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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LONDON] <체스> [No.177]

글 |남윤호 배우 사진제공 |Brinkhoff/Moegenburg 2018-06-27 5,207

 

64개 정사각형 안의 전쟁

<체스>  Chess

 



무대에서 펼쳐지는 세기의 체스 대결 

매달 어떤 작품을 소개하고,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공연 리뷰를 쓰려면 이왕이면 좋은 작품을 보고 잘 써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작품을 고르고 관람하기까지는 적잖이 개인적인 선택이 반영되는데, 이번 달에는 의미 있는 극장과 전설적인 배우, 30년 만의 웨스트엔드 리바이벌이라는 이유로 <체스>를 골랐다. 사실 <체스>란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땐 좀 의아했다. 체스를 주제로 한 뮤지컬이라니. 나도 어렸을 적 체스를 해본 적은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는 스포츠는 아니지 않은가. 엄밀히 말하자면 체스는 마인드 스포츠라고 한다. 체스의 정의를 먼저 설명하자면, 체스는 두 명의 플레이어가 64개 흑백의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체스보드에서 상대방의 킹을 잡기 위해 말을 움직여 나아가는 게임이다. 서기 6세기 이전 인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인도 게임인 차투랑가에서 발전한 것이 체스라는 설이 있다. 체스가 유럽에 당도한 것은 스페인이 영토 확장을 위해 정복에 나섰던 9세기경이라고 한다. 스페인에서 각 말들의 역할이 정해진 것은 15세기 말경으로 19세기에 이르러 게임의 룰이 평준화되었다. 
 

한국에 라이선스 공연으로 소개된 바 있는 <체스>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에비타>의 팀 라이스가 작사를 맡고 스웨덴의 전설적인 그룹 ABBA의 비요른 울바에우스와 베니 앤더슨이 작곡한 작품이다. 스토리는 미국과 러시아(작품 배경이 소비에트 연방 시대이기 때문에 공연에서도 소비에트 연방으로 통칭되지만, 현 시점을 반영해서 러시아라 표기한다)의 냉전 시대에 미국의 체스 그랜드 마스터와 러시아의 체스 그랜드 마스터가 체스 토너먼트를 벌인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체스 경기 자체를 주된 요소로 다루지만, 그 안에는 로맨스가 많은 부분 자리 잡고 있고 냉전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정치적 체제에 관한 이야기도 약간 다룬다. 두 주인공 아나톨리 세르기예프스키와 프레디 트럼퍼는 특정 인물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다고 알려졌지만, 아나톨리는 러시아의 그랜드 마스터였던 빅토르 코르치노이와 아나톨리 코르포브의 이야기를, 프레디는 미국의 그랜드 마스터였던 바비 피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일부분은 1972년 아이슬란드에서 열린 세계 체스 챔피언십에서 ‘세기의 대결’이라고 불린 미국의 바비 피셔와 러시아의 보리스 스파스키의 경기를 내포하고 있다. 사담이지만, 이 세기의 대결을 다룬 토비 맥과이어와 리브 슈라이버 주연의 <세기의 매치>라는 영화도 있으니 찾아보시길.
 

<체스>는 팀 라이스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나 <에비타>가 그러했듯이, <체스> 또한 1984년 컨셉 앨범이 개막에 앞서 먼저 발매됐다. 그러곤 2년 뒤인 1986년 웨스트엔드에서 첫 공연을 올려 약 3년간 공연된다. 1988년엔 브로드웨이에서 미국 버전으로 첫선을 보이는데, 아쉽게도 두 달밖에 공연되지 않는다. 아마 런던 공연과 많이 다른 새 버전으로 공연이 올라간 탓도 있겠지만, 그 당시 여전히 냉전 체제에 놓여 있던 미국으로서는 냉전 자체를 풍자하는 작품이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로 여러 차례 영국 버전과 미국 버전을 적절히 섞어 공연을 올리려는 시도들이 있었는데, 제대로 공연이 계획되고 올라간 것은 이번 2018년 웨스트엔드 리바이벌 프로덕션이 처음이다. 수많은 공연들이 끊임없이 올라가는 웨스트엔드에 초연 이후 30여 년 만에 리바이벌되는 공연이라니 그렇다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ENO 또는 런던 콜리세움

