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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기획-1] 얼음과 불의 전쟁, 록 뮤지컬 [No.89]

글 |박천휘(작곡가, 번역가) 2011-02-07 5,180


 얼음과 불의 전쟁, 록 뮤지컬에 대해 알아본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9호 2011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잡히지 않는 신기루 - 록 뮤지컬의 역사(1)

 

로저스와 해머스타인 콤비와 함께 그 절정을 구가했던 뮤지컬의 황금기는 1960년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황혼을 맞이하고 있었다. 뮤지컬 황금기 때만 해도 극음악과 대중음악의 경계 같은 것은 없었다. 뮤지컬의 히트 넘버들은 대부분 빌보드 차트에 올라갔고, 재즈의 스탠더드가 되었으며, 대중 가수들의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했다. 허나 브로드웨이는 뮤지컬을 통해 엄청난 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으로 발전했지만, 동시에 비슷비슷한 것만을 재생산 해 내는 예술적 답보 상태에 빠져 있기도 했다.

 

 

한편 1950년대 초반 리듬 앤 블루스, 재즈 등 흑인 음악에서 분화되어 나온 로큰롤은 젊은이들의 치기 정도로 치부되던 하위문화였다. 하지만 엘비스 프레슬리, 비치 보이스, 비틀스 같은 록 그룹이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대중 매체를 통해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등극하며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젊은이들의 주류 문화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록이 반항과 젊음, 자유, 반전, 히피즘 등 새로운 정치적 이상을 노래했다면, 뮤지컬은 어느새 낡고 보수적인 기성세대를 상징하는 장르가 되었다. 록 음악의 태동은 대중음악을 그 뿌리부터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고, 이후 뮤지컬 음악과 대중음악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나갔다.
대부분의 뮤지컬 작곡가들은 초창기의 로큰롤을 그저 지나가는 유치한 유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록이 점점 더 인기를 끌자 그들의 삶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고, 차트에서도 보기 힘들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들어오던 수입마저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다급해진 많은 작곡가들이 록적인 요소를 가미한 뮤지컬들을 시도하기 시작했고, 그중 1960년 브로드웨이에 올라간 찰스 스트라우스의 <바이바이 버디>는 록 음악을 도입해 성공한 최초의 뮤지컬이 되었다. 하지만, 군대에 징집된 대중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델로 했던 이 뮤지컬은 처음부터 분명한 한계를 안은 채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에서 록은 젊은이들의 문화를 패러디하려는 기성세대의 시각에서 빌려온 남의 옷에 불과했던 것이다.
곧 나타나리라 생각했던 본격적인 록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에 입성한 것은 그로부터 8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다. 꽤나 많은 작품들이 록을 도입하는 실험을 했지만, 1968년 브로드웨이를 강타한 <헤어>는 소위 말하는 브로드웨이 뮤지컬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본격적인 변화를 보여준 작품이었다.


