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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레드북> [No.161]

글 |전영지 공연 칼럼니스트 사진제공 |바이브매니지먼트 2017-02-14 5,046

여성주의와 대중성, 그 사이의 영리한 줄타기

<레드북>



“여기 마음의 자유가 시작한다… 왜냐하면 에프라 벤이 했기 때문에 이제 소녀들은 말할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에프라 벤(Aphra Behn, 1640?~1689)에 대해 쓴 문장이다. 글쓰기로 먹고산 최초의 여성으로 기억되는 에프라 벤, 그녀는 부유한 몇몇 남성들이 취미 삼아 연극을 하던 17세기 런던, ‘빵 때문에’ 글을 썼고 멋지게 성공했다. 그녀는 총 열여덟 편의 희곡을 썼는데, 이들 모두는 런던 극장에서 올라갔고, 그중 몇몇 작품은 놀랍도록 오래 공연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들 대다수는 ‘음탕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물론 이러한 비난의 한편에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벤의 작품이 특별히 여성의 목소리를 담았던 것은 아닌 듯하다. (수 엘렌 케이스, 김정호 옮김, 『여성주의와 연극』, 한신문화사, 1997).


<레드북>의 주인공 안나는 두 세기 정도 늦게 찾아온 에프라 벤처럼 보인다. 벤처럼 안나도 ‘음탕한’ 글을 써서 돈을 번다. 그러나 사실 돈은, 아니,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고 말했던 ‘자기만의 방과 돈’은 안나가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 모두 마련된다. 안나의 남자, 브라운이 돈을 가지고 찾아와 그녀가 글을 쓸 수 있는 방으로 (직접은 아니지만) 인도한 것이다. 안나는 오래도록 독자들의 평가보다 브라운의 인정을 원하고, 그녀에게 독자들의 목소리를 전해오는 것도 브라운이다. 브라운의 여자, 작가 안나를 어떻게 봐야 할지 자못 난감하다. 그녀는 몹시도 사랑스럽지만 (울프가 말한) ‘마음의 자유’는 주지 않는다. 하여, 안나에 대한 이런저런 마음을 나누며, 묻고자 한다. 당신에게 안나는 어떠했느냐고.



흔한 로코의 여주인공 VS. ‘나쁜’ 페미니스트                         


뮤지컬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엉뚱한 소설가 여인과 고지식한 변호사 청년의 새빨간 로맨틱 코미디”라고 소개된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딱 그러하다. 신사와 숙녀, 그리고 ‘나머지’가 사는 도시 런던에서 ‘나머지’로 살아가며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난 뭐지?’라고 묻던 안나에게 그녀가 예전에 모셨던 노부인 바이올렛의 손자 브라운이 할머니가 안나에게 남긴 유산을 가지고 찾아온다. 직업이 간절한 안나는 브라운의 타이피스트가 되겠다고 졸라대지만, 브라운은 안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라며 그녀를 서점으로 안내한다. 그곳에서 안나는 여성들의 문학회 ‘로렐라이 언덕’이 출판하는 잡지를 접하고, 이야기를 써보기로 한다. 3개월 후, 안나의 첫 소설을 실은 잡지 『레드북』이 출간되고,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그 사이 안나와 브라운은 여느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들처럼 티격태격 어근버근하다, 종국에는 입을 맞춘다. 이후, 안나를 성추행하려다 실패한 문학평론가 딕 존슨, 그러니까 ‘거시기 거시기’ 씨가 안나를 고소하면서 이 커플에게는 또 다른 역경이 찾아오지만, 이러한 서사에서 고난은 언제나 사랑이 성숙해지는 길이지 않던가? 그들은 예상처럼 잘 극복하고 서로를 더 사랑하게 된다. 뮤지컬은 이렇듯 돈은 없지만 사랑을 아는 여자와 돈은 있지만 사랑을 모르던 남자가 만나 사랑에 빠지는 기존의 로코 서사와 궤를 같이한다.


