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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인터뷰] <철학 콘서트-필로소피Feelosophy> 강신주, 철학자의 꿈 [No.116]

글 |배경희 사진 |양광수 2013-06-01 4,369

현재 인문 출판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저자로 꼽히는 철학박사 강신주. 공대 출신 철학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그는 철학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공대생이 왜 철학을 하게 됐냐고 묻지 마세요. 그냥 그 당시에 그게 좋았던 거예요.” 2003년 첫 저서『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을 발표한 후 지금까지 24권(공저 7권)의 철학서를 내는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철학을 강단에서 해방시킨 현장 철학자로 불리는 그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건, 2011년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와 MBC 라디오 ‘색다른 상담소’에 출연하면서부터다. 하루에 2~3건의 현장 강의를 소화할 정도로 끊임없이 대중과 소통해 오고 있는 그가 이번엔 현악 4중주가 함께하는 철학 콘서트 <필로소피>를 준비했다. 철학콘서트는 총 네 개의 테마로 올 연말까지 시리즈로 공연된다.     

 

 

음악과 함께하는 철학 콘서트는 신선한 컨셉이다.
내가 기획한 건 아니고, 기획사에서 제안한 거다. 인문학자로서 당연히 음악에 대한 관심이 있으니 흔쾌히 참여했다. 음악을 들으면서 감정이 격앙되고 눈물을 흘렸던 사람이 타인을 헤칠 수 있을까? 못 헤친다. 하이든을 듣는다는 건, 하이든이라는 사람을 읽는 거다. 그런 연습이 돼있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헤칠 수 있겠나. 우리가 잔인해지는 이유는 타인의 고통을 못 느껴서다. 누군가를 목 졸라 죽이려면, 그 사람의 고통이 안 느껴져야 하니까. 사람들이 음악을 많이 들었으면 좋겠다. 음악을 듣고 감정의 변화만 생기면 사회가 굉장히 좋아질 거다.       

 

음악이 위로가 됐던 경험을 해봤나?
대학교 때 처음 들었던 라흐마니노프. 예전엔 학교에 클래식 감상실이 있었다. 클래식 감상실의 특징은 어둡고 소파가 편하다는 거다. 그땐 체류탄 맞고, 수영장 가서 샤워하고, 감상실에서 자는 게 일이었다. 80년대 운동 세대니까. 하루는 자다가 중간에 눈이 떠졌는데, 그때 나온 게 라흐마니노프다. 좋았다. 처음으로 수첩에 곡을 적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음악을 많이 들었는데, 내 성숙도에 따라서 좋아하는 것도 달라진다.  

 

요즘엔 어떤 노래를 듣나?
최근 몇몇 출판사하고 단절했다. 그러니까 슈베르트 후기 곡들이 잘 들린다. 900번대 피아노 소나타들. (웃음) 시집은 기형도 읽는다. 지금은 우울한 강신주인 거다. 우울하면 우울한 노래를 많이 들어야 힘이 난다. 슈베르트는 나보다 더 힘들었네, 이러면서. 사람들이 나는 누구일까, 그런 고민을 많이 하지 않나.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보면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곧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얘기해 주니까. 그러니까 슈베르트 들어야 해, 브루크너 들어야 해, 이런 거 없다. 내가 안 좋으면 안 들으면 된다. 하지만 이 수많은 음악가들 중에 분명 내가 좀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작곡가, 음악을 찾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에게 음악을 들으라고 하면 어떻게 들어야 하냐고 반문할 거다. 무언가를 느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다.
그 ‘어떻게’가 문제다. 그냥 들으면 되는데 느껴야 한다고 오버를 한다. 감정을 고양시켜주는 음악을 반감정적으로 듣는다는 게 아이러니하지 않나. 검열 체계나 선입견이 없는 어린 아이들은 음악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다. 느껴야한다는 게 지적인 판단이거든. 느끼는 것과 느껴야한다는 건 다르다. 슈베르트의 옹알이를 듣겠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 눈높이에서 들으면 된다. 위대한 슈베르트의 음악을 느껴보겠다, 이런 마음 말고. 슈베르트가 뭐가 위대하나, 매독 걸려 죽었는데. (웃음) 

