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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INTERVIEW] <메밀꽃 필 무렵> 오태석 [No.133]

글 |박병성 사진 |심주호 2014-10-30 4,663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위해 왔구나


지금은 사라졌지만 대학로 뒷골목에 위치한 아룽구지 소극장은 극단 목화의 아지트였다. 이곳에서 한국 연극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이 올라갔다. 아룽구지는 오태석 연출이 6·25 전쟁 때 할머니를 따라 피난을 간 충남 서천의 마을 이름이다. 오태석이 이끄는 극단 목화가 올해로 30년을 맞는다. 올초 <자전거>를 시작으로 <템페스트>, <백마강 달밤에>,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등 목화의 대표작들이 공연됐다. 창단 30주년 기념 공연 5탄으로 <메밀꽃 필 무렵>을 올린다. 이효석의 명작 단편소설을 연극으로 옮긴 이 작품은 극장용의 한글문학극장의 일환이기도 하다.
한국 연극계 거목 오태석은 1970년대 이후 한국 연극사의 중심에서 전통과 역사를 재해석한 작품들로 관심을 받아왔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에는 우리의 말과 숨결이 담겨 있었다. 70세가 넘어서 만든 <템페스트>(2011년)로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헤럴드엔젤상을 받으며 여전히 뜨거운 창작열을 보여주었다. 그의 작업은 여전히 진행형이며, 연극계 후배들이나 오늘날을 살아가는 동시대인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그의 인터뷰를 가급적 말의 느낌을 살려서 전하려 한다.




현실을 사유하는
허구의 세계

                      
원작 소설은 하얗게 펼쳐지는 메밀밭이 인상적인데, 선생님 작품은 장터 장면에서 신명이 났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작품인데 그 학생들이 5일장의 모습을 봤겠어요. 보부상이라는 게 밤새 나귀 끌고 장에 가서 점심이면 이미 파장을 해요. 주막에서 막걸리 한 잔씩 걸치고 풋잠 자다가, 낮엔 더우니까 나귀 끌고 밤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이에요. 떠돌다 보니까 그들끼리 끈끈한 정이 있지, 짐승도 그렇고, 나귀가 지금으로 치면 1톤 트럭이지. 허생원 나귀가 느지막이 애를 낳아 제천에 있는데 들러야겠다고 해요. 짐승이 새끼를 낳으면 낳자마자 다른 데를 줘버린다고. 인간이 그래요. 나면서 헤어지는 거지. 그 세대의 인정과 풍경을 우리 애들은 알 수가 없죠. 핵가족 시대라 남을 생각한다거나 하물며 나귀까지 생각하거나 이런 게 없어요. 귀여워서 키우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걸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퀴퀴한 땀 냄새, 네 발 짐승의 분비물 냄새, 그런 게 서서히 객석으로 가게 해야죠.

혈육의 정에 집중하셨어요.
원작이 바로 그거죠. 애들이 대체로 나만 생각하잖아. 요즘은 집에서도 (낳아 키우는 애들이) 하나나 둘이니까 황태자 모시듯이 해요. 여러 사회 현상이 그런 것에 원인이 있다고 봐요. 조그만 것에도 흥분하고 안정감이 없어. 대가족에서 애들은 부모 볼 시간이 없었죠. 엄마 아빠는 논이나 밭에 있었지 볼 시간이 없었다고. 할아버지, 할머니나 삼촌, 고모에게 배웠지. 그래서 지식이 풍부했어. 나로부터 뻗은 가지들이 각자로부터 뻗은 가지들과 엮여 있는 거야.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다. 너 혼자만 대단한 것이 아니다. 대가족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 끈끈한 정이 무대에 보이면 어떨까 했죠.

원작이 있는 작품인데도 이야기가 예측할 수 없게 전개되더라고요.
연극이 만들어지는 게 의외성에 많이 기대고 있죠. 석탄광이 있는데 석탄을 캐다 보니 구리가 나왔어. 그럼 구리 버리겠어요? 구리로 가거든. 구리를 캐다보니까 은이 막 나와. 석탄만 팠으면 동대문에 갔어야 하는데 이것저것 따라가다 보니 마포에 가있어. 이런 식으로 관객을 놀라게도 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게도 하고 그런 세계로 끌어가야지. 이게 허구가 할 수 있는 힘이죠. 허구도 처음엔 과학적이지 않으면 시작이 안 돼. 왜냐면 인간이 나오니까 상식이 아니면 안 돼지. 근데 일단 상식에서 관객이 납득할 수 있는 것이 되면 그다음부터는 어딜 가도 되는 거야.

(이 대목에서 ‘극’에 대한 선생님의 강의가 이어졌다. 극(劇)이란 한자가 인간(劍)과 멧돼지(豕), 호랑이(虎)가 서로 살기 위해 일촉즉발로 다투는 것을 형상화한 글자라는 설명으로 시작해서,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극작의 4형제, 절약성, 비약성, 즉흥성, 의외성을 판소리 <춘향전>에 빗대어 한 대목을 노래해주시기도 하고, 설명을 곁들이면서 명강의를 해주셨다. 그 강의 내용을 지면으로 다 옮기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연극이 관객에게 주어야 하는 역할 부분만 전한다.)

