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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No.74] 문혜원, 그때 알지 못했던 것을 지금은 안다

글 |김영주 사진 |김호근 2009-11-09 6,300


언젠가 그녀가 가장 멋있을 때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공연을 끝낸 배우와 댄서들이 분장을 지우고 무대의상을 벗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시간, 보통 남보다 먼저 후다닥 씻고 옷을 갈아입는 문혜원은 복도에 서서 한 쪽 어깨에 기타를 메고 일행을 기다리는 날이 많단다. 에스메랄다의 흔적이라고는 길게 물결치는 검은 머리 밖에 남지 않은 그녀에게 지나가던 누군가가 한 곡을 청하면, 사양하는 법도 없이 악기를 잡고 시원시원하게 노래를 불러 주는데, 그 모습이 집시처럼 자유로워 보이더라는 이야기였다.

 

 

불 꺼진 복도에서 노래하는 그 모습 안에 어떤 이들에게는 수타시(SUTASI)에서 70만 달러의 우승 상금을 거머쥔 인디밴드 뷰렛의 리드 보컬이고, 누군가에게는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박해일이 훔쳐보던 밴드 소녀 인희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춤추는 집시 소녀인 그녀의 모든 면이 들어 있는 것 같아서, 현장에 있지도 않았으면서 눈으로 본 것처럼 오래 마음에 잔상이 남았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마지막 공연을 하루 앞두고 있고, 새 작품 <아킬라>의 연습이 바로 뒤에 있으니 마음이 복잡할 법도 한데, 비교적 이른 시간에 만난 문혜원은 씩씩하고 에너지 넘치는 모습이었다. 어떤 질문에도 막히는 데 없이 시원시원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녀였지만, 초연부터 함께 한 <노트르담 드 파리>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지금과 좀 달랐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인간적으로 많이 배웠어요. 정말로 많이. 이전까지는 제가 밴드만 했는데 그 일을 같이 하는 사람은 많아봐야 서너 명이잖아요. 그런데 뮤지컬을 하면서 20명, 30명, 그 이상으로 많은 분들과 정말 긴 시간을 함께 하다보니까 성격도 밝아지고 어른들을 대하는 법이랄까, 그런 면들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됐어요.”

 

록밴드의 보컬 문혜원이 지켜야 하는 것과 뮤지컬 배우로서 그녀가 가져야 하는 미덕은 좀 다르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전에는 저도 그런 혼란에 많이 빠졌어요. 밴드에서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노래를 불러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바로 ‘에스메랄다 같지 않아’라는 지적을 받게 되니까. 작은 클럽이나 야외에서 하는 페스티벌이 아니라 대극장에서 노래를 한다는 것도 처음이었고요. ‘인 이어’를 귀에 꽂고, 마이크를 차고 노래를 하면 노래하는 내 목소리가 너무 선명하게 모니터가 되는데 그것도 이상하고 낯설었어요. 내가 바꿔야 하나보다 싶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시도를 해봤어요. 정말이지 제가 제일 열심히 하는 배우는 절대 아니겠지만 저만큼 이런 저런 말도 안 되는 시도를 많이 한 배우는 없을 것 같아요. 길을 전혀 모르니까 차근차근 지혜롭게 가지 못한 거죠. 그런데 남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저 스스로 느끼기에는 그 헛짓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문혜원은 록과 뮤지컬이 전혀 다른 길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은 원래 A라는 장점 하나를 가지고 있었고, 록밴드에서는 그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노래를 할 수 있었는데, 뮤지컬을 하기 위해서는 B와 C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뮤지컬에서도 B와 C만 필요한 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는 A,B,C를 모두 갖기 위해 노력했고, 그 덕분에 뮤지컬을 할 때뿐만 아니라 거꾸로 록밴드에서 노래를 할 때도 더 자연스럽게 많은 것들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게 된 듯해요. 예전에는 ‘빨갛다’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 ‘붉다’, ‘불그스레하다’, ‘다홍빛이다’ 등등 여러 가지로 보여주는 법을 배우게 된 거죠. 신기한 게, 배우면 배울수록 더 자유로워져요.”


혼자 노는 법 밖에 몰랐고, 그렇게 쌓인 것들을 하드 록이나 메탈을 들으면서 간접적으로 폭발시켰던 사춘기 시절, <아가씨와 건달들>을 보고 한눈에 반해서 뮤지컬 배우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당시만 해도 뮤지컬 전공으로는 갈 수 있는 대학이 없었다. 연극영화과는 정말 요정처럼 예쁜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택한 곳이 서울예대 실용음악과였다. 쓰리 코드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하고 싶은 노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국내의 난다 긴다 하는 테크니션들이 모두 모여서 음악의 성을 쌓고 있는 대학에도 한 발 밖에 담그지 못했다. 그 후 창작뮤지컬 <황진이>의 오디션을 통해 타이틀롤을 차지하면서 뮤지컬계에 데뷔를 했지만 한동안은 경계에 걸쳐져 있다는 인상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뷰렛의 보컬 문혜원이 연기하는 거칠 것 없는 에스메랄다에 대해 관객들이 의심스러워 한 것에는 그 영향도 없지 않았다.


“내가 틀린 것 같았어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에스메랄다는 아름답고, 섹시하고 여성스러워야 하잖아요. 그래도 내가 내 것을 확신을 가지고 만들어나갔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럴 수 있을 만한 실력과 자신감을 제가 갖추지를 못했던 거예요. 연출님과 보컬 선생님이 저한테 공통적으로 ‘네 최고의 장점이자 단점은 남의 말을 잘 듣는 거야’라고 말씀을 하셨을 정도니까요. 에스메랄다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차차 알게 되니까 이제 귀가 덜 펄럭여요. 작품은 다 끝났는데, 이제야!”(웃음) 열린 자세를 유지하되 모든 사람의 말을 들어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으니,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는 분별력을 갖게 되었다는 말은 한 사람의 배우로서 두 발로 서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문혜원은 여자 배우에게 맡겨지는 역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성녀거나, 아니면 위험한 팜므파탈 밖에 없는 것이 아쉬워서 언젠가 진짜 사람으로서의 입체성을 가진 인물들에 대한 ‘여성 뮤지컬’의 곡을 쓰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그러고 보면 <대장금>에서도, <헤드윅>에서도 그녀는 좀 다른 여성 캐릭터를 연기했었다. 차기작 <아킬라>에서는 언어가 없는 부족의 여인 주로 캐스팅되었다. “<아킬라>는 굉장히 독특한 작품이에요. 문명은 발달했지만 사냥을 하는 부족이기 때문에 야성이 남아있는 인간들이 주인공이고요.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언어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사랑과 예술뿐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어요. 독백에 해당하는 노래에는 가사가 있지만 등장인물들이 소통을 할 때 쓸 수 있는 말은 ‘아킬라’라는 한 단어 밖에 없어요. 이 작품을 하면서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나쁜 말을 옮기는 건 말을 하는 게 너무 쉬워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언어보다 음악이 먼저 발생했다는 한 구절의 글귀에서 출발한 이 뮤지컬은 무대에 올려지기 전까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문혜원은 이번에도 몰랐던 것을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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