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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MAESTRO] 마이미스트 유진규, 아무도 걷지 않은 ‘몸짓의 길’ [No.116]

글 |송준호 사진 |김호근 2013-05-27 4,670

춘천은 닭갈비와 막국수의 도시이지만, 하나 더 꼽는다면 마임의 도시다. 해마다 5월이면 전국 각지, 심지어 해외에서도 마임을 보기 위해 춘천에 모인다. 바로 춘천마임축제가 있기 때문이다. 춘천마임축제는 사실상 한국 마임의 동의어가 된 지 오래다. 1989년 5명이 모여 소박하게 시작한 이 축제는 1999년부터 2006년까지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 문화관광축제, 2007년부터 2011년까지 5년 연속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최우수 문화관광축제로 뽑혔다. 동시에 춘천이라는 지역성을 넘어 영국의 런던 마임 페스티벌과 프랑스의 미모스 마임 페스티벌과 함께 세계 3대 마임 축제로 발돋움했다. 문화 예술의 중심지인 서울에서도 마임 공연을 보기 위해서는 춘천으로 향해야 한다.
하지만 이 25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은 1세대 마이미스트 유진규다. 모든 것은 유진규가 서울에서 춘천으로 ‘천도’하면서 이루어진 일이다. 서울에서 개최되던 한국 마임 페스티벌을 되살린 것도 그였고, 춘천시와 함께하며 춘천마임축제라는 이름으로 개칭한 것도 그였다. 춘천이 마임의 도시가 된 건 5월에만 열리는 춘천마임축제가 아니라 상설 마임 전용극장인 ‘마임의 집’ 덕분인데, 이곳의 대표 역시 유진규다. 그는 어느 지역에서도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마임을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공연하며 전국의 몇 안 되는 마임 애호가들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역할도 했다. 단기간으로 끝나는 연례행사보다 극장이나 정기공연 마련으로 마임의 저변을 넓혀야 한다는 장기적인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마임 아티스트로서의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임이라고 하면 팬터마임만 떠올리는 대중의 인식을 확장하기 위해 그는 2009년부터 새로운 실험을 시작했다. 설치예술과 결합한 마임 연작 <방> 시리즈가 그것이다.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의 우스꽝스럽고 페이소스 넘치는 표정과 몸짓을 기대했던 이들은 그가 초대한 새빨갛고 새까만 방에서 당황했고 깨달았다. ‘몸의 예술’이라고 알려진 마임의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임이 몸의 예술이 아닌 다른 것으로 규정되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유진규 역시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는 어떤 정의에도 구속되지 않으려는 듯, 끊임없이 비우고 움직이기를 반복한다. 어쩌면 그런 자유에 대한 갈망의 몸짓을 아울러 마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마임 인생을 돌아보다
무대에서 선생님을 뵐 때마다 늘 벗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지난해 마임 인생 40주년 기념 공연 <발가벗은 유진규>에서도 벗으셨죠. 초심을 다진다는 의도였는데 잘되셨나요.
이전까지는 대충 벗었는데 그때는 확실히 벗었죠(웃음). 배우라면 완전히 벗는다는 생각은 늘 할 거예요.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건 어렵더라구요. 몸을 온전하게 보여주는 행위는 아름다운 거예요. 몸매와는 무관하죠. 순수함을 보여주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랄까. 그동안은 못했지만 지난해 40주년이자 환갑을 맞으면서 이제는 당당하게 벗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다만 이제 배도 나오고 늙은 몸이라 보기에는 좀 그랬겠지만(웃음).


군더더기 없는 선생님의 몸에 비하면 우리의 몸에서는 욕심이 보입니다. 멋지게 보이려고 사람들은 성형을 하거나 근육을 만들어 관리하죠. 그걸 안 하면 게으르다는 비난도 받고.
언제부턴가 ‘꾸밈’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생겼어요. 주변에 봐도 그런 예술들이 눈에 띄어요. 자연스럽지 않은 것 같아요. 보는 사람의 눈도 왜곡되거든요. 그래서 거부하기 시작했어요. 난 그래서 공연할 때도 안경을 벗지 않아요. 처음엔 안경도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벗었지만, 난 평상시에도 안경을 쓰는데? 왜 무대에 안경 쓰고 올라가면 안 될까? 그것조차 꾸밈이라는 거죠. 그래서 몸도 관리는 하지만 굳이 트레이닝은 하지 않아요.