<체스>를 관람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내 눈길을 끌었던 것 중 또 하나는 바로 극장이었다. 혹자에겐 그저 하나의 건물일 수 있고, 심지어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웨스트엔드나 브로드웨이의 극장들은 극장 자체가 예술품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각각의 역사와 특징이 뚜렷하다. 웨스트엔드에 자리 잡고 있는 ENO 또는 런던 콜리세움이라 불리는 <체스>의 극장은 일종의 영국 국립 오페라하우스로 볼 수 있다. 코벤트 가든에 위치한 로열 오페라하우스와는 다른 극장으로, 영국 국립 오페라단과 영국 국립 발레단이 상주 단체로서 주요 공연을 담당하는데 오페라뿐만 아니라 발레, 뮤지컬, 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들이 올라간다. 콜리세움은 처음 지어질 때부터 런던 내에서 가장 크고 럭셔리한 가족형 버라이어티 극장을 목적으로 해 1904년 12월 24일 문을 열었을 때의 정식 명칭은 런던 콜리세움 버라이어티 극장이었다. 당시만 해도 유럽에서 최초로 관객들을 위한 엘리베이터가 있는 극장이었다. 또한 2,359석의 객석을 보유하고 있는 런던 콜리세움은 런던에서 가장 큰 극장이자 전 좌석에서 무대의 전면을 시야 방해 없이 볼 수 있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디자인을 맡은 건축가 프랭크 매첨이 짓고자 했던 ‘대중의 엔터테인먼트를 위한 궁전’은 인테리어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무대 양옆 천장 쪽엔 객석을 바라보고 있는 전차들과 사자 조각상들이 있고, 건물 밖 지붕에는 5톤짜리 지구본을 형상화한 조각상이 돌아가고 있다. 극장에 처음 들어서는 순간 다른 극장들과는 다르게 따뜻하게 반겨주는 느낌이 드는데, 로열 오페라하우스의 웅장함이나 다른 웨스트엔드 극장의 역사적인 고풍스러움, 예스러움과는 다른 느낌의 따뜻함이었다. 웨스트엔드의 유서 깊은 극장들은 대부분 천장이 높고 폭은 그리 넓지 않은 느낌이지만, 콜리세움은 옆으로도 꽤나 넓어 탁 트인 느낌을 주는 동시에 무대가 객석에서 아주 가까운 느낌을 주어서 그런지 공연을 보는 내내 꽤나 높은 몰입감을 주었다. 만약 런던에서 공연을 볼 기회가 생긴다면 콜리세움에서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 생각한다. 트래펄가 광장과 내셔널 갤러리에서도 가까우니 이곳에서 공연을 보면 하루를 문화의 날로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새롭게 만난 <체스>

<체스>라는 공연을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현 시점에 맞게 연출하려고 했다는 인상이 강하게 다가왔다. 무대는 마치 체스보드가 바람에 흩어지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고(이 세트는 공연이 진행되면 영상이 나오는 화면으로도 활용된다) 무대 바닥 또한 체스보드를 연상시키는 정사각형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게 무대의 특징 중 하나로, 2층에는 오케스트라가 자리 잡고 있다. 배우들은 1층의 빈 무대에서 몇 가지의 가구 같은 대도구들과 영상을 활용한 뒷배경을 배경 삼아 연기하는데, 가장 중요한 장면인 체스 시합은 주로 무대 앞쪽에서 이루어진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점 중의 하나는 영상 사용이었다. 공연은 아비터(결정권자 또는 심판의 역할)의 ‘체스의 이야기’라는 노래로 시작된다. 이때 영상은 애니메이션으로 체스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리고 프레디 트럼퍼가 메라노 공항에 도착할 때는 비행기의 착륙을 영상으로 화면 전면에 비추어 준다. 비행기가 무대 한쪽에 착륙을 하면 마치 프레디가 비행기에서 내리듯이 계단을 영상에 맞춰서 배치한 점이 영상 활용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뒷배경 이외에도 무대 위에는 카메라가 3대 정도 위치하여 배우들을 찍은 모습이 화면에 라이브로 나온다. 이런 모습은 특히 프레디가 기자회견을 할 때나 비행기에서 내려서 기자들과 시민들의 환영을 받을 때 효과를 톡톡히 발한다. 하지만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는 모든 장면을 거의 빠짐없이 영상으로 찍어서 화면을 통해 보여주다 보니 가끔 노래와 배우의 감정에 100퍼센트 몰입하기 힘들다는 아쉬움도 있었다. 그리고 인물들 간의 관계도 현재를 생각하면 진부한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서양의 시선으로 무대화된 방콕은 왜곡된 면이 있어 불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시간 45분 정도 되는 이 극을 힘 있게 끌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역시나 두 주인공 아나톨리와 프레디를 연기한 마이클 볼과 팀 하워 덕분일 것이다. 마이클 볼의 묵직함과 단단한 연기력 위에, 팀 하워의 록적인 음색과 다채로운 연기력이 더해져 두 주인공의 부딪힘과 깊이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두 배우는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에서 워낙 내공이 있는, 가히 레전드라고 불러야 마땅할 배우들이기에 이 둘을 무대 위에서 보고 이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마이클 볼은 웨스트엔드 <레 미제라블>의 초연 프로덕션에서 마리우스 역으로 데뷔한 이후 <오페라의 유령>, <헤어스프레이>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해 온 영국 뮤지컬계의 전설이라 할 수 있고, 팀 하워는 록 뮤지컬 <렌트>에서 주인공 로저와 <락 오브 에이지>에서 스테이시 잭스로 출연했을 뿐 아니라 밴드에서 리드 보컬로 활동하고 있는 배우다. 두 사람의 출연작만 합쳐도 한 페이지를 훌쩍 넘길 정도이니, 두 배우의 이력에 대해서는 두말하면 입이 아플 뿐이다. 두 배우의 군더더기 없는 연기와 단단한 노래는 공연 중간에 기립 박수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대단했다. 또 한 명 눈길을 끌었던 배우는 아나톨리의 부인 스베틀라나 역을 연기한 알렉산드라 버크였다. 싱어송라이터이자 배우로서 활동 중인 그녀는 영국 오디션 프로그램인 <더 엑스팩터> 시즌5의 우승자이기도 하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무대에서 자기 몫을 톡톡히 해냈고, 노래 실력 또한 공연의 한 축을 담당해 줬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났다. 물론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영상의 과도한 사용이 가끔 공연을 콘서트로 탈바꿈시키는 경우를 빼고는 꽉 찬 2시간 45분이었다.



