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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PARTNERS] 민경수 조명디자이너 서숙진 무대디자이너 [No.128]

글 | 배경희 사진 | 김호근 2014-05-30 7,031
파트너라는 이름으로 

“하도 오랫동안 같이해서 첫 작품이 뭐였는지 기억이 안나요. 그런데 사실은 첫 작업이 뭐였는지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늘 함께해 왔으니까.”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온 자신의 파트너 서숙진 무대디자이너에 대해 민경수 조명디자이너는 이렇게 말했다.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해 와서 오히려 매 작품을 특별하게 기억할 게 없는 사이, 두 디자이너의 작업 이야기를 들어봤다.

 



함께 걸어온 뮤지컬 부흥기 

두 분의 경력을 따져봐서는, 아마 수십 년 전에 첫 작업을 함께하지 않았을까 짐작됩니다. 어떤 작품으로 처음 만나셨는지 기억하세요?              
민경수    그게 기억이 안 나요. (웃음) 안 그래도 인터뷰에서 그 질문을 할 것 같아서 여기 오는 길에 계속 생각해 봤단 말이죠. 그런데 도통 생각이 안 나요. 우리가 97년에 처음 만났던가? 그럼 같이 작업한 지 벌써 17년이나 된 거네? 첫 작업이 기억 안 날만 하지. (웃음)  내가 기억하기로는 94년 즈음 우리나라 뮤지컬계가 슬슬 활기를 띠기 시작했어요. 97년부터 뮤지컬의 부흥기가 서서히 시작됐고, 그 시점에 서숙진 씨가 ‘짠’하고 나타났죠. 이태리에서 공부하고 온 해외파! 나는 순수 ‘된장’이었고, 그땐 이미 경력이 상당했죠. 85년, 스무 살에 무대 조명을 시작했으니까. 가만, 우리 첫 작품은 오페라였던 것 같은데? 왜냐면 서숙진 씨가 이태리에서 수학하고 왔기 때문에 활동 초반에는 오페라를 주로 했어요. 당시에 뮤지컬은 뉴욕에서 공부하고 온 이태섭 디자이너가 많이 했고.
서숙진    맞아, 첫 작품은 오페라였을 거예요. 무대 디자인 시작 3년 동안은 거의 오페라를 했고, 뮤지컬은 그 뒤에 하게 됐어요. 우리가 같이한 첫 뮤지컬은 토월극장(현 CJ토월극장)에서 공연한 <사운드 오브 뮤직>일 거예요(첫 작품이 <사운드 오브 뮤직>이 맞다, 아니다로 한참 동안 논쟁이 계속됐다). ‘<사운드 오브 뮤직>’ 하면, 첫 스태프 회의에서 연출님이 무대감독을 통해서 의견을 전달하셨던 게 아직도 기억나요. 연출님이 제게 직접 말씀을 안 했어요, 한자리에 앉아있는데! 그땐 여자 스태프가 무시당하던 시기였죠.
민경수    정확히 말하면, 무시한 게 아니라, ‘여자가 이 일을 왜 해?’ 하고 아예 인정을 안 하던 시절이었지. 당대의 무대미술가 신선희 선생님도 너무 힘들다고 얘기할 때였으니까. 그리고 당시에는 서숙진 씨처럼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디자이너가 많지 않았어요. 저도 세종문화회관 소속 디자이너였고. 이건 여담이지만, (사이)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니까 얘기할 수 있겠죠. 종종 하고 싶은 외부 작업이 있으면 휴가를 내고 그걸 했는데, 그때는 인터넷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안 됐죠.