대개 배우들은 외향적인 데 반해 선생님은 그 에너지와는 별개로 내성 적으로 보입니다.
전형적인 A형 소심남이었죠(웃음). 생각은 많은데 드러내질 못했어요. 소풍을 가서 밥을 먹어도 혼자 먹고, 말이 얼마나 없었는지 별명도 ‘돌부처’였으니까. 아마 공연만 했으면 그대로였겠지만 축제를 관리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외향적으로 바뀌긴 했죠.


연극에서 출발해 마임에 빠지게 된 것도 그런 성격 때문인가요.
연극은 조직 예술이거든요. 나는 개인주의적인 사람이고.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충돌이 많아요. 그런데 마임은 개인 예술이더라고. 내가 의도한 걸 하면 되는 거죠. 딱 내가 바라는 거였어요. 내가 생각하는 걸 드러내기만 하면 되니까.


당시 마임도 비주류 장르였을 텐데, 독창적이고 특별함을 추구하는 성향도 있으신 듯해요.
내가 장자를 좋아했거든요. 공자는 안 맞고, 노자는 너무 크고 애매해. 장자는 상상을 자극하는 게 재밌었어요. 지금까지도 내 삶의 지표가 장자의 ‘길’에 대한 이야기에요. 길이 뭐냐. 길은 처음부터 있었던 게 아니다. 사람이 다님으로써 생긴 거다. 그게 답이었던 거죠. 내가 가면 그게 길이다. 그게 와닿았어요. 수의학(전공)이냐 연극이냐, 선택하면서 내 길을 만들기 시작했죠. 그러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당시 아무도 안 하고 있던 ‘마임의 길’을 갔죠.


사람들은 마임 하면 팬터마임을 생각합니다. 반면 선생님의 마임은 퍼포먼스에 가까워 보이고 제의 같기도 합니다. ‘유진규 마임’은 어떻게 이런 특징을 갖게 됐는지요.
처음엔 저도 팬터마임부터 시작했어요. 하다가 금방 싫증이 났죠. 채플린의 마임처럼 스토리도 있고 페이소스도 있는 마임은 내 몸짓이 아니더라고. 그럼 내 건 뭐냐. 내가 생각하는 걸 보여주는 거죠. 다른 공연들은 남들 즐겁게 하려고 하는 거지만, 나의 마임은 내 생각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었죠. 내 관심은 삶, 우주, 신, 이런 것들이었어요. 그럼 이걸 함께 고민해보면 어떨까. 이게 내 공연의 핵심이 된 겁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 밖의 존재, 그런 힘을 끌어들여서 보여주는 형태가 자연스럽게 제의적인 모습을 띠게 된 것 같아요. 사실 공연자가 무당이나 제사장 역할을 하면서 접신하는 건 공연의 기원과도 닿아 있는 부분이죠.


순수예술이 대중화를 추구하는데 선생님은 그냥 다른 길을 향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예술가가 대중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건 책임을 회피하는 거죠. 당연히 많은 사람이 보러 와주길 바라요. 내색은 안 하지만 고민도 해 요. 그렇다고 관객의 취향에 맞출 수는 없죠. 연작인 <방> 시리즈도 그런 걸 어느 정도 고려한 작품이에요. 마임 강의를 할 때도 팬터마임도 소개하고 한국적인 마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하며 마임을 알리죠. 이런 활동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기 안의 것들을 말하지 않고도 표현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만 알아도 좋아요.


말씀하신 <방> 시리즈는 설치예술 같은 마임이었죠. 공연의 3요소(공연자, 관객, 공간)를 유지해야 될까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하셨다고 들었는데, 답은 찾으셨는지.
가능성은 본 것 같아요. 마임 배우는 왜 꼭 몸으로 보여줘야 되는가. 다른 걸로 몸을 보여줄 순 없는가, 그래야만 사람들은 몸을 느끼는가, 이런 고민을 하다가 어둠 속에서 손뼉을 치거나 몸을 때리면서 인식하는 몸을 떠올렸죠. 안 보이는 몸이라도 분명히 존재하는 거잖아요. 또 몸이라는 게 꼭 있어야만 공연이 가능한가, 3요소가 있어야만 가능한가에 대한 고민에서 <빨간방>이 나왔죠. 온통 빨간 미로 속에서 저는 한쪽에 앉아 있고 관객들이 돌아다니는 겁니다. 관객이 배우가 되는 거죠.