 

팀 라이스와 해리 브룬예스의 2분짜리 인터뷰

다음은 <체스> 프로그램에 실린 작사가 팀 라이스의 인터뷰 일부이다. 이 인터뷰는 팀 라이스의 대학 친구이자 현재 영국 국립 오페라단의 체어맨인 해리 브룬예스가 진행한 것이다. <체스>를 처음부터 기획하고 만든 팀 라이스의 인터뷰이기에 짧게나마 공유해 보려 한다.

 

<체스>라는 공연의 아이디어가 언제쯤 구체화되었나요?

1981년에 처음으로 비요른과 베니와 <체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전체적인 녹음은 1984년에 마쳤죠. 앨범은 국제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I Know Him So Well(난 그를 너무 잘 알아)’과 ‘One Night in Bangkok(방콕에서의 하룻밤)’이라는 두 히트 싱글이 포함되어 있었죠.
 

이 작품에 영감을 준 건 무엇이었나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냉전과 관련된 뮤지컬을 만들고 싶었어요. 쿠바 미사일 위기를 아이디어로 얘기를 나눴지만 결국 실현되지 못했죠. 그런 뒤에 냉전의 이야기를 오래도록 지속된 미국과 소비에트의 체스 라이벌 관계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이야기하기로 결정했죠. 저는 1972년에 있었던 바비 피셔와 보리스 스파스키의 ‘세기의 대결’에 큰 흥미가 있었어요. 
 

<체스>가 런던에서 언제 오픈을 했죠?

1986년에 프린스 에드워드 극장에서요. 트레버 넌이 연출을 하고 일레인 페이지, 토미 쾨르베리 그리고 머레이 헤드가 출연했죠. 



프로그램에는 이후도 몇 가지의 질문들이 더 실려 있지만, 그건 생략하기로 하겠다. 이렇게 오랜 기간 고민과 노력을 거쳐 탄생한 작품인 만큼 관객으로서도 그 의미가 컸던 것 같다. 이제는 지나간 과거, 그것도 우리에겐 멀게 느껴지는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접한 것이지만, 결국 이 작품이 나에게 했던 말은 체제에서 자유롭고 싶었던 남자와 실력을 믿고 오만했던 남자가 자신들을 찾아가는 이야기였고, 그 뒤에 깔려 있던 정치적인 이야기들 또한 지금 현시대와 크게 동떨어지지 않은 이야기였기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쉬움은 조금 남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볼만한 공연이었다. 만약 공연을 직접 볼 수 없다면 우리가 흔히 아는 ABBA의 스타일이 아닌 조금은 다른 ABBA의 음악을 경험할 수 있게 인터넷에 ‘체스’라는 검색어로 노래를 찾아보길 권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7호 2018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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