 

편안 마음으로 즐기면 된다는 게 참 쉬워 보이는데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허영. 자기 삶에 당당하면 타인의 시선이 무슨 상관인가. 느끼는 척한다는 건 그 사람이 약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예술은 강한 정신, 즉 순수함과 솔직함을 요구한다. 클래식 연주회에서 졸면서 끝까지 버티는 사람들 있지 않나. 난 차라리 자는 정직함을 행사하는 게 낫다고 본다. 이 공연은 나하고 안 맞으니 다른 공연 봐야지, 이렇게 말이다. 감정까지 포장하면 어떡하나. 감정 문제에서 솔직하지 못하면 예수나 부처가 와도 구원이 안 된다.

 

언제부턴가 철학이 학문을 위한 학문처럼 여겨졌다. 강신주 강의을 들으면 철학이 내 삶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게 강신주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엔 대학 내에서도 철학은 어려워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어떤 교수들은 철학은 어렵기 때문에 앞자리에서 졸지 않고 깨어있는 다섯 명만 데리고 강의를 했다. 그게 싫었다. 십년 전 처음 강의할 때부터 모든 아이들이 다 깨어있어야 했다. 자는 애들이 있으면 분필을 던지고 욕을 해서라도 깨웠다.

 

이론적인 이야기로 사람의 감정을 흔든다는 게 어려운 일 아닌가.
모든 걸 다 건드려야 하다. 그래서 강의할 때 욕을 할 때도 있다. 욕을 하면 사람들이 불쾌해하니까. 불쾌한 감정이 드는 것도 굉장히 소중한 거다. 그냥 멍하게 있다가 강의가 끝나면 안 된다. 왜 강의 중에 욕을 하냐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 그런 댓글을 보면 기분이 좋다. 그건 곧 이 사람이 흔들렸다는 얘기니까. 시간이 지나고 감정이 가라앉으면 무언가 남는 게 있을 거다.

 

사람들의 반응엔 별로 신경 쓰지 않나?
사람들이 내가 한 말에 대해 욕을 하면, ‘욕하네’ 그러고 만다. 난 유명해지거나 ‘무엇’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난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게 철학자의 역할이다. 최근엔 아무리 잔인하게 이야기해도 상처준 적은 없다. 사람 마음을 좀 더 잘 읽게 됐나보다. 옛날에는 상처주는 경우도 있었다. “당신이 뭘 안다 그래” 상대가 이렇게 화낼 때도 있었다. 그럴 땐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그랬다. 내가 아무리 좋은 뜻에서 한 이야기라도 상대가 그렇게 못 느꼈다면 그건 미안해야 하는 거다.

 

멘토나 힐링팔이를 경멸하는데…
멘토를 자청하는 사람들은 다 사기꾼이다. 나는 너의 고통을 다 안다? 웃기는 소리다. 책 많이 팔아서 자기만 힐링이 된다. 난 내 이야기를 할 뿐이지 가르치려고 안 한다. 내 이야기를 듣고 받아들이는 건 그 사람의 몫이다. 그래서 매 강의 끝에 이야기하는 게, 나를 선생이 아닌 강신주로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거다.

 

어쨌든 어떤 의미에선 강신주는 또 다른 멘토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게 자의든 타의든.
그게 이상하다. 나를 멘토로 생각하고 강의를 들으러 오면 나한테 욕 듣는다. 내가 해주는 건 네 고민이 별 거 아니라고 말해주는 거다. 사람들은 뭔가 고민이 있으면, 억지로 어렵게 만들고 그걸 고민하는 척한다. 깡통 차듯이 발로 한번 차기만 하면 되는데, 깡통 안에 콘크리트가 들어있을까 하는 쓸데없는 고민만 한다. 차봐야 안에 콘크리트가 있어서 발이 아플지 아니면 빈 깡통이라 휙 날아갈지 알거 아닌가. 깡통을 차보지 않고서는 죽었다 깨나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른다. 찰래요, 차봐요. 그런데 못차거든. 그럼 그날 배워가는 거다. 나 더럽게 비겁한 사람이다. 내가 해주는 건 거기까지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6호 2013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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