 

                                

 

 

춘천에서 꽃피운 한국 마임
1981년에 서울을 떠나 춘천에 정착하셨습니다.
당시 광주 민주화운동이 끝나고, 살벌한 시기였죠. 자괴감이 들었는데 구체적인 행동을 못했어요. 저항도 못했죠. 작품도 안 나왔어요. 그때 마침 결혼을 했고 그런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는 시골에 가서 살자고 생각했죠.


왜 춘천이었습니까.
부모님이 다 이북 출신이셔서 저는 시골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거든요. 혈혈단신 내려온 거라 친척도 없고. 서울에서 먼 데는 안 되겠고 돌아다녀 보니까 춘천이 좋더라고. 그때가 봄이었는데 마침 개나리도 피었고. 한 달 만에 결정하고 내려왔죠. A형이 생각은 많이 하지만 결정은 빨리 해요(웃음).


그런데 이주하시면서 마임을 그만두셨죠.
공백기였어요. 그때 소도 키우고 카페도 운영했죠. 그러다 공연 기획자가 찾아와서 내가 복귀하지 않으면 마임이 사라질 거라고 설득했어요. 그래서 1988년에 복귀해 이듬해 춘천마임축제의 전신인 ‘한국 마임 페스티벌’을 열게 됐죠.


소박하게 출발한 춘천마임축제가 이제 세계적인 공연 예술 축제로 성장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와 덩치가 커진 지금, 축제의 목표도 달라졌을 것 같은데요.
달라졌죠. 한 5년 하니까 사람들이 마임이 뭔지도 알고 주변에서 인정도 해요. 강의도 나가고, 입지가 달라졌어요. 춘천시가 공동 주최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해서 춘천마임축제로 바뀌고 세계적인 축제로 발돋움도 했어요. 그런데 그때부터 새로운 고민이 시작된 겁니다. ‘마임’은 이 정도로 됐는데 ‘축제’는 미진했던 거예요. 축제는 공연 몇 개 하는 게 아니라 며칠 밤을 지새면서 광적으로 노는 것이거든요. 이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고 우리 민족도 그렇게 놀았다는 게 문헌에 다 나와 있어요. 그때 억눌려 있는 축제의 콘텐츠를 끄집어내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래서 나온 게 ‘도깨비 난장’이에요. 밤 10시에 시작해서 새벽 5시까지 이어지는 획기적인 밤샘 난장이에요. 몸을 중심으로 한 예술이 한 축, 축제 정신을 중심으로 한 난장이 한 축. 이 두 축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게 새로운 목표겠죠.


한국 마임의 역사에서 춘천마임축제가 지닌 가치를 자평하신다면.
우리나라는 폐쇄적인 게 사실이에요. 주류가 아니면 인정을 안 하려고 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이 행사를 비주류들을 위한 축제로 만들려고 했어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예술들을 다 오라고 했죠. 우리가 끌어안겠다고. 비주류 예술이 대개 대중성이 없잖아요. 퍼포먼스 축제에 가봐도 사람 없어요. 우리는 그걸 축제 안에서 대중들과 만나게 해줬어요. 남들이 안 알아주는 예술을 마음껏 펼치면서 그것들을 즐기는 사람을 이만큼 양성한 건 자부심이 있죠. 앞으로도 그런 역할을 해 나가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축제가 열릴 때마다 예산이나 장소 문제로 시끄러웠죠. 올해로 마지막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는데요. 앞으로 춘천마임축제는 어떻게 될까요.
앞날을 예측할 수가 없어요. 축제의 본질을 뒤흔드는 일들이 자꾸 생기고 있어요. 이 축제는 목적성 행사가 아니라 예술이 가진 자유로움을 마음껏 즐기는 행사예요. 특히 몸의 자유와 해방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축제라는 말입니다. 올해가 25년째인데 근본적인 문제에서 위기감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특히 올해는 처음으로 춘천마임축제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는 목소리들이 있었어요. 지역 경제도 생각해야 된다고 하는데, 이건 이 축제의 정체성과 전혀 상관이 없는 거거든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솔직히 불안합니다.

