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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ECIAL INTERVIEW] 동물원 김창기[NO.170]

글 |박병성 사진 |심주호 장소제공 | 보나르떼 플라워&카페 2017-11-28 4,684

동물원 김창기에게 직접 듣는 김광석

그리고 동물원


<그 여름 동물원>은 중년이 된 창기가 20대의 김광석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작품에서 창기는 극 중 사회자로 동물원이 결성되던 당시를 회상한다. 창기 캐릭터는 물론 동물원의 김창기이다. 작품은 동물원의 데뷔 앨범 중에서 김창기가 작사, 작곡하고 부른 ‘잊혀지는 것’을 첫 곡으로 선택했다. “사랑이라 말하며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 뜻 모를 아름다운 이야기로 속삭이던 우리…/ 그리움으로 잊혀지지 않던 모습/ 이제는 기억 속에 사라져가고/ 사랑의 아픔도 시간 속에 잊혀져/ 긴 침묵으로 잠들어가네” 데뷔 앨범에 있는 곡이지만 마치 먼저 떠난 김광석에게 보내는 노래인 양 가사에 몰입하게 한다. <그 여름 동물원>은 그들의 노래로 동물원이 결성되고 김광석이 탈퇴한 이후의 시간을 담담히 그려낸다. 중년이 된 실제 김창기에게 김광석과 그룹 동물원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았다.




동물원의 시작


동물원은 1988년 데뷔 앨범 「동물원 1집」을 발표해 큰 인기를 끈다. 지금 젊은이들에게 동물원은 낯선 그룹이겠지만 그들의 노래는 낯설지 않을 것이다. 김광석이 부른 ‘거리에서’, ‘말하지 못한 내사랑’, ‘잊혀지는 것’, ‘변해가네’ 등이 여전히 인기를 끌며 종종 매스컴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이 곡들은 1993년에 발표된 「김광석 다시 부르기」에 수록되어서 김광석의 노래로 아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노래들은 김광석이 동물원 멤버로 있을 당시 동물원 1집과 2집 앨범에 수록됐다. 동물원 앨범에서 김광석이 부른 곡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곡이 더 많다. ‘잊혀지는 것’은 김창기가 불렀고, ‘말하지 못한 내사랑’은 유준열과 김광석이 불렀으며, ‘변해가네’는 박기영이 노래했다.


동물원의 시작은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여름 동물원>에서는 창기와 광석이 중학교 동창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 김창기와 김광석이 만난 것은 대학생이 된 후였다. “(유)준열이랑 내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어느 날 준열이가 ‘너 기타 좀 친다며’ 말을 붙여 왔는데 그 친구가 훨씬 잘 치더라. 같이 기타 치고 작곡하고 공부하다가 대학에 들어갔다. 우리가 82학번이었는데 그때 경찬이도 알게 되었다. 대학교 1학년 때 고팅이라고 고고장을 빌려서 미팅을 하는데 까불까불하는 키 작은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노래를 하는데 너무 잘하는 거다. 그게 김광석이었다.” 김광석과 김창기는 그렇게 만났다.


