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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CULTURE IN MUSICAL] <킹아더>, 영원의 왕국 [No.186]

글 |김영주 공연 칼럼니스트 2019-03-14 4,922

<킹아더>, 영원의 왕국 

 

 

아서 왕과 그의 용맹한 기사들, 아름다운 레이디와 강력한 마법사에 대한 로맨틱한 이야기는 중세 이후 서양 문명을 떠받치는 기둥 중 하나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지중해 연안에서 비롯되어 르네상스를 지배하였다면 아서 왕과 아발론의 전설은 멀리 북유럽을 뿌리로 두고 중세의 어둠 속에 핀 꽃이었다. 전 세계가 서구 문명의 지배권 아래에 들어가면서 인류 공동의 기억이 된 이 전설은 5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우리가 어린 시절 믿었던 것과 달리 가상의 인물인 아서 왕의 실제 모델이 누구인지,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인지에 대해 천 년 넘게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내용은 이 전설이 서로마 제국이 힘을 잃으면서 브리타니아에 대한 지배력까지 약화된 후 그 전까지 로마인들과 동화되어 살아왔던 켈트족의 일상을 이민족인 앵글로색슨족이 위협하던 시절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외부의 침략에 맞서 강력한 반격을 성공시켰던 실존 켈트족 영웅들의 이름 몇몇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아서 왕 자체를 실존 인물로 주장할 수 있을 만큼 뚜렷한 관련성을 가진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정설이다.

 

구전되어 온 전승 문학이 모두 그렇듯이 아서 왕의 전설도 5세기 이후로 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풍부해졌다. 예를 들어 프랑스 출신의 기사 랜슬롯(랑슬로 뒤 라크)과 귀네비어 왕비의 로맨스는 12세기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추가된 것이다. 명백히 영국을 배경으로 한 중세 기사도 문학이 프랑스에서도 심심찮게 영화화된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 뮤지컬 <아서 왕의 전설>의 존재도 그 연장선상에 있으리라. 다양한 판본이 존재하고 캐릭터의 관계와 에피소드 역시 제각각인데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9세기 미국의 엄숙한 청교도 토머스 불핀치가 정리한 버전이다.



 

왕위 계승자이지만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아버지의 전우인 기사들의 보호 아래 은둔하며 자란 아서가 명검 엑스칼리버를 바위에서 뽑아들면서 왕권을 인정받는 것으로 전설은 시작된다. 외적들로부터 힘없는 백성들을 지키면서 영웅이 된 아서 왕은 가장 아름다운 레이디 귀네비어를 왕비로 맞이하고 뛰어난 기사들을 휘하에 거느리게 된다. 왕국의 수도 카멜롯의 기사들은 출신 신분이나 지위 고하와 관계없이 원탁에 둘러앉아 평등한 발언권을 보장받았고 명예를 생명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믿고 약자를 보호하는 기사도 정신의 전범이 된다. 하지만 성배를 찾기 위한 모험은 원탁의 기사들을 브리튼 밖으로 흩어놓았고 설상가상으로 왕비 귀네비어와 기사 랜슬론의 로맨틱하고 불명예스러운 불륜 사건이 발각된다. 모든 영광은 내부로부터 무너지는 법이다. 랜슬롯은 재판정에 선 귀네비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왕의 기사로서 맹세했던 수많은 명예를 저버린 대신 그 후 천년 동안 음유 시인과 귀부인들의 흠모를 받게 되지만 아서는 사랑하는 왕비와 가장 신뢰하던 기사를 모두 잃게 된다.

 

랜슬롯이 귀네비어 왕비를 구하기 위해 동료 기사 가웨인의 두 동생을 죽인 일로 원탁의 기사들은 분열하게 되고 그 틈을 타 아서 왕의 아들이자 조카인 모드레드가 반역을 일으킨다. 비극적인 최후의 결전 끝에 치명상을 입은 아서 왕은 부하를 시켜 엑스칼리버를 호수에 던진 후 세 여왕이 이끄는 작은 배를 타고 아발론으로 떠난다. 언젠가 브리튼이 치명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예언과 함께 아서 왕의 전설은 마무리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대중문화 속 아서 왕의 전설도 불핀치 버전을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예민한 독자라면 기독교도 왕 아서가 황금 드래곤이 그려진 투구를 썼다는 것(성 조지의 전설에서 알 수 있듯이 드래곤은 고대 종교의 상징이다)과 그의 가장 유명한 총신이 마법사라는 것에 위화감을 느낄 것이다. 이는 아서 왕 전설이 북유럽 신화의 영향을 받은 브리튼 고대 전승 내용에 로마인들이 가져온 기독교 신앙이 뒤섞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 문제를 의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서 왕과 멀린의 대척점에 있는 마녀 모르간이 불러일으키는 착시 효과 때문이다.

 

멀린에 대적할 만한 강력한 마법사 모르간은 아서 왕의 이부 누이이며 동생과의 사이에 반역자가 되는 아들 모드레드를 낳았다. 아서 왕 평생의 숙적이었으나 죽음이 임박한 아서를 아발론으로 데려간 세 명의 여왕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가장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캐릭터 모르간은 기독교 전파 이전 켈트족의 정신을 지배했던 고대 종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특히 부각된다. 헬렌 미렌과 핼레나 본햄 카터, 에바 그린이 연기한 이 흥미로운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로는 매리언 짐머 브래들리의 『아발론의 안개』 가 있다.

 

켈트족의 영웅으로서 난폭한 외부의 침입자 앵글로색슨에 맞서 싸웠던 아서 왕이 결국 앵글로색슨이 지배하게 된 브리튼 전체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한 과정은 흥미롭다. 이는 원주민인 켈트족을 험준한 산악 지대로 몰아내고 브리튼을 차지한 앵글로색슨족 역시 약탈의 결과물을 누리기도 전에 대륙에서 건너온 이민족들의 침략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아서 왕과 그 기사들의 전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맞서 싸웠던 자들의 후손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는 영웅담이 된 것이다.

 

이렇듯 전설은 현실의 조건들을 뛰어넘어 인간들이 오늘날의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아서 왕의 왕조는 자신의 대에 무너졌고 카멜롯의 궁정도 원탁이 있던 홀도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이야기는 천 년이 지나고 그 천 년의 반을 다시 거듭하는 동안 오로지 풍성해지기만 했다. 비어즐리의 그림으로, 바그너의 오페라로, 몬티 파이튼의 뮤지컬로, 존 부어만의 영화로,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미래의 예술가가 될 아이들을 사로잡을 생애 첫 영웅담으로 매분 매초 다시 태어나고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6호 2019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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