<헤어>가 나올 수 있게 된 데에는 록이란 장르의 분화를 첫 번째 배경으로 꼽을 수 있다. 록은 1960년대에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단순한 로큰롤에서 포크 록, 팝 록, 블루스 록, 펑크 록, 프로그레시브 록 등 다양한 장르로 발전했으며, 이런 발전은 2시간 반짜리 뮤지컬을 이끌어가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했던 로큰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또한 1950~60년대는 상업주의에 대한 반발로 다양한 실험적인 예술 장르들이 오프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꽃피었던 아방가르드의 시대였다. 특히 실험 연극의 산실이었던 카페 라마마는 록 뮤지컬의 역사에도 커다란 족적을 남기게 되는데, <헤어>의 연출을 맡았던 연출가 톰 오호건이 카페 라마마 출신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브로드웨이라곤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고 아프리카 음악에 심취해 있던 작곡가 거트 맥더모트가 <헤어>의 음악을 맡았다. 당시만 해도 즉흥과 워크숍, 집단 창작 방식은 오프브로드웨이의 전유물이었고, 이들은 이 작품을 퍼블릭 씨어터와 함께 개발해, 오프오프브로드웨이의 디스코 나이트 클럽 ‘치타’에서 공연을 했으며, 이후 모든 좌석을 다 매진시키며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헤어>는 말 그대로 혁명적인 작품이었다. 히피들의 문화를 날것 그대로 무대화했으며, 섹스와 마약을 직접적으로 다뤘고, 무대에서 노출을 감행한 최초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이었으며, 전통적인 줄거리 중심의 플롯을 버렸고, 다양한 인종의 배우들을 한 무대에 세웠으며, 또 록을 성공적으로 도입한 최초의 뮤지컬이라는 영예를 얻었다. 역사는 브로드웨이에 올라간 <헤어>를 최초의 록 뮤지컬로 기억하지만, <헤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카페 라마마의 <비에트 록(Viet Rock)> 같은 작품도 있었고, 이외에도 수많은 실패작들과 실험들이 있었기에 <헤어>의 성공이 가능했던 것이다. 브로드웨이의 모든 문법을 무시한 이 작품이 의외의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젊은이들의 발길을 브로드웨이로 끌어들이자, 사람들은 성급하게 록 뮤지컬의 르네상스가 올 것이라 예측했다. 물론 <헤어>는 수많은 아류작들을 양산해 냈고, 오프브로드웨이는 록 뮤지컬의 실험장이 되었지만, 그중에 브로드웨이까지 올라간 작품은 극히 드물었고, 그나마도 브로드웨이에서 냉혹한 실패를 거듭했다. <헤어>의 작곡가 맥더모트가 만든 이후의 록 뮤지컬들이 브로드웨이 역사상 최악의 실패작으로 남았으니, 록과 뮤지컬은 처음부터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록 오페라와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등장록 뮤지컬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흐름 역시도 브로드웨이가 아닌 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1960년대는 많은 록 뮤지션들이 녹음 기술의 발달로 라이브보다는 스튜디오 녹음에 공을 들이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특히 비틀스는 너무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관객들 때문에 라이브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호소하며 스튜디오로 은둔해 1967년 ‘Surgean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라는 명반을 발표했다. 이 음반은 록을 예술의 경지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오늘날에는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초로도 일컬어진다. 이 음반으로 인해 컨셉 앨범이란 형식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는데, 컨셉 음반이란 이전까지 앨범을 분절적인 히트곡 퍼레이드로 보는 관행에서 벗어나 음반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컨셉 또는 이야기로 구성하는 경향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1970년대에 이르자 프로그레시브 록에서는 컨셉 앨범이 일반적인 문법이 되기도 했다. 더 후, 핑크 플로이드,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 데이비드 보위 등이 록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며 컨셉 앨범의 역사적 명반들을 발표했다.
그중 특히 1969년 영국의 그룹 더 후(The Who)의 4번째 앨범 <토미>는 최초의 록 오페라로 기억되는 작품이다. 살인 현장을 목격하고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된 한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록으로는 최초로 모든 등장인물의 말을 대사 한마디 없이 전부 노래로 처리하는 오페라의 전통을 따랐고, 작곡가 피트 타운젠드도 이 작품에 스스로 록 오페라라는 부제를 달았다. 이 대담한 모험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며 역사적인 명반으로 기록되었고, 많은 이들이 이 이야기를 무대에서 보고 싶어 했지만, 피트 타운젠드는 이 작품의 무대화에 극구 반대했다. 이전의 컨셉 앨범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정확한 스토리와 인물이 있는 작품이었지만, 더 후는 이 작품을 특별한 등장인물의 구분 없이 콘서트로 계속 공연했다. 결국 1990년 들어 병으로 생사의 위기를 넘긴 후에야 타운젠드는 무대화에 합의하게 되었고, 이 작품은 1993년 꽤 많은 개작을 거처 브로드웨이에 올라갔다. 하지만 원작의 줄거리는 훼손됐고 브로드웨이 입맛에 맞게 순화되면서 원작이 가졌던 이빨과 위트 모두를 잃고 말았다.
다음 해인 1970년, 이제 겨우 20대였던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팀 라이스 콤비는 이미 십년 가까이 호흡을 맞춰오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마지막 7일을 그린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이하 <지저스>)를 쓰고 있었지만, 예수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든다고 했을 때 런던의 제작자들은 대부분 최악의 아이디어라며 비아냥댔다고 한다. 더 후의 <토미>에서 영감을 받아 록 오페라 형식을 따랐는데, 무대화의 길이 요원해 보이자 웨버는 먼저 ‘수퍼스타’ 한 곡을 싱글앨범으로 발표한다. 마침 <토미>의 성공을 이어갈 차기작을 찾고 있었던 RCA가 이 두 젊은 인재들에게 투자를 하게 되고 마침내 1970년 <지저스>의 컨셉 앨범이 먼저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이 앨범은 특히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후 1971년 <헤어>의 연출가 톰 오호건의 진두지휘하에 브로드웨이 공연이 성사되며 최초로 무대화된 록 오페라란 기록을 남기게 됐지만 기대만큼의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지저스>가 처음부터 무대 공연이 아닌 컨셉 앨범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다소 불행한 일이다. 사실 컨셉 앨범에 항상 일관된 이야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는 모호한 플롯과 이야기 구조는 청자가 반복적이고 개인적으로 감상하게 되는 앨범의 특성상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음반과 뮤지컬은 만들어지는 방식 역시 상이하다. 음반이 스튜디오에서 아티스트가 오랜 시간 정성과 시간을 들여 지극히 개인적으로 작업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면, 뮤지컬은 무대라는 공간에서 관객과 직접적인 공동 체험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공동 작업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두 분야는 처음부터 상당히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하게 되는 셈이다. 더 후의 앨범은 무대화에 대한 고려 자체가 없었기에 더 어려웠지만, <지저스>는 처음부터 무대를 생각하고 쓴 작품이기에 상대적으로 무대화가 용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라이스조차 인물들의 행동의 동기 같은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10대부터 뮤지컬을 썼는데 (1965년)란 작품을 보면 뮤지컬 황금기의 전통적인 어법을 흉내 내고 있다. 게다가 그는 또 <지저스>를 쓰기 전에 차트에 진입했던 팝 넘버들도 작곡하곤 했는데, 웨버의 등장은 처음으로 록이란 새로운 대중음악과 뮤지컬 음악의 어법을 공히 이해하고 있는 새로운 세대가 나타났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는 이후 뮤지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작곡가가 되었다. 웨버는 <지저스>에서 아주 분명하게 록 사운드를 지향하면서도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음악의 새로운 문법을 보여주었다. 사실 <지저스>의 음악은 이전까지의 뮤지컬 음악과 비교한다면 화성도 멜로디도 매우 단순한 편이다.

 

(뒤에 계속)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9호 2011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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