말씀을 듣고 보니, 당시 해외파 여자 디자이너의 등장은 꽤 화제였을 것 같아요.                       
민경수    화제는 아니었지만(웃음), 서숙진 씨한테 관대하긴 했죠. 스태프를 선택할 때 해외파에게 우선권이 많이 주어졌거든. 난 그게 불만이었고. 왜냐면 그것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대극장 데뷔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대에 뛰어들면,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보여주기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다음 기회를 잃게 돼요. 서숙진 씨는 경험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대극장 공연을 맡았지만, 미학적인 계산이 굉장히 잘 돼있었다고. 그리고 그때는 디테일이 없던 시절이라 도면 작업을 하는 디자이너가 많지 않았어요. 서숙진 씨는 도면도 잘 그렸으니까, 사람들 눈에 띌 수밖에 없었죠. 아, 그리고 그땐 이 친구가 예뻤어. 얼굴은 예뻤는데, 조금 시크했어. (일동 웃음) 
서숙진    으하하, 내가?
민경수    응, 약간의 시크함이 있었지. 제가 B형 성격이라서 시크한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해요. 그런데 아까도 말했다시피 그때는 여자 스태프가 거의 없었거든요. 몇 명 있는 여자 스태프를 홍일점이라고 하긴 했는데, 솔직히 그분들은 여자라고 하기 좀 뭣한(웃음), 상당히 와일드한 분들이었단 말이죠. 그런 가운데 천생 고명딸 캐릭터 서숙진 씨가 나타났으니, 얼마나 예뻤겠어요. 개인적으론 서숙진 씨가 세 살 터울의 제 막내 동생하고 동갑이어서 더 예뻐 보였어요.
서숙진    진짜 그랬어? 오! 해외에서 공부하고 왔지만, ‘나 유학파야, 잘났어’ 이러지 않았어요. 어디 가나 항상 90도로 인사하고.(웃음) 민 감독님께도 제가 한국 실정을 잘 모르니까 많이 도와달라고, 처음부터 바짝 굽히고 들어갔어요. 그때 제가 민 감독님을 얼마나 열심히 쫓아다녔는데요. 조금이라도 더 배우겠다고. 그래서 미운털이 덜 박혔던 것 같아요.
경력 차가 많이 나는 선후배가 파트너로 만나면, 아무래도 부딪치는 점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서숙진    제가 그때 진짜 천방지축이었어요. 저하고 감독님이 뭘로 처음 싸운 줄 아세요? 어렸을 때는 욕심이 많아서 모든 배튼(무대 장치나 세트 장치를 고정해놓는 봉)에 세트를 다 걸어놨어요. 그랬더니 감독님이 “세트를 비추려면 나한테 배튼을 좀 줘야 해”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막 우겼죠. “자, 이거 명칭 보세요. 세트 배튼이잖아요? 세트 배튼에 왜 조명을 걸어요?” 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꿀밤 한 대 맞을 일이죠. (웃음)
민경수    어이가 없었지. 조명은 조명 배튼에 걸어야지, 왜 세트 배튼에 거냐고 그러니까.  (일동 웃음) 처음엔 우리가 배튼을 같이 써야 한다고 설득하다가, 나중에는 포기했어요. 그것 때문에 몇 번 싸웠어. 그런데 싸우는 건 지금도 여전해요. 그 후로 굉장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아’ 하면 ‘어’ 할 정도가 됐지만, 여전히 많이 싸우죠. 평소엔 오빠 동생 사이로 지내다가, 작업에 들어가면 감독님과 서자이너가 되는데, 아, 우리끼리는 서 디자이너라 안 그러고, 그냥 서자이너라고 불러요, 편하게. 감독님과 서자이너로 만나면 서로 치열해져요. 사정없이 싸우고 나서 작품이 끝나면 한동안 얼굴을 안 봤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가 서로 싫어하는 줄 아는 사람들도 있어요. 지난번엔 어떤 연출가가 이번 작품 무대디자이너로 서숙진 감독을 쓰려고 하는데, 괜찮겠냐고 묻더라고. (웃음)  
서숙진    (속삭이며) 애증의 관계죠, 애증의 관계.



평소 치열하게 다투며 작업하신다는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여쭤볼게요. (웃음) 지금까지 가장 불꽃이 튀었던 건 어떤 작품이었을까요?    
민경수 
   서숙진 씨가 눈물이 무지하게 많아요. 작업 중 예민해지는 시기에는 뭔 이야기만 하면 울어요. 그럼 나는 그 다음부터 찍소리도 못해요. 그런데 <프랑켄슈타인>(2014) 작업하면서는, 서숙진 씨가 울면 제가 막 쏘아붙였어요. “너 또 우냐. 왜 우냐. 나는 못 우는 줄 아냐” 그러면서. (일동 웃음) 지금 생각해봐도 <프랑켄슈타인>은 둘이 상당히 불꽃 튀며 작업했어요.
서숙진    (에피소드가 생각나는 듯) 하하하. 민 감독님께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는 점은 제가 조명이 잘 빠지기 힘든 디자인을 했어요. 어떤 각도에서 조명을 비추어도 세트에 빛이 다 걸리는 그런 무대였죠. 그래서 애초에 감독님께 양해를 구하고 작업에 들어갔지만, 그걸 이해해 주기가 쉽지 않으셨을 거예요. 감독님께 정말 감사해요.
민경수    가끔 보면 무대디자이너들이 에고이스트적인 작품 세계를 고집할 때가 있어요. 물론 무대디자이너가 나무만 본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조명디자이너가 세트에 조명을 비춰서 무대를 완성하는 최종 메이크업자이다보니 좀 더 숲을 보는 경향이 있어요. 이번에는 서숙진 씨가 이야기했지만, 조명에 대한 배려가 좀 부족했어요. 그런데 <프랑켄슈타인>은 장면 전환이 정말 많아서 서숙진 씨가 많이 힘들긴 했을 거예요. 신이 서른아홉 장면이나 됐으니까. 초연 창작뮤지컬이다 보니 작업 막바지까지 상황이 계속 바뀌고, 고생이 많았죠.

