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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RIGINAL] 희곡 『밑바닥에서』와 <뮤지컬 밑바닥에서> [No.163]

글 |나윤정 2017-04-14 5,390

인간의
지독한 삶이여! 


* 공연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902년 발표된 희곡 『밑바닥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의 창시자인 막심 고리키의 대표작이다. 총 4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좁고 허름한 여인숙을 배경으로, 그곳에서 고된 삶을 연명하고 있는 밑바닥 인생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등장인물들은 제정 말기 러시아 사회를 살아가는 빈민들의 암울한 삶을 대변하며, 처절한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 작품의 초연은 체호프의 <갈매기>와 함께 러시아 연극사의 한 장을 장식했다고 평가받는다. 사회의 부정과 구조적 모순이 양산한 희생자들을 옹호하고, 인간과 인생의 의미를 일깨워준 수작이기 때문이다. 


왕용범이 극본과 연출을 맡은 <뮤지컬 밑바닥에서>는 희곡 『밑바닥에서』를 각색한 작품이다. 무대 전체를 지배하는 암울한 분위기, 비극적인 사랑과 죽음, 비범한 인물의 등장으로 인한 밑바닥 인생들의 변화 등 작품의 전체적인 컨셉은 원작과 동일 선상에 있다. 하지만 뮤지컬은 토굴과 같은 지하실에 위치한 비좁고 더러운 여인숙을 근대 러시아의 선술집으로, 17명의 등장인물을 10명으로 재창조해 드라마에 대대적인 변화를 가했다. 뮤지컬을 위해 새롭게 창조된 캐릭터와 원작 캐릭터들의 새로운 조합을 비교해 보는 것은 이 작품의 특별한 재미다.




새로운 조합, 새로운 이야기         

    

희곡 『밑바닥에서』는 17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여인숙의 주인으로 아내를 후려잡고 사는 독한 영감 코스틸료프, 그의 젊은 아내 바실리사, 바실리사의 여동생 나타샤, 바실리사의 정부였지만 나타샤를 사랑하게 된 페페르, 가난한 자물쇠 제조공 클레시, 그의 병든 아내 안나, 무일푼이 된 백작, 연애 소설에서 구원을 찾는 처녀 나스짜 등 하나같이 절망적인 인생들이 좁은 여인숙에 뒤엉켜 살고 있다. 이들은 상대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퍼붓는다. 심지어 함께 생활한 안나가 죽어도 애도조차 하지 않는다. 이들의 모습은 같은 공간에 모여 살지만 결국 소통할 수 없는 인간의 비극을 여실히 보여준다. 


<뮤지컬 밑바닥에서>의 등장인물은 총 10명이다. 배경이 선술집으로 바뀜에 따라 원작 속 여인숙 주인 코스틸료프는 사라지고, 선술집 주인 타냐가 새롭게 등장한다. 작품의 한 축에자리하고 있는 타냐의 슬픈 사연은 뮤지컬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야기다. 타냐는 페페르의 누나로 술집을 꾸리며 억척같이 살고 있다. 폐렴에 걸린 막스는 타냐를 친누나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는 타냐의 아들이다. 하지만 결국 막스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해 타냐의 비극을 부각시킨다.


한편, 타냐와 막스를 제외한 나머지 캐릭터들은 모두 원작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페페르, 배우, 싸친, 조프는 원작 캐릭터의 성향과 비슷하다. 반면 언니 바실리사는 백작의 아내이자 페페르의 옛 연인으로, 동생 나타샤는 선술집의 새 여급으로, 백작은 바실리사를 옥죄는 나쁜 남편으로, 처녀 나스짜는 가난하고 늙은 매춘부로 새로운 설정을 더했다. 선술집 사람들은 여인숙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인간적이다. 티격태격하지만 가끔 위트 있는 말로 서로를 웃기기도 하고, 한 지붕에 사는 이들에게 어느 정도 관심을 보인다. 막스의 죽음을 애도하고, 페페르의 도주를 돕는 인물들은 원작처럼 완벽하게 무관심하지 않다.




