 등 비교적 낮은 지위는 서얼이 독점했고, 이들은 사대문서나 『일성록』 등을 기록하는 중요한 역할이 됐다. 벼슬계에 진출을 하지 못한 대신, 학문적인 방면에 큰 업적을 남긴 것도 특징이다. 어숙권의 『고사촬요』,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한치윤의 『해동역사』 등이 대표적이다.




서얼의 이야기
‘일곱 서자의 난’에서 모티프를 얻어 탄생한 것으로 알려진 작품은 1612년 허균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홍길동전』이다. 연산군 당시 실존했던 의적 홍길동을 소재로, 비범한 재주와 능력을 지닌 홍길동을 통해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던 적서 차별의 문제점, 지배층의 무능을 비판해 사람들에게 뜨거운 통쾌함을 전했다. 조선 세종 때 좌의정 홍상직과 시비 사이에서 서얼로 태어난 홍길동은 홍 대감의 또 다른 첩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할 위기를 겪고 도적의 소굴로 가 우두머리가 된다. 이후 홍길동은 무리의 이름을 활빈당이라고 지어, 탐관오리, 패악하고 타락한 승려를 처단한다. 나라에서는 홍길동을 잡을 수 없자 아버지인 홍 대감을 회유하여 홍길동을 병조판서에 앉히겠다고 한다. 임금 앞에 나타난 홍길동은 벼슬자리를 사양하고 나라를 떠날 것을 알리고 홀연히 사라진다. 홍길동은 양반 출신인 아버지와 형은 조선에 남겨두고, 노비인 어머니와 무리를 이끌고 율도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운다. 『홍길동전』은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아 영화와 드라마로 각색됐는데, 특히 최근 방송한 드라마 <역적>은 또 다른 홍길동의 모습을 보여주며 큰 인기를 끌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9호 2017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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