고통의 끝에 탄생한 작품이 또 있을 것 같은데요?                                                                       
민경수    <대장금>(2007) 초연 때는, 모든 스태프들이 그랬어요, 대장에 금이 간다고. 하도 힘들어서. (웃음) 브로드웨이 스타일의 대형 창작뮤지컬을 만들겠다는 거창한 포부로 시작된 프로젝트가 <대장금>이어서 압박감이 심했죠. 지금의 수염 캐릭터가 생긴 것도 <대장금> 때예요. 이 수염의 배경에 대해 말하려면, 우리 집사람 얘기를 좀 해야 해요. 집사람이 공연 쪽하고 관련이 없는 일반인이어서, 이 일의 작업 프로세스를 잘 몰라요. 그런데 제가 예민해지는 시기에 집사람하고 부딪치게 되면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작업에 들어가면 첫 공연 때까지 면도를 안 해서 수염을 기르는 걸로 신호를 줬죠. ‘아, 이 사람이 날카로운 시기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게. <대장금>은 정식 공연 전에 일주일 간 트라이아웃 공연을 했거든요. 수염이 덥수룩해졌죠. 그런데 몇몇이 수염 기른 모습이 괜찮대요. 그래서 지금까지 쭉 기르고 있어요.(웃음)
서숙진    우리도 민 감독님이 수염을 기르기 시작하면, ‘아, 감독님 또 힘들다고 표현하기 시작하신다’ 하고 잘 안 건드렸어요. (웃음) 제 기억에도 <대장금>이 쉬운 작품은 아니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첫 대형 창작뮤지컬이었기 때문에, 그때의 압박감은 정말……. 그래도 나는 <프랑켄슈타인>이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항상 최근작이 가장 힘들게 느껴져요. (웃음)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은 무대디자이너와 조명디자이너가 고생한 보람이 있는 작품일 것 같아요. 창작뮤지컬로는 최고의 비주얼을 보여준 작품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결과물에 만족하세요?
민경수
    <프랑켄슈타인> 비주얼은 서숙진 씨의 공이 크죠. 어떤 장면의 정서는 굉장히 리얼하고, 어떤 장면의 정서는 굉장히 추상적이었는데, 그럼에도 각 장면에서 허점이 드러나지 않는 구도가 만들어졌으니까. 여기 조명 비추길 잘했네, 하는 생각이 들게끔 해준 세트였고. 무슨 말이냐면, 디자이너가 제작소하고 커뮤니케이션을 많이 안 하면, 세트가 디자인 의도대로 잘 안 나와요. 그럼 세트도, 조명도 애초의 방향에서 조금씩 틀어지는 거죠. 비단 <프랑켄슈타인> 때만이 아니라, 서숙진 씨는 제작소를 열심히 쫓아다니는 디자이너예요. 예상 밖의 세트가 나오더라도 현장에서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그게 프로의 기본이라 장점이라고 하긴 뭐해도, 그것도 안 하는 사람이 많아요. 음, 우리의 장점이라면, 우린 겉멋이 안 들었어요. 수수해. 회의하러 가서 구석진 자리를 줘도 군말 없이 거기 앉아서 회의 하고. (일동 웃음)






같은 곳을 바라보며

이건 내가 봐도 시너지 효과가 좋았다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세요?                     
서숙진    <컨페션>(2006)! 소극장 공연이어서 무빙 라이트를 하나도 못 썼는데, 그럼에도 조명이 정말 예뻤어요.
민경수    나는 <살인마 잭>(2009)의 앙코르 공연 <잭 더 리퍼>(2012)가 좋았던 것 같아요. 제 오랜 습관 중에 하나가, 작품이 올라가면 ‘여기까지만’ 하는 마음으로 일주일 후에나 공연을 보러가는 거예요. 그럼 미처 못 봤던 아쉬운 점이 보여요. 허점을 노트에 잘 써뒀다가 그 작품이 리바이벌될 때 끄집어내죠. 그런 리바이벌 작업이 잘됐다고 생각하는 게 <잭 더 리퍼>예요. 초연 이후 성남아트센터를 거쳐 국립극장에서 올라간 <잭 더 리퍼>를 보는데, 모든 요소가 한데 어우러진 듯한 느낌에 카타르시스가 팍 느껴졌어요. 제가 서숙진 씨를 쭉 지켜봐 왔잖아요? <잭 더 리퍼> 때 서숙진 씨의 실력이 한 번 점핑한 것 같아요. 이 세트를 어떻게 돌리고 비틀어서 저 세트하고 연결해야 또 다른 미장센이 만들어진다는 걸 제대로 터득한 것 같더라고요. 다각도의 ‘트랜스포밍’이 쉽지 않은데, 참 잘했어요.



