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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인터뷰] <라오지앙후 최막심> 남경읍, 바람 따라 흐르는 꿈 [No.116]

글 |나윤정 사진 |심주호 2013-06-01 4,550

때론 한 사람이 지닌 물건 하나가 그를 대신 설명하기도 한다. 남경읍과의 만남 후 유독 잊히지 않은 물건은 시종일관 그가 들고 있던 손때 묻은 대본이었다. 그는 인터뷰 장소에 도착할 때부터 대본을 손에 꼭 쥐고 있었고, 촬영 중 빈틈의 시간에도 쉼 없이 대본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그의 책 『쟁이』에서 본 인상적인 구절 하나가 떠올랐다. “대한민국에서 연기 제일 잘하는 사람 나오라면 나갈 수 없지만, 제일 열심히 하는 사람 나오라면 바로 나라고 나설 자신이 있다.” 대사마다 깨알 같은 메모가 적힌 그의 너덜너덜한 대본에는 ‘제일 열심히 노력하는 배우’ 남경읍의 모습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원작으로 한 연극 <라오지망후 최막심>의 주역을 맡으셨어요. 자유의 대명사 조르바와 남경읍은 참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 생각되는데, 처음 작품 제의를 받고 기분이 어땠나요?
『그리스인 조르바』를 번안한 작품이라니, 당연히 욕심이 났어요. 워낙 좋은 작품인데다 세계적인 배우 앤서니 퀸이 조르바를 연기했으니까요. 작품 제의가 들어왔을 때 두말없이 하려고 했죠. 당시 50부작 드라마를 앞두고 있었지만 이를 포기하고 <라오지망후 최막심>을 선택했어요. 이 작품이 더 좋을 것 같았거든요. 무엇보다 저와 최막심이라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들이 여러 가지로 비슷한 점이 많더라고요. 제가 최막심처럼 살고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와 참 잘 맞는 배역이란 생각이 들었죠.

 

특히 최막심의 어떤 면이 잘 맞는 것 같다고 느끼세요?
여자 문제 말고는 다 맞는 거 같아요.(웃음) 최막심은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에요. 인간이 만들어 놓은 도덕률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딘가에 속박되려 하지 않죠. 나 역시 그래요. 예전에 약 10년간 관단체에 소속된 적이 있었어요. 시립가무단과 서울예술단에 각기 5년 정도씩 있었는데, 그때 뛰쳐나온 이유가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어요. 지인들도 농담처럼 남경읍은 아웃사이더라는 말을 자주 해요. 남경읍은 제도권 안에서 작품을 하지 않는다고. 작품의 흥행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스스로 선택해왔거든요. 그리고 예전부터 이런 꿈도 꿨어요. 고물차 하나를 구입해서 악기를 실고 여기저기 시장을 떠돌아다니면서 노래하며 살고 싶다고.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최막심의 예술적인 기질뿐 아니라 항상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정신들이 저와 많이 비슷해요.

 

원작 자체에 타성에 젖은 현대인들의 정신을 일깨우는 조르바의 명대사들이 많은데, 최막심을 연기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무엇이었나요?
최막심은 아직 탯줄이 잘리지 않은 원초적인 상태의 인물이에요. 마치 대지에서 그대로 태어난 것 같죠. 그래서 머리보다 가슴으로 느끼는 직관적인 능력이 뛰어나요. 그런 그가 또 다른 주인공인 김이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은 대가리뿐이지 가슴이 없어! 당신 가슴은 뭐라고 얘기합디까? 당신은 주절거리지만 당신 눈도, 당신 몸도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아!” 생각만 하며 살지 말고 가슴으로 느끼라는 거죠. 내 느낌대로 사는 것도 하나의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고 이야기 하는 부분이 좋아요. 또 김이문은 햄릿 같고, 최막심은 돈키호테 같은 인물이에요. 근데 대본을 깊이 들여다보면 최막심 안에 두 인물이 다 있어요. 행동주의자인 최막심도 사유를 많이 하고, 자연의 원리를 깨닫고 싶어 해요. “저 별들이 하는 말을, 돌과 비와 꽃들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수… 언제면 우리가 팔을 벌리고 별과 돌, 비와 꽃, 사람들, 만물을 안을 수 있을까요?” 이처럼 인간의 관점이 아닌 우주의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최막심의 생각들도 참 좋아요. 저 역시 비슷한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공감이 가죠.

 

우주의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어린 시절, 선생님과 선배님들이 “자연과 친해져라”는 말씀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자연을 많이 관찰했죠. 왜 가을산이 아름다울까? 왜 태양계에서 태양만 스스로 빛나는 별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해보았죠. 예를 들어 곱창을 먹을 때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이런 생각을 해요. 곱창이 다른 고기들과 다르게 유별나게 맛있는 이유가 뭘까? 아, 곱창에는 융털돌기가 있구나! 그 안에 곱들이 쌓여서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맛을 내는거죠. 그렇다면 이 융털돌기는 무엇일까? 다시 생각을 이어가요. 어떻게 보면 융털돌기는 사람의 우여곡절 같아요. 사람이 잘 나갈 때는 행동이 붕 떠있고, 못 나갈 때는 피폐해지잖아요. 융털돌기처럼 우여곡절이 많은 사람일수록 인생이 더 맛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배우도 마찬가지에요. 항상 스타로 굴림 하는 사람보다 숱하게 많은 경험을 한 배우가 연기의 맛도 더 깊겠죠. 이렇듯 곱창 하나를 먹으면서도 작은 개똥철학을 깨달아요.

