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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INTERVIEW] 연출가 안드레이 서반 [No.134]

글 |송준호 사진 |심주호 2014-12-01 4,703
춘향,  사랑이라는 이상을  지킨 영웅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




국립창극단이 창극의 세계화 일환으로 추진 중인 ‘세계 거장 시리즈’가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으로 다시 시작된다. 춘향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인물이지만, ‘안드레이 서반’이라는 필터와의 조합은 새로운 호기심을 자아낸다. 지난해 공연된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는 의상, 조명, 무대의 강렬한 색채 대비로 국내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담한 연출로 잘 알려졌던 이 루마니아 출신의 연출가는 가장 한국적인 이 캐릭터에서 어떤 모습을 발견했을까. 개막 전 연습실을 찾아 그의 눈에 비친 춘향, 그리고 판소리에 대해 들어봤다.



‘판소리’에서 찾은 연극의 혼
                      
판소리 다섯 바탕의 대본과 영상 자료들을 두루 검토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느낀 ‘판소리’의 이미지는 무엇인가요.
어렸을 때, 두 번의 특별한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발리에서 전통 노래와 춤을 배운 겁니다. 『잔혹연극론』에서 앙토냉 아르토가 말하길, 연극이 되찾아야 할 원래의 형식과 본질을 발리의 전통극들이 갖고 있다고 해서 호기심에 한 여행이었습니다. 일본 동경에서 공부했던 ‘노’도 비슷한 경험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아직까지 연극 고유의 본질을 유지하고 있다는 거예요. 서양 문화권에서는 살아있는 전통이 전혀 없어요. 가령 셰익스피어의 극들이 당시 어떻게 공연됐는지 아무도 몰라요. 현대 서양 연극은 고대 연극이 지니고 있던 걸 다 잃었어요. 이제 할 수 있는 건 유흥뿐입니다. 발리나 일본의 전통극이나 인디언 춤, 중국의 경극, 그리고 한국의 판소리 등을 찾아다녀야 그 흔적을 만날 수 있어요. 그래서 김성녀 예술감독이 이 작품을 제안했을 때 정말 흥분됐죠.

서양의 연극에서는 사라졌지만 동양의 전통극에는 있다는 그 힘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가령 러시아의 메이예르홀트나 독일의 브레히트 같은 사람들은 동양의 연극에 굉장히 강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사실주의에서 벗어난, 굉장히 스타일이 강한 것들이죠. 인간의 본성을 표정이나 소리, 가면에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는 형식들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의 본질을 건드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만약 극장 무대에 거울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을 비추는 게 아니라 우리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관찰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듯이요.

하지만 한국을 포함해 동양의 전통 장르들은 점점 더 힘을 잃고 있습니다.
맞아요. 오늘날까지 이어지긴 했어도 그것들은 박물관의 유물처럼 인식되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삶은 그 안에 있지 않으니까요. 그저 500년 전 형식을 따라할 뿐이죠. 그래서 일본의 ‘노’는 그 장르의 혼을 어떻게 하면 죽지 않게 유지시키는가를 고민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거기서 배울 점은 그 형식이 아니라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본질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혼을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런 전통 장르에서 어떻게 현대성을 발견하고 새롭게 표현하느냐일 텐데, 연출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연결고리’를 만드는 겁니다. 다리를 만드는 거죠. 물론 오래된 것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하지만, 그건 단지 형식적인 것일 수도 있거든요. 창극단에는 나이 든 단원들이 있는데, 이들은 리허설에 오면 굉장히 긴장을 합니다. 우리가 판소리를 배신할 거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죠. 과거를 존중은 하되 자유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판소리가 의미하는 게 도대체 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결국 보편성에 관한 이야기인 듯합니다. 이번 작품의 연출을 맡으신 것도 아마 비슷한 이유일 것 같은데요. 어떤 점에서 보편성을 느끼셨고, 또 어떻게 그걸 전달할 계획이신가요.
그게 우리가 지금 연습을 하는 이유입니다. 일단 의사소통이 중요합니다. 극단의 젊은 배우들은 의사소통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그들과의 작업은 모든 게 새로움입니다. 리허설이 우리를 흥분시키고 신 나고 재밌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무대 위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그때마다 새롭게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이고 틀에 박힌 것들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어느 순간에 그냥 일어나는 일들을요. 지금 이 순간 우연히 어떤 일이 벌어지면, ‘이거 옛날 이야기와 연결지어서 보여줄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걸 지금 같이 발견해가는 거죠. 과거에 어떻게 했느냐는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옛날에 했던 것을 따르고 존중하는 게 아니라 그걸 새롭게 바라봐야 할 시점입니다.