김창기의 기억 속에 김광석의 첫인상은 ‘까불까불하는 키 작은 아이’였다. 우리가 기억하는 아니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김광석은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개인적으로 1996년 1천 회 콘서트에서 본 김광석은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어눌한 예술가였다. 그는 낯을 가렸고 부끄러움이 많았으며 인터넷을 막 시작해 재밌어하는 순수한 아이 같은 어른이었다. 그런 인상의 김광석에게 ‘까불까불하는 아이’는 어울리지 않았다. 또 하나 작품 속에서 그에 대한 인상과 다른 장면이 있다. 중학교 시절 김광석이 장난처럼 장래희망을 이야기한다. “오토바이를 하나 사겠다. 엄청 멋진 할리 데이비슨! 그거 타고 세계일주를 하고 싶다. 머리 빡빡 깎고, 금물도 들이고, 가죽바지 입고.” 이 대사는 김광석의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친구들과 늘상 하던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는 그 말에 더한 후반부도 있었다. “쭉쭉빵빵 금발을 태우고 달리면 좋겠다고 했다. 그럼 나는 넌 다리가 짧아서 안 된다고 하고, 그럼 광석이는 넌 머리에 맞는 헬멧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하고.” 그렇게 그들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날마다 몰려다녔고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이들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들이 음반을 내자는 제안을 해오기도 했다. 김광석을 제외한 나머지 친구들은 그 제안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산울림의 김창완이 이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김창기가 작곡한 ‘사랑의 썰물’(노래 임지훈)가 크게 인기를 끌면서 주목을 받은 것이다. “창완 형이 곡을 가져오라고 해서 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녹음하는 것처럼 데모 테이프를 만들었다. 준열네가 부자였다. 지방에 별장이 있었는데 거기 몰려가서 이박 삼 일인가 술 먹고 노래하면서 15곡이 담긴 데모 테이프를 만들었다. 가져갔더니 창완 형이 ‘이거 너희가 불러라’ 하는 거다. 우리는 노래에 자신이 없었으니까 ‘광석이만 부르죠’ 했는데, 같이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같이 부르게 됐다.” 처음에는 김창기, 김광석, 유준열, 박경찬 넷이 시작하다가 연주 팀이 필요해서 노찾사에서 건반을 치던 박기영과 고대 응원단에서 최형규, 이성우가 합류했다. “금요일 저녁마다 모여서 창완 형이랑 녹음을 해서 8트랙짜리 음반을 만들었다. 내려고 했는데 창완 형이 대중적인 곡이 필요하다고 하는 거다. 그래서 내가 마이너 발라드로 만든 곡이 ‘거리에서’이다.” 「동물원 1집」에서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은 ‘거리에서’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뮤지컬에는 동물원이라는 그룹 이름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등장한다. 극 중에서는 경찬이가 ‘이대생을 위한 발라드’를 팀 이름으로 제안한다. 이 말도 안 되는 이름을 실제 제안한 것은 김창완이었다. “이대생에게만 팔아도 1천 장은 팔겠다며 장난삼아 제안한 것이다. 정글짐에 올라가서 그룹 이름을 뭘로 할까 고민하다가 내 노래 중에 ‘동물원’(「동물원 2집」에 수록)이 있는데 내용이 회색분자들의 이야기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아닐까 싶어 제안을 했고 투표로 결정했다.” 동물원이라는 그룹 이름에 체제 반항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알게 됐다. 동물원이 데뷔한 1988년은 6월 항쟁 이후여서 여전히 사회 참여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그러한 시대에 동물원의 노래는 운동권 노래의 엄숙주의에서 벗어났으면서도 최루적인 낭만이 아닌 순수하고 투명한 감성의 곡들을 선보였다. 동물원의 노래에서 체제 반항적인 색채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는데 의외였다.





만남 그리고 헤어짐


김광석은 동물원 2집까지만 참여하고 솔로로 전향한다. 작품 속에서 김광석이 탈퇴하는 이유는 멤버 간의 음악에 대한 생각 차이였다. 김광석은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하고 싶었지만 다른 멤버들은 그럴 생각이 별로 없었다. 실제 동물원과 김광석이 헤어진 이유도 같았다. “1집이 (1988년) 1월에 나왔는데 2집이 8월에 나왔다. 그동안 써놓은 곡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나는 인턴 생활로 접어들었고, 경찬이는 취직하고 준열이는 대학원 가면서 바빠져서 한 템포 쉬어 가야 했다. 그런데 광석이는 전문적으로 가수 활동을 하고 싶었던 거다.” 동물원이 큰 인기를 누렸고 지금까지도 곡들이 사랑을 받는데 왜 가수 생활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해봤자 밥벌이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기가 많아서 놀라기도 했고 그것에 취해 가수 놀이도 해봤다. 2집이 인기가 있었지만 1집만큼 안 되니까 안 될 거다 싶었다. 광석이는 생각이 달랐다. 그러면 사람들이 알 때 나가는 게 좋을 거라고 했고, 그러자 광석이가 ‘나가면 곡을 써줘’ 하면서 헤어졌다.” 팀은 헤어졌지만 이들은 여전히 서로를 응원하고 종종 만나는 좋은 친구로 남았다.


