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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PERSONA] <라흐마니노프> 박유덕 [No.162]

글 |나윤정 사진제공 |HJ컬쳐 2017-03-15 4,240

라흐마니노프가 또 한 번 해냈습니다. 그는 1897년 교향곡 1번으로 혹평을 받은 이후 3년 동안 극심한 우울증을 겪으며 작곡을 하지 않았는데요. 마침내 그 아픔을 딛고 새로운 곡을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평론가들은 피아노 협주곡 2번이야말로 라흐마니노프의 진가가 최고조로 발현된 음악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는데요. 그럼 지금 막 피아노 협주곡 2번 초연 무대를 마치고 무대 뒤로 들어온 라흐마니노프와 인터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이 글은 라흐마니노프 역 배우 박유덕과의 대화를 토대로 작성한 가상 인터뷰이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교향곡 1번의 혹평을 들은 후 한동안 모습을 볼 수 없었는데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정말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옐레나 누나를 위해 완벽한 교향곡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정말 부푼 꿈을 갖고 있었는데…. 엄청난 혹평을 받고 상실감이 컸습니다. 그 후로 많은 생각을 했죠. 나는 왜 안 됐을까? 내가 이러려고 음악을 했나? 3년 동안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럼에도 역시 음악이란 끈은 놓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죠.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잖아요. 지금 이 시점에서 당신의 교향곡 1번을 스스로 평가해 볼 수 있을까요?
많은 것이 느껴지는 음악이에요. 웅장하면서도 포근하고, 음악가로서 저의 자신감을 가득 담았죠. 그런데 이젠 알 것 같아요. 조금 과했다는 것을요. 자신감만큼이나 자만심이 보이더라고요. 쯔베르프 선생님의 말이 맞았어요. 사람들에게 제가 이것, 저것 다 할 줄 안다는 걸 보여주려고, 기교를 너무 많이 부린 거죠. 그러다 보니 듣기에 어려운 음악이 된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쯔베르프 교수와는 애증의 관계이도 한데, 그는 당신에게 어떤 스승이었나요?
쯔베르프는 좋은 선생님이었어요. 이게 제 진심입니다. 물론 과거엔 서운하고 섭섭했던 순간이 많았어요. 차이콥스키 선생님에게 금메달을 받았을 때조차 쯔베르프 선생님은 저를 칭찬해 주지 않았거든요. 그땐 정말 깊은 실망을 느꼈어요. 나는 쯔베르프 선생님이 유일하게 인정한 제자인데, 왜 선생님은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틀에만 가두려고 할까? 하지만 이제 선생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초연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헌정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극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을 때 그가 내 방에 찾아왔어요. 처음엔 그저 스쳐 지나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방어벽을 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첫 만남부터 계속 그에게 말을 하게 되더라고요. 이런 제게 달 박사는 원래 사람들은 말을 하고 싶어 한다고 되받아치더라고요. 그 순간 이 사람은 좀 다르구나 싶었어요. 몇 마디만 대화를 해도 상대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잖아요. 그런 뒤 3개월 동안 함께 있으면서, 그는 제가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리게 해주었어요. 무엇보다 달 박사는 제 음악에 공감해 주었어요. 그로 인해 제 음악이 누군가에겐 어렵고 시끄러운 음악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메시지를 주고,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죠.


달 박사의 특히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나요?
편안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저는 달 박사가 굉장히 편했거든요. 다른 사람이라면 눈도 안 마주쳤을 텐데, 그와는 계속 눈을 맞추게 되더라고요. 그를 떠올리면, ‘벗’이란 말이 생각나요. 벗이 주는 느낌과 친구란 말이 주는 느낌이 다르잖아요. 그는 제게 친숙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진정한 벗이었어요.


달 박사가 종종 비올라 연주를 했다고 들었는데, 그땐 기분이 어땠어요?
정말 짜증났습니다. 덕분에 제 연주가 틀린 적도 많았거든요. 그땐 크게 소리치고 싶었어요. ‘너 때문에 내가 틀리잖아!’ 그러다 문득 피아노 연주를 하다 보면 틀리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상하게 그와 같이 연주를 하다 틀리니까 더 희열이 느껴지더라고요. 나나 당신이나 똑같은 사람이구나! 처음에는 그의 연주가 짜증났지만, 점점 그를 통해 제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달 박사는 옐레나 누나를 향한 당신의 마음도 발견하게 해주었죠?
사람은 기억의 동물이기도 하지만, 망각의 동물이기도 하잖아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는 지워버리죠. 제겐 누나가 그런 기억이었어요. 지금까지 제 마음속 깊은 방 하나에 옐레나 누나가 숨어 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달 박사가 제 손을 잡고 누나에 대한 기억을 들춰내며 그 방을 찾아갈 수 있게 해주었죠. 그것이 나쁜 기억이 아니라 소중한 추억임을 일깨워준 거죠.


3개월 동안 함께 지낸 달 박사를 떠나보낼 땐 꽤 서운했겠어요.
그가 영영 떠나는 건 아니었지만, 정이란 게 있으니 많이 아쉬웠죠. 한때는 톡톡거리며 싸우기도 했지만, 또 한때는 함께 식사도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거든요. 그 아쉬움을 새로운 음악으로 쓰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제가 달 박사 때문에 웃었으니 그도 내 음악을 듣고 웃었으면 좋겠더라고요.


지금 달 박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안 그래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완성한 후 편지를 보냈어요. 집에 와서 같이 비올라를 연주해 달라고요. (웃음) 달 박사, 늘 그렇듯 위트 있는 말과 행동으로 여러 사람에게 큰 힘을 줬으면 좋겠소. 항상 건강하고, 웃으면서 환자들과 주위 사람들을 대하시길. 모차르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시고, 비올라 연습도 많이 하시길 바라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으면서, 역시 당신에게 피아노는 특별한 존재란 생각이 들었어요.
피아노는 버리지 못하는 내 자신 같아요. 사실 교향곡 1번으로 상처를 받은 후, 한동안 피아노를 쳐다보지 않았어요. 피아노 뚜껑조차 열지 않았죠.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앉아야 할 곳은 피아노 앞이란 걸 알게 되었어요. 버려야 하는데 버릴 수 없는 나인 거죠. 내가 찾아야 할 라흐마니노프의 모습, 내가 버려야 할 라흐마니노프의 모습, 그 모든 게 제겐 피아노와 같아요.


마지막으로 오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초연한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이 곡의 멜로디를 들으면, 제 머릿속엔 가장 먼저 ‘눈’이 떠올라요. 초원 위에 따뜻한 눈발이 날리는 느낌이랄까요. 사실 이전의 음악들은 ‘내가 당신들께 음악을 들려줄게요’란 마음이 컸어요. 그런데 이 음악에선 생각을 바꾸었어요. ‘우리 함께 즐겨봅시다!’란 마음을 담았어요. 지금은 예전에 비해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거든요. 내 마음속 차가운 방에 있던 옐레나 누나도 따뜻한 방으로 옮겨주었죠. 청중들도 이 곡을 듣고 부디 따뜻한 겨울을 지내셨으면 합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2호 2017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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