결국 비극적인 사랑            


원작과 뮤지컬 속 페페르는 같은 운명이다. 부조리한 세상으로부터 온갖 상처를 받은 페페르는 새로운 사랑을 통해 희망을 꿈꾸지만 결국 무참히 좌절된다. 하지만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설정으로 페페르의 이야기를 그린다. 희곡 『밑바닥에서』의 페페르는 여인숙 구석 얇은 판자로 칸막이를 친 방에서 살고 있다. 그는 여인숙 안주인 바실리사와 정분을 통했지만, 그녀의 동생 나타샤에게 점차 이끌린다. 하지만 새로운 사랑을 향한 그의 희망은 결국 3막에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한다. 그는 용기를 내어 나타샤에게 함께 떠나자고 제안을 하지만, 남편 코스틸료프로부터 해방되길 원했던 바실리사는 이들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결국 바실리사의 농간으로 페페르는 코스틸료프를 죽이게 되고, 바실리아에게 학대받은 나타샤는 두 사람이 공모해 코스틸료프를 죽인 것이니 이들을 감옥에 보내라고 소리친다. 이후 이들의 운명은 4막 다른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페페르와 바실리아는 감옥으로, 나타샤는 집을 나가 자취를 감쳐버렸다는 것이다. 


<뮤지컬 밑바닥에서>는 페페르의 비극을 작품의 중심에 놓는다. 이야기의 시작도 5년간 옥살이를 하고 온 페페르의 출소 기념 파티에서부터다. 백작을 대신해 감옥에 다녀온 페페르. 그는 선술집의 새로운 여급 나타샤에게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백작의 아내이자 페페르의 옛 연인 바실리사가 그에게 접근해 다시 시작하자고 이야기한다. 페페르는 바실리사를 뿌리치고 마침내 나타샤에게 고백을 해 사랑의 결실을 맺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 찰나 어둠의 그림자가 페페르에게 드리운다. 바실리사가 페페르를 백작의 살인자로 만든 것이다. 결국 페페르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충격을 받은 나타샤도 선술집을 떠나버린다. 페페르의 비참한 결말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밑바닥인 인생의 굴레를 보여준다.



잠시 왔다 사라진 희망             

희곡 『밑바닥에서』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둠 속을 헤맨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인물은 예외다. 1막 말미에 등장하는 새로운 투숙객 루카다. 나이 지긋한 순례자 루카는 지혜롭고 비범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여인숙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넓은 포용력으로 그들을 다독거린다. 배우에겐 공짜로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는 병원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페페르에게는 황금의 땅 시베리아로 떠나보라고 권유한다. 루카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희곡에 긴장된 내적 움직임을 부여한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씩 희망이 싹트지만, 그 환상은 곧 깨지고 만다. 그리고 3막에서 비극이 잉태되는 순간 루카는 말도 없이 사라진다. 4막, 구질구질한 현실은 그대로지만 루카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여인숙에 처음으로 진지한 말들이 오가고, 남은 이들은 자신들의 수치스러운 운명을 슬퍼하며 노래를 부른다.


<뮤지컬 밑바닥에서>는 나타샤가 루카의 역할을 대신한다. 밝고 건강한 처녀 나타샤는 사람들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블라디보스톡의 봄’을 노래하며 선술집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녀는 루카처럼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따뜻한 조언을 해준다. 그녀의 응원에 힘을 얻은 배우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고, 알코올 중독도 치료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갖게 된다. 싹싹하고 친절한 나타샤의 등장으로 선술집에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 듯하다. 하지만 그녀는 페페르의 비극에 충격을 받고 이내 그곳을 떠난다. 한 달 후 그녀는 배우에게 편지를 보내 소식을 들려준다. 그리고 배우에게 무료로 알코올 중독을 고쳐주는 병원은 존재하지 않더라는 허무한 현실을 전한다.


뮤지컬의 결말은 원작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나타샤가 떠난 뒤 싸친은 외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라고. 원작에서도 싸친은 루카가 떠난 뒤 각성의 말들로 피폐한 삶의 고통을 꼬집는다. 선술집에 남은 이들은 ‘블라디보스톡의 봄’을 부르며 밑바닥에 짖밟힌 희망을 다시 잡으려 한다. 하지만 이내 들리는 비보. 희곡에서 그러했듯 뮤지컬에서도 배우의 자살 소식이 작품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작품의 비극을 더욱 심화시키는 배우의 죽음. 하지만 이는 곧 진리를 움켜쥐지 못한 인간의 새로운 첫발을 의미하며, 살아 있는 주검들의 강한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게 인간 속에 있고, 모든 게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만이 존재할 뿐, 나머지는 그의 손과 뇌의 일이야!
인, 간! 인간은 위대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이름인가! 인, 간!
인간을 존중해야 해! 동정할 필요 없어.  -『밑바닥에서』 중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2호 2017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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