 



‘영웅 춘향’의  발견
                      
한국인들은 <춘향가>에서 보통 전통적인 가치관과 젊은이들의 뜨거운 사랑을 봅니다. 연출님은 어떤 부분을 인상 깊게 보셨는지 궁금한데요.
‘춘향’이라는 캐릭터입니다. 굉장히 독특하고 다른 사람과는 구분되는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그녀는 어느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실 그녀처럼 되길 바라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달리 그녀는 타협하지도 않고 거짓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실과 사랑이라는 이상을 끝까지 지켜갑니다. 성경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랑의 이상을 지켜 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단계까지 도달하는 사람은 없어요. 부패한 정치인들은 사랑이 아니라 그녀의 몸을 원하고,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자 고문하고 옥에 가두고 모욕합니다. 더 심한 건 몽룡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불러들였을 때, 그는 아무런 고민 없이 그녀를 버려두고 떠나버립니다. 그가 공부를 마치고 커리어 관리를 다하고 돌아왔을 때, 옥중 춘향은 이미 만신창이 상태죠. 희생된 겁니다. 몽룡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그녀를 희생시켰고, 그녀는 사랑을 위해서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자신을 희생한 거죠. 위기와 타협이 가득한 세상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진실하려고 했던 인물이 주는 감동이 이 작품을 맡게 한 요인입니다.

연출님이 감명받은 춘향의 사랑은 연인과의 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춘향의 내면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정말 외롭고 독보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을 받고 싶어하지만 정작 사랑을 하는 건 쉽지가 않잖아요. 춘향은 사랑 그 자체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몽룡은 자신만을 생각하잖아요. 이 예쁜 춘향을 꼬셔서 어떻게 한번 사귀어볼까 생각하고, 그다음에는 자기의 출세를 생각하고, 마지막에는 옥에 갇힌 춘향을 구하러 오긴 하지만 그땐 많이 늦었죠. 과연 그는 무슨 고통을 겪었고 희생을 했을까요. 아무것도 한 게 없죠.

영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옥에 갇힌 춘향의 뒤로 늙은 춘향의 모습이 이중적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결말부의 비극성을 위한 장치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매일매일 연습 과정을 통해서 발견해가는 중이어서 결말에 대해서는 명확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해피엔딩일지 아닐지는 관객이 결정할 일이겠지요.

그런 고난의 여정을 보면 핍박받는 영웅이 연상됩니다. 잔 다르크 같기도 하고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리고 햄릿도 비슷한 예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것을 인내해야 합니다. 어떤 고귀함을 가지고 인생을 살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가 햄릿이고, 또 춘향입니다.

개막까지 바뀔 수도 있겠지만, 옥에서 풀려난 춘향이 휠체어나 보행기와 함께 등장하는 마지막 신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 장면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극의 마무리는 연출가에게는 물음표입니다. 저는 관객들이 물음표를 가지고 돌아가 스스로에게 질문하기를 원하고 있어요. 다만 이건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가장 순수한 사람들조차 해피엔딩을 믿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저는 이렇게 위선과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하는 질문을 하고 싶은 겁니다.

창극단 배우와 스태프들로서도 서양 연출가와의 작업은 새로운 경험일 겁니다. 이번 작업에서 느끼신 게 있다면.
여름에 워크숍과 오디션을 위해 들어왔는데 사실 굉장히 많이 긴장했어요. 아무튼 국립창극단은 굉장히 독특한 집단이잖아요. 대체로 다섯 살 때부터 평생 동안 하나의 예술 형식을 추구해온 사람들이고, 그만큼 모든 걸 잘 알아요. 그런 그들에게 내가 무슨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벽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걸 어떻게 부술 수 있을까 생각했죠. 첫날 도착했을 때 배우들에게 기존의 역할 연기를 하지 말고 즉흥 연기를 해보라고 주문했어요. 그러면서 돌파구를 찾았죠. 그 전에는 누구도 그들에게 그렇게 연기해보라고 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나이 많은 단원들도 근엄한 모습이 아니라 마치 놀이터에 풀어놓은 아이들처럼 즐겁게 웃으며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모두 같은 배를 탔고, 한 팀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됐어요. 그건 정말 흥분되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인터뷰에서 창극 연출은 일생에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셨더군요. 그럼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창극 연출인가요. 나중에 또 다른 창극을 연출해볼 생각은 없는지요.
일단 앞으로 남은 인생이 많이 없고(그는 우리 나이로 72세다) 그 시간에 다른 일들을 해보고 싶어요. 하지만 이 프로덕션 이후에 누군가가 제안한다면 생각해볼 수는 있겠네요. 하지만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웃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4호 2014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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