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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PECIAL] 브로드웨이의 한국인들 [No.188]

글 |여지현 뉴욕 통신원 2019-05-31 5,555

브로드웨이의 한국인들 

 

국가와 국적의 전통적인 의미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는 21세기 오늘. 놀랍게도 K팝이 빌보드 차트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처럼 K뮤지컬도 브로드웨이에 화려하게 입성할 수 있을까. 새로운 기회를 찾아 더 넓고 큰 곳 브로드웨이로 떠난 한국인들, 낯선 땅에서 작은 기적을 만들어가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최근 몇 년 사이 브로드웨이와 오프브로드웨이에서 한국인 혹은 한국계 미국인들의 활약이 자주, 그리고 많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특별한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미국 공연계가 지금까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유색 인종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과 무대 위에서 대표성(Representation)의 정치적인 의미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던 것이 조금씩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 뮤지컬 시장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 점과 방탄소년단을 중심으로 K팝이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것도 분명히 영향이 있을 것이다. 물론, 반세기 전부터 많은 한국인과 한국계 배우, 창작자, 제작자 들이 브로드웨이에 그들의 흔적을 꾸준히 남겼던 것도 상황의 변화에 도움을 줬을 것이다. 


 

브로드웨이에 한국적 흔적을 만든 배우들

미국에서 활동한 한국인 배우들의 아버지격인 사람은 오순택 배우다. 전남 목포 출신인 그는 1959년 대학교 졸업 이후 미국으로 건너와 UCLA에서 극작과 연기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이민 이후 내내 서부에 살면서 TV 프로그램 위주로 활동했기 때문에브로드웨이의 베테랑이라고 보긴 힘들지만, 1976년 스티븐 손드하임의 <태평양 서곡>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프로덕션에 출연한 경력이 있다. 무엇보다 작년에 별세한 그가 1.5세 한국계 미국인 배우이자 작가로서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미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아시아계 미국인 극단인 ‘East West Players’의 창립 멤버로 미국 내 아시아계 배우들과 창작진들의 권익을 위해 오랫동안 힘쓴 것이다. 그를 비롯한 1세대 한국 배우들의 이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브로드웨이가 미국 내 소수 민족과 유색인종에게 문을 열어주기까지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 모른다.

오순택 배우 이후에도 많은 한국계 미국인 배우들이 브로드웨이에서 사랑받았는데, 현재 한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마이클 리 역시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던 한국계 배우 중의 한 명이다. <미스 사이공>과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서 앙상블로 활약했던 그는 2004년 일본 연출가 미야모토 아몬이 연출한 <태평양 서곡> 브로드웨이 공연에서 카야마라는 꽤 비중 있는 인물을 맡은 바 있다. 2015년에는 한국 스케줄로 바쁜 틈에도 <앨리지언스>에 출연하며 브로드웨이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 외에도 <민걸스>에서 레지나 조지의 친한 친구 중 한 명인 그레첸을 맡고 있는 애슐리 박이나 <왕과 나>의 왕비 역을 맡아 토니어워즈 여우조연상을 받은 루시 앤 마일스, <그라운드호그 데이>를 비롯해 여러 작품에서 앙상블로 자주 눈에 들어오는 레이먼드 J. 리 등 10년 전과 비교하면 훨씬 다양한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 반가운 얼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한국계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이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브로드웨이에서 배우로 활동한다는 것은 꽤나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1996년 최주희 배우나 김태원 배우가 브로드웨이에 올라간 <왕과 나>에서 각각 텁팀과 왕비로 출연한 바 있지만, 그들의 브로드웨이 경력은 아쉽게도 이어지지 못했다. 물론 당시에는 <왕과 나>를 제외하면 동양인 배우가 할 수 있는 작품이 없기도 했다. 때문에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인기리에 공연 중인 <프롬>에 앙상블로 출연하고 있는 황주민 배우나 <왕과 나>의 브로드웨이 공연에 이어 투어 공연에서 텁팀을 맡고 있는 임규진 배우의 활동은 눈여겨볼 만하다.



 

활동 영역을 넓혀가는 한국 창작자들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오순택 배우 다음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1917년 미국에서 태어나 1940년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브로드웨이에서 의상디자이너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윌라 김(한국 이름 김원라)이다. 1959년, 전설적인 배우 에델 머먼이 출연한 <집시>의 초연 의상을 담당했고 이후 뮤지컬뿐 아니라 연극, 무용,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했다. 특히 그는 창의적이면서도 실용적인 무대 의상을 만들어 여러 차례 토니상을 받았을 만큼 미국 주류 공연계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1995년 줄리 앤드루스가 출연했던 <빅터/빅토리아>를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작품 활동을 한 이력은 없지만, 언론 기사에 따르면 지난 2016년 99세의 나이로 별세하기 3년 전인 2013년에도 디자인 작업을 했을 정도로 창작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던 인물로 회고된다.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인물로는 예일대학교 예술학 석사 과정을 거쳐 브로드웨이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 캐나다 출생의 의상디자이너 린다 조가 있다. 그는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편>으로 2014년 토니어워즈에서 최우수 의상상을 받았는데, 이후에도 <아나스타샤>를 통해 토니어워즈와 드라마 데스크상 후보에 오르며 디자이너로서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린다 조를 제외하면 브로드웨이에서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고 있는 한국계 재원은 없지만, 미국에서 인정받는 예일대학교나 카네기멜론대학교의 연극학 예술 석사 과정을 거쳐 지역 극장과 오프브로드웨이에서 경력을 쌓고 있는 작가와 디자이너들이 꽤 있다. 오프브로드웨이 연극 크리에이티브 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장지윤 조명디자이너나 최근 링컨 센터 버전의 <왕과 나>와 <남태평양>의 투어 공연에 참여한 김주현 무대디자이너가 그 좋은 예이다. 또한 오프브로드웨이의 퍼블릭 시어터에 최근 연극 <와일드 구스 드림즈>를 올린 정한솔 작가도 앞으로 눈여겨보아야 할 유망주 중 하나이다. 

뮤지컬 쪽으로는 지난 5~10년간 뉴욕대학교의 뮤지컬 프로그램 석사 과정이나 BMI 인스티튜트에서 뮤지컬 작곡과 작사 과정을 수료한 한국인들이 굉장히 많아졌다. 올해 초 퍼블릭 시어터의 부속인 ‘조스 펍’에서 이들이 함께 작업한 노래로 콘서트를 진행했는데, 꽤 성공적인 반응을 얻어 가까운 미래에 그들의 작업을 좀 더 자주 볼 수 있길 기대해 봐도 좋을 듯하다. 물론 브로드웨이에서 한국인, 그리고 한국계 사람들에게 좀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목소리와 모습에 열려 있도록 제도 자체가 개선돼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로, 기회를 주는 쪽인 극장이나 프로덕션, 캐스팅 회사에서 일하는 한국인들(과 유색인종)이 더 늘어나 시스템의 구조가 달라지는 것도 이러한 변화에 중요한 퍼즐의 조각이 될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8호 2019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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