낮에는 관습적인 머리만 쓰잖아요. 지하철 타고, 점심에는 신라면 먹어야 하고, 관습대로 살다가 약간의 창의성을 발휘하면 국장님이 허허허 좋아하고. 낮에 안 쓴 머리를 저녁에 공연장에서 쓰는 거야. 라스베이거스 쇼처럼 구경하라고 하면 까만 공연장에서 그저 넋 놓고 있지. 우리 극은 그렇지 않았다고. 부채랑 침 튀면 닦을 수건 하나만 들고 하는데 관객이 가만있을 수 있나. 머릿속에서 세트 만드느라고 분주하다고. 안 쓰던 머리를 들입다 써야 해. 우리 선조들은 4할도 안 했어. 6할 넘어는 관객이 하게 만드는 거야. 굿 보러 가자 하면 구경하러 가자는 게 아니고, 내가 춤추고 장단 때리고 별의별 짓을 다하고 싶어서 온 거야. 껌껌한 데서 횃불 타는 소리 들으러 왔겠어요. 일상에서 상상도 못한 경험을 해주는 것. 이게 허구의 세계지. 거기에는 세월호가 없어. 심청이가 있지. 내려갔다 황후가 되는 이야기가 있지. 연꽃 타고 다시 올라와요. 실제는 막막하지만. 여기(가슴)에 한 톤이나 되는 납덩이를 안고 살지만.

<메밀꽃 필 무렵>도 그렇지만 선생님 작품을 보면 화해를 맺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대가족 이야기를 했는데, 대가족제라면 화해를 얘기할 필요도 없어. 대가족이면 3형제 정도는 있잖아. 그 3형제가 까놓은 애가 또 얼마나 될거야. 이 중에 꼭 애물단지가 있다고. 그 애 하나 있다고 집안이 뭉개지지 않아요. 그리고 그런 애는 있어야 해. 그래야 집안이 긴장을 한다고. 퍼질러지지 않게. 잘 무마가 되고 그놈이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그럼 잘 넘어가는 거고. 이젠 하나씩이니 (애물단지들은) 전부 미움 받아요. <백마강 달밤에>도 그래서 하는 거야. 결국 신라와 백제가 뭐야. 경상도와 전라도야. 똑같잖아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이데올로기가 전 세계를 물들여 놓았는데 보가 터진 거라고. 그땐 (이데올로기가) 5년이나 길어야 10년이면 없어질 줄 알았죠. 그로부터 25년이 지났는데 도리어 더 나쁜 상황으로 가고 있어. DMZ는 요지부동이라고. 이렇게 지혜가 없을 수가 없지. 낱낱이 자기만 생각하니까 그런 거야. 같이 생각하면 무언가 일이 되지 않겠어.

최근 군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보면, 형제가 없이 혼자 지내다 보니 여럿이 어울리는 과정이 익숙하지 않으니까 점점 더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가족에서는 순서가 잘되어 있는 거지. 우리 선조들은 우리랑 같이 지내야 할 것들을 병풍에 그려서 살았단 말이야. 까치밥은 물론이려니와, 고구마, 감자도 다 캐지 않아요. 두더지 잡수시라고. 놔두면 두더지가 아들에 며느리, 며느리에 손자 다 불러다가 요이 땅 하면 여기서부터 밭을 다 갈아줘. 밭이 산소하고 만나서 숨 쉬게 해준다고. 이번 이효석 선생 작품은 고거야. (오태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우화적인 작품이다.) 나귄지 사람인지, 사람인지 나귄지 그렇게 느껴지게. (허생원과 나귀가) 둘이서 없으면 힘들겠다. 이 사람이 저 사람을 위해 있고, 저 사람은 이 사람을 위해 있구나. 그게 느껴지게 하는 거.

동이가 허생원에게 맞는 장면이 있잖아요. 거기 지문에 “젊음은 관대하다”라고 되어 있더라고요. 상황상 다툼으로 가지 않고 동이가 참는 장면이라 이해는 되는데, 대사도 아니고 지문에 그렇게 쓰신 이유가 있나요? 우리 젊음이 그렇게 관대하지 않은 거 같은데.
아직도 관대한 게 있죠. 학생 때 술 먹고 주먹다짐해도 다음 날이면 형동생 하면서 또 술 먹잖아요. 사회에서처럼 고소한다, 배상해라 그러지 않고 아직은 웃고 털고 가는 게 있어요. 근데 중고등학교에서도 왕따 시키는 게 문제야. 왕따라는 게. 부족한 이를 함부로 하는 걸 보면 분기가 일어나잖아요. 옆에 사람을 생각한다는 게 조금 진전하면 약한 사람을 챙겨주어야 한다는 거라고. 그런데 이놈의 나라는 약한 사람을 이용해 먹으려고만 드니.