개인적으로 두 분의 베스트 작품을 뽑자면, 저는 <피맛골 연가>(2010)의 무대가 좋았어요. 세종문화회관의 넓은 무대에서 아기자기한 세트들로 아름다운 신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해요. 민경수 감독님은 이 작품으로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조명상도 받으셨고요.                    
민경수    그 상이 내가 창작뮤지컬로는 처음 받은 조명상이에요. <피맛골 연가>는 회의를 너무나 많이 해서 스태프들이 ‘회의 뮤지컬’이라고 했어요. (일동 웃음) 그때 쓴 회의록이 한 150페이지쯤 될 거예요. 한국적인 정서의 작품이라고 하면 대개 슬픈 한을 담고 있기 마련인데, <피맛골 연가>는 서민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구성했어요. 한이 서려 있었지만, 해학도 있었죠. <피맛골 연가>를 같이했던 스태프들끼리는 그 작품을 다시 하고 싶어 해요. 한 번 더 기회가 있었으면 좋아졌을 텐데 아쉽죠.
서숙진    <피맛골 연가>는 무대를 가득 채우는 것보다는 비우는 미학을 추구했던 작품이에요. 저는 그 작품에서 과거와 현재의 시점이 전환되는 장면이 정말 좋았어요. 거꾸로 된 세트를 회전시켜서 앞으로 밀고 나올 때, 민 감독님이 쏘는 라이트에 정말 과거가 되돌아오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연출님이 과거가 물밀듯이 밀려오는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그게 잘 표현됐던 것 같아요. 정말로 예뻤죠.

두 분이 디자이너로서 공유하고 있는 지향점은 무엇인가요?                                                  
서숙진    민 감독님하고 작업하면 ‘그래, 내가 생각한 게 저 빛이었어, 바로 저런 장면이었어’ 하고 느낄 때가 많아요. 조명으로 세트를 잘 살려주는 디자이너죠. 하지만 무엇보다 무대에서 지향하는 바가 서로 비슷해서 민 감독님을 좋아해요. 민 감독님이나 저나 무대가, 또 조명이 도드라지게 돋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우리 두 사람 다 ‘나 조명’, ‘나는 세트’ 하고 뽐내지 않고, 작품 안에서 잘 녹아들게 하는 걸 좋아하죠. 그러다보니 호흡이 잘 맞는 것 같아요. 앞에서 이야기 못했는데, 이번 <프랑켄슈타인>에서도 조명디자이너로서 욕심낼 법한 많은 부분을 포기하셨어요. 작품의 정서를 잘 따라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하셨죠. 그리고 자그마한 바람이 하나 있는데, 관객 분들이 비싼 티켓 값을 치르고 공연을 보러 온 만큼 어떤 볼거리를 기대하시는 건 당연하지만, 작품의 정서에 맞는 장면을 만들어 가는 스태프들에게 좀 더 박수를 보내줬으면 좋겠어요.  
민경수    어떻게 보면 나는 굉장히 이른 나이에 성공했어요. 사실 지금 내 나이 정도에 산의 정상에 겨우 다다르고 있는 게 맞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 산을 몇 번이나 오르고 내렸어요.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뮤지컬계 상황이 그래요.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보통 사오십 대부터 작품을 맡기 시작하죠. 그래서 칠십까지도 작품을 하고요. 그런데 우리는 어린 나이에 시작해서 아직 젊은 나이에 은퇴하게 되죠. 요즘 저의 최대 관심사는 오래 버틸 수 있게 정신적 노화 방지에 힘쓰는 거예요. (웃음) 왜 그런 생각을 하냐면, 어느 날 보니까 우리가 벌써 디자이너들 중에서 제일 어른이 됐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은퇴한다고 하면 후배들도 ‘저 위치까지밖에 못 가겠구나’ 하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좀 더 버텨야 해요. 서숙진 씨도 앞으로도 계속 여기에 남아줬으면 좋겠고요.  
서숙진    동감입니다. 민 감독님과 지금처럼 아옹다옹 싸우면서 끝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같이 뚜벅뚜벅 걸어나갈 거예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8호 2014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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