김광석은 동물원을 나가서 1집을 내지만 생각처럼 큰 반응을 얻지 못해 힘든 시기를 보낸다. 작품 속에는 방황하는 김광석을 지켜주는 여인이 등장한다. 지금의 부인이 아닌 미지의 여인이다. 그녀가 실존 인물인지 물었더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부인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가 다시 부각되는 시점이라 미지의 여인과 부인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다. 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묻는 것도 대답하는 것도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1996년 1월 6일 천 회 공연을 마친 김광석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난다. <그 여름 동물원>도 떠나간 김광석을 그리워하는 동물원 멤버들의 추억을 컨셉으로 한다. “광석이가 지금은 잘나간 것 같지만 굉장히 힘들었다. 「김광석 다시 부르기」 정도가 히트를 쳤지, 다른 음반은 판매 성적이 좋지 않았다. 천 회 콘서트를 해서 잘된 것 같은데 비용 아끼려고 밴드도 안 쓰고 고생을 많이 했다. 「동물원 6집」을 내고 ‘널 사랑하겠어’가 대박이 나니까, 괜히 나왔다고 다시 들어가면 안 되겠냐고 하더라. ‘들어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한 달 만에 그 일이 생겼다.” 그것이 김창기가 기억하는 김광석의 마지막이다. 김광석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의 노래를 즐겨 듣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았던 이들에게도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젊은 날을 함께했던 김창기에게도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큰 상처로 남아 있다.



남겨진 이들에게 그는 김창기는 ‘널 사랑하겠어’가 담긴 「동물원 6집」(1995)을 발표하고 김광석을 떠나 보낸 후 동물원을 나온다. 동물원을 떠난 것이 김광석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했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가 첫 개인 앨범으로 발표한 「하강의 미학」(2000)에는 ‘나에게 남겨진 너의 의미’가 수록되어 있다. 김광석이 떠나고 4년이 지난 후 김창기는 그의 부재를 이기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신을 직시하며 “난 단지 날 가끔 원했던 대로 봐주던 널/ 잃었다는 것이 안타까웠을 뿐인걸/ 또 나의 삶은 아주 말끔히 포장되고/ 우리의 추억은 멀어지고/ 모두 제 갈 길을 떠나고/ 아침 출근길에 문득 너의 노래를 들으며/ 아주 짧은 순간 호흡이 멈춰질 듯하지만/ 난 단지 날 가끔 원했던 대로 봐주던 널/ 잃었다는 것이 안타까웠을 뿐인걸”이라고 노래한다.


그리고 한동안 그는 노래를 떠나 많은 환자들의 의사로, 한 아내의 남편으로, 딸의 아버지로 삶에 충실한다. 그렇게 13년이 흐른 뒤 두 번째 단독 앨범 「내 머리 속의 가시」(2013)를 발표한다. “내가 노래를 만드는 동기는 처음에는 현실 회피였다. 그것이 예전에는 사랑이었다면 이제는 현실의 문제들이고, 삶의 부조리함이고 무의미함이다. 내 머리에 남아 있는 불편함을 가시로 표현한 것이다. 그중 하나가 광석이다.”


스무살 무렵 늘상 몰려다니며 노래하고 술 마시던 그들은 밴드를 결성해 활동하다 몇몇은 남고 몇몇은 떠났다. 떠난 몇몇이나 남은 몇몇도 각자 가정을 꾸리고 각자의 삶에 충실히 살아간다. 중년이 되어서는 밴드가 아닌 조기축구회 ‘아티스트 유나이티드’에서 종종 모이다가 이제는 두세 달에 한 번씩 만나는 관계가 되었다. 김창기는 소아정신과 전문의로 살아가며 틈나는 대로 노래를 만들고 부르며 두 달에 한 번씩은 병원 지하에 있는 소극장 창기네에서 공연을 올린다. 곡을 쓰지 않고 생활에 집중했을 때도, 노래와 생활을 병행하는 지금도 바쁘고 나름 행복한 생활이었다. 그럼에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의 부재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불편함이고 뽑히지 않은 가시로 남아 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그린 <그 여름 동물원>을 보며 좀 더 발랄하고 스케일이 큰 곡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뒤늦은 아쉬움이 들었다고 한다. 덧붙여 든 생각은 이랬다. “그래도 노래를 만들기를 잘했구나, 우리 친구들이 같이했던 순간은 축복이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9호 2017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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