목화가 걸어온
30년 세월

                      
 

목화에서 30년간 지속적으로 해온 작업이 우리 언어, 우리 숨결을 연극을 통해 보존하고 간직해온 일이었습니다.
연극이 할 수 있는 제일 큰 일 중 하나가 국어순화야. 말의 순화. 말은 어차피 시대를 타게 돼 있어. 심지어 초등학교 3학년이 하는 말을 4학년이 못 알아듣는다고. 자음이나 모음 몇 개 빼버리는 거야. 은어의 세계지. 숨어버린다는 건 정당하지 못하다는 거야. 언어는 자꾸 공격을 당해요. 그래도 유지해야지. 얼마나 결이 고운 국언데. 우리가 두 번 외국에서 공연했어(2006년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영국 바비칸센터에 초대를 받아 공연했고, 2011년 <템페스트>로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다). 극장으로 셰익스피어가 들어오면서 운문체를 다 산문화시켰다는 거 아니야. 그쪽에서 놀랐던 건. 우리 공연을 보니까 다시 운문으로 돌아간 것 같다는 거야. 많은 사람들이 문어체로 연극을 하는데, 우리는 구어체로 한다고. 판소리에서 하는 말 그대로. 이게 3.4조, 4.4조거든.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단어가 세 개나 네 개야. 이게 침투력이 좋아요. 유네스코에서 아프리카나 이쪽 민족이 있잖아. 언어를 채록해 두어야 하는데 그때 택한 글자가 한글이야. 어느 말이나 채록할 수 있으니까. 이런 언어를 방치하면 안 되지.

우리말의 순화를 연극으로 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사화(私和)라는 말이 있어. 원수진 것을 없앤다는 말이거든. 할머니가 나한테 썼다고. 사화를 해야지 왜들 그런지 모르것다. 일본어인 화해는 알면서 사화는 몰라. <백마강 달밤에>에 썼는데 퇴장하려는 말을 잡아놓는 거야. 이게 글자로는 안 돼. 왜? 죽어버리니까. 인쇄 자체가 죽어 있는 거잖아. 내가 말하는 이 말 자체는 살아 있잖아. 폐를 통해 자꾸 숨 쉬면서 하는 거니까 살아 있지. 배우 중에 로렌스 올리비에라는 배우가 있어. 이 사람이 작위를 받았는데, 영어를 품위 있게 해주었다고 받았다고. 근데 이 사람이 혀가 짧아. 배우로서 나쁜 조건인데 그걸 만회하려고 (시범을 보이며) To Be or Not To be 하다 보니까 영어가 멋있어졌어. 그런 일은 배우가 할 수 있어요.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 화해 정신이 가장 반영된 작품이 <템페스트>잖아요. 선생님의 <템페스트>는 서양의 화해 정신을 넘어서는 선생님만의 화해가 느껴집니다.
영국에서 학자들이 제일 놀란 게 캘리밴이에요. 그 섬의 원주민인 여주인의 아들이었던 놈인데 프로스페로가 13년 동안 부려먹었거든. 머슴처럼 부려먹고 자신들은 그냥 떠난다고. 그때(셰익스피어 시대)는 뭐 식민지 초기니까 그렇게 하는 게 당연했을지도 몰라요. 지금은 모두가 평등하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셰익스피어가 폄하될 우려가 있는 거야. 도덕적으로. 그래서 쌍두아를 만들었지. 섬에 혼자 남겨놓아야 하는데, 둘이서 말이라도 주고받으면서 같이 살라고. 항시 묶여 있어야 하는데 자유를 준 거잖아. 품삯을 준 거지. 비록 부려 먹었어도 이 정도면 괜찮은 주인 아냐. 셰익스피어도 이거는 못 썼거든. 자기들 잘된 것도 화해지만, 전혀 인간답지 않은 존재를 존중해 준 거. 그것도 화해지.

셰익스피어의 고장 영국에서 작품을 발표하셨는데, 반응은 어땠나요?
객석이 천 석이었는데 다들 계속 웃는 거야. 그곳에서 운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준 거하고, 우리의 해학을 인정받은 거. 우리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대해 나는 무척 고마워. 우리 해학이 어거지가 아니구나, 하는 걸 느꼈지. 그 사람들은 자막 보고 웃은 거거든. 우리말을 알았으면 얼마나 재밌었을까 싶어. 한글을 가르쳐야 돼. 거기서 헤럴드엔젤스상을 줬어요. 당신은 오랜 전통으로 한 것이라지만 그게 현대적인 기법으로 한 것이다. 아까도 말한 생략, 비약, 즉흥, 의외성으로 만든 건데, 그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거야. 전통이 새롭다는 걸, 그 사람들이 제대로 보여준 거지.

다음에는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셰익스피어 작품을 더 하실 건가요?
셰익스피어 작품을 하는 것은 문제가 없는데, 가능하면 어린애들이 셰익스피어와 가까워지는 법이 없을까 하는 게 숙제예요.

선생님은 비극을 싫어하시죠?
우리 삶 자체가 비극인데. 허구의 세계라는 것은 지친 사람을 구제해주는 거지. 그 사람들에게 엿을 먹이면 안 되지. 그러지 않아도 엿 먹어서 죽을라고 그러는데.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3호 2014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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