 

양정웅 연출은 세계 고전에 한국적인 색채를 입히는데 탁월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그와의 작업은 어떤가요?
양정웅 연출은 굉장히 똑똑하고 감각적이에요. 자기 나름대로의 미장센이 머릿속에 확실하게 있어요.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카리스마도 대단하고요. 그와 처음 작업하는 것인데, 배우를 상당히 믿어주는 좋은 연출인 것 같아요. 학생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잠재력을 끄집어내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은 선생이듯, 배우가 무대에서 마음껏 놀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는 것이 훌륭한 연출가잖아요. 양정웅 연출은 그걸 하는 사람이에요.

 

 

“배우에게 관객이 존재의 의미”라고 말할 만큼 관객에 대한 애정이 남다릅니다. 이번 무대를 통해 관객들이 가장 크게 얻어 갔으면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작품의 에필로그에서 최막심이 김이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은 뭐 모자랄 데가 없는 사람인데, 딱 한 가지가 모자라요. 뭔 줄 아슈? 바보짓!” 이 ‘바보짓’이 원작에서는 광기(madness)라고 표현돼요. 광기는 다시 말하면 열정이잖아요. 열정을 지니고 살아야 세상 모든 것이 좋아질 수 있어요. 우리는 스스로를 얽매는 규범 때문에 쉽게 일탈을 하지 못해요. 하지만 베토벤이나 고흐가 일탈을 하지 않았다면, 멋진 예술 작품이 탄생하지 못했겠죠. 관객들도 이 작품을 보면서 생각할 거예요. 최막심처럼 사는 것이 맞는 걸까? 규범을 버리고 감각적으로 사는 것이 맞는 걸까? 하지만 김이문처럼 두려워하겠죠. 저 역시 고민하고 있어요. 지금 이 시대에 어떤 방법으로 살아야 할지. 그 답은 바로 열정이자 일탈에서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가장 최근에 광기나 열정을 느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주로 작품 연습을 할 때 광기를 느끼죠. 올 연말이나 내년쯤 남경읍 모노 뮤지컬을 만들 계획이에요. 40여 년간 배우로 활동하며 느낀 점, 30여 년간 선생님으로서 학생을 가르치며 깨달은 점, 50여 년간 인간 남경읍으로 살며 생각했던 것들을 정리해서 작품에 담고 싶어요. 공연의 형식을 고민하다 보니 제가 무대에서 직접 악기를 연주하면서 이야기하면 좋겠더라고요. 그래서 최근에 악기를 배우려고 하루에 열 시간도 넘게 음악실에 앉아 있었어요. 그런 저를 보고 집사람과 제자들이 미쳤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어떤 모노 뮤지컬이 탄생될지 기대됩니다. 특히 인간 남경읍으로서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고 싶은 건 열정과 끈기에요. 모든 이야기가 이 두 가지로 축약 돼요. 사람에게 열정과 끈기가 없으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다소 진부하고 딱딱한 이야기들을 재밌게 풀어내고 싶어요. 예를 들면 베토벤이 운명 교향곡을 만든 일화를 들려드리는 거죠. 베토벤이 인간의 심연을 건드릴 수 있는 교향곡을 만들고 싶어 고심하고 있을 때, 집주인이 월세를 받으려고 그의 문을 ‘똑똑똑’ 두드려요. 베토벤은 그 소리를 듣고 주제 선율을 떠올리고, 열정적으로 악상을 써내려갔죠.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토벤은 영감을 대작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어요. 천재와 평범한 사람은 바로 집중하는 시간에서 차이가 나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들려드리고 싶어요.

 

열정과 끈기, 이 두 가지 진리는 배우이자 스승인 남경읍의 오랜 깨달음과도 일치합니다. 
지금까지 배우 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건 하나예요. 열정과 끈기, 그거 하나밖에 없어요. 예전에 학교 다닐 땐 연기에 관한 책이 스타니슬랍스키의 『배우 수업』과 한재수 선생의『신 배우술』밖에 없었어요. 세상에 연기 책이 이 두 권인 줄 알고 열심히 익혔죠. 그런데 마흔 중반에 다시 대학에 들어가니 연기에 대한 책이 백 권도 넘더라고요. 다 찾아서 읽었죠. 근데 너무 어렵더라고요. 배우들이 이걸 다 읽어야 연기를 잘하나 고민도 됐죠. 그러다 자연스러운 연기가 뭘까 생각을 해봤어요. 자연의 섭리처럼 하면 되지 않을까. 산의 모습이나 물의 흐름처럼 연기를 하면 자연스럽겠구나. 근데 또 그걸 깨닫는 게 더 어렵더라고요. 결론적으로 열정과 끈기로 해나가는 방법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됐죠. 배우가 힘든 만큼 관객은 즐겁고, 배우가 흘린 땀방울의 숫자만큼 관객은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늘 되새겨야 해요.

 

먼훗날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요?
조금 나이가 들면 서울 근교에 조그마한 땅을 구입해서 뮤지컬 마을을 만들고 싶어요. 상업적인 곳이 아니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편한 공간이죠. 제자나 동료들이 서울에서 공연하다가 힘들 때 그냥 내려와서 쉴 수 있는 곳을 꾸리고 싶어요. 올 때 소주 한 병만 가져오면 되고, 안주는 내가 키운 상추로 대신하고요.(웃음) 한잔 마시면서 지나온 이야기, 나한테 연기를 배우면서 맞았던 이야기 등을 하면서 푹 쉬다 올라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야외무대도 작게 만들어서 실컷 놀고 노래할 수 있는 장을 펼치려고요. 이게 바로 라오지앙후(떠돌이)죠. 제가 항상 꿈꿔 왔던 거예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6호 2013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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