시시한가? 속단하긴 이르다. 안나는 다르다. 미혼 여성은 재산을 소유할 수 없고, 따라서 서둘러 결혼을 해야 하지만, 결혼 후 남편이 반복적으로 외도해도 이혼하지 못한 채, ‘변함없는 사랑’을 선고한 결혼 계약에 매달려 살아야만 하던 시대, 안나는 감히 사랑은 “마치 오늘의 날씨처럼 변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으로 비혼(非婚)을 유지하며 브라운과 관계 맺고, 때로는 자신에게 더 소중한 가치를 위해 관계를 위협할 선택을 하기도 한다. 고소당한 안나를 석방시킬 요량으로 브라운은 신경쇠약을 주장하자고 제안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글을 사랑해 준 독자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다고 반박한다. 그렇다. 그녀는 작가이다. 사랑하는 남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쓴다. 소녀의 얼굴을 쓰다듬던, 소녀의 등을 타고 흐르던 소년의 손에 대해, 둘이 입 맞추는 순간에 대해, 둘이 상상으로 떠난 모험에 대해 쓴다. 브라운이 안나의 글을 부정할 때, 그녀는 노래한다.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쓰는 것이 나쁜 것이라면 자신은 기꺼이 나쁜 여자로 살겠노라고. 그녀는 이렇듯 가부장제 사회가 강요하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저항하며, 자신만의 신념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여성이다. ‘페미니즘의 근본적인 이상’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당위에는 한참 부족할지 모르나, 자신의 페미니즘으로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즉 록산 게이가 ‘완벽하게 훌륭하지는 못하다’는 의미로 붙인 ‘나쁜’ 페미니스트라 할 수 있다. (록산 게이, 노지양 옮김,『나쁜 페미니스트』, 사이행성, 2016). 



지금 누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건가요?              


안나가 나빠서 나쁜 페미니스트인지, 부족해서 ‘나쁜’ 페미니스트인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는 그녀의 이야기, 그녀의 소설일 듯하다. 안나의 소설 「낡은 침대를 타고」는 안나와 그녀의 첫사랑 올빼미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극화한 것으로 소개된다. 안나가 브라운의 할머니 바이올렛에게 들려준 자신의 이야기에 있었던 정글 모티프가 소설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기에, 그리고 그녀가 아직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기에, 관객은 이 소개를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녀가 만약 과거의 남자와 있었던 일을 그저 그대로 복기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쩐지 좀 맥이 빠지는 일이다. ‘로렐라이 언덕’의 다른 여성들은 “낡은 펜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 억눌려온 욕망을 일으켜 […]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글을 쓰길 바란다고 노래하지 않는가. 슬플 때면 야한 상상을 한다는 안나에게 올빼미의 전사(前史)는 왜 필요한 것일까. ‘야한’ 이야기를 쓰는데 왜 꼭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파혼당한 경험이 필요한가? 이 발랄하고 당차고 솔직한 여성의 상상은 그녀를 더 ‘야한’ 이야기로, 더 먼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설마 안나가 추억 한 조각을 팔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첫 작품 이후 다시 펜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텍스트는 애매해도 공연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배우 유리아가 전하는 안나는 결단코 단 한순간도 과거의 어떤 때를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참으로 편히, 참으로 멋지게 노래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즐긴다. 게다가 안나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소설을 전하는 두 뮤지컬 넘버, ‘안나, 이야기를 들려주렴’과 ‘낡은 침대를 타고’는 근사하다. 신 나고, 위트 있고, 다채롭다. 이렇게 큰 맥락에서는 로코의 도식적인 전개를 그대로 따라가는 듯 보이는 줄거리 속에서도 유리아가 분한 안나는 공식을 훌쩍 뛰어넘는다.



황량한 사회를 넘어서는 엉성하고 다정한 이들의 유머       

 

유리아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가 열연한다. 열연을 관통하는 미학에는 유머가 있다. 많은 등장인물들이 남들과는 조금은 다르고, 또 조금씩은 부족하여 서로를 품고,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넘어선다. 이 엉성하고 다정한 인물들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들을 보고 있자니 역시 문제는 유머 없이 황량한 사회가 아닐까 싶다. <레드북> 또한 그러하다. 조금은 부족하다 할지 모르나, 이 뮤지컬은 분명 유머를 무기로 기존 로코 내러티브 공식에서 비켜서면서도 영리하게 기존의 로코물에 대한 기대 지평을 충족시킨다. 어쩌면 애석한 일이지만, 기존의 서사가 들려주지 않았던 목소리를 담아내는 이야기들은 이런 생존 전략들을 필요로 하곤 한다. 선명하지 않은 여성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없지 않았던 <레드북>을 너무도 즐겁게 보았음을 기억하며 생각한다. 에프라 벤이 살아남아, 지금 우리가 안나를 꿈꿀 수 있듯, 안나가 이렇게 살아남아,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소녀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안나가 일깨운, 사랑을 기대해보는 마음으로, 안나 다음에 올 소녀를 기다린다. 여기 평화보다 좋은, 기대에 찬 마음이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1호 2017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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