 

 

                         

 

 

다시, 마이미스트 유진규
지난해 40주년이셨죠. 40살을 불혹(不惑)이라고 하는데. 스스로의 마임에 의심은 없나요.
이제까지의 과정은 계속 벗겨내는 작업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팬터마임에서 출발해 ‘내 몸짓’, 그다음엔 우리 것에 관심을 갖다가 하늘, 다른 존재, 다시 몸, 그런 과정을 거치다 작년에 그 행사를 거치면서 ‘꾸밈’을 벗어던지고 있는 거죠. 답은 없는 것 같아요.


선생님의 여정을 보면 무언가 얻기 위해 비우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꿰뚫어 봤네. <빈손>이 바로 그거거든. 우리가 뭘 잡으려면 빈손이 되어야 하잖아요. 이걸 놔야만 다른 걸 잡을 수 있다고. 나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도 놓지 않으면서 잡으려고 해서 문제가 생기는 거죠. 빈손은 비웠다는 거고, 무엇이든 잡을 수 있다는 거예요. 비움은 그냥 비운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걸 완전하게 가질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걸 뜻해요.


말씀을 들으니 선생님의 비움은 ‘무욕’이 아니라 ‘과욕’이네요(웃음).
과연 그렇네. ‘완전하게’ 갖고 싶다는 거니까.


예술가로서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인가요.
다른 생각 없이 작품에만 온전히 빠져 있을 때. 그리고 한 사람이어도 좋으니 그걸 즐겁게 봐줄 때. 나 스스로야 즐거움은 한순간이고 공연이 끝나면 허탈감이 오잖아요. 내 작품을 보고 관객이 자기가 본 걸 이야기해줄 때가 고맙지.


예술감독으로서 축제를 잘 유치하는 것과 예술가 개인의 성취감, 어느 쪽이 더 큰가요.
캬- 차원이 달라요. 일단 축제라는 건 스케일이 있어서 공연과 관객이 많아요. 이게 마약 같아요. 밤새 함성과 함께 광적으로 놀다가 내년을 기약할 때는 짜릿하죠. 내 공연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죠. 그런데 춘천마임축제는 이제 내가 손을 좀 놔야 하는 상황에 온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도 이제 작품에 몰입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하고.


마임을 하고 있는, 할 예정인 후배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늘 얘기하는 거지만 마임을, 예술도 마찬가지지만, 이걸 고정된 개념으로 인식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건 한계 안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표현이 반복하면서 기술적으로 숙달되거나 세련되는 건 있겠지만 예술은 기술이 아니거든요. 또 우린 한국 사람인 만큼 우리의 원형을 찾아 그걸 보여줘야 합니다. 하나 더 말하면 마임에만 국한해 작업하지 말라는 거. 다른 장르하고도 작업해야 결국 자신의 세계도 넓어져요. 현대 예술에 연극이나 무용이 어디 있어요? 해체되고 융합돼서 형태조차 구분이 어려운데. 피지컬 씨어터만 봐도 그렇죠. 마임계는 너무 폐쇄적인 경향이 있어요.


사실 마임계에서 대중의 주목을 받는 사람은 선생님 한 분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유진규 이후의 마임이 더 궁금해집니다. 한국 마임은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든 살아남겠죠. 어떤 형태로든. 춘천마임축제는 앞으로 누가 하든 그 정신은 유지되었으면 좋겠어요. 25년 동안 고귀하게 지켜온 행사이고, 우리 민족이 지닌 축제 정신을 현대적인 공연 예술 축제로 되살린 것은 이 축제밖에 없어요. 이것만은 중단되거나 변질되면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반면 서울의 ‘한국마임’은, 솔직히 절반은 손을 놓은 상태예요. 자기네 울타리 안에만 있으면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수도 없이 얘길 했어요. 한 장르는 유지하겠지만 새로운 예술로 거듭나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자극도 주고 유도도 하겠지만, 스스로 변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변화는 어려울 겁니다. 이제는 더 이상 마임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누가 뭐라 해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분위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6호 2013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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