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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Culture In Musical] 헤드윅은 행복한 자웅동체가 될 수 있을까 [NO.95]

글 |박민정 2011-06-01 5,821

나는 둥근 손거울을 허리띠 사이에 끼우고 얼굴에 가볍게 분을 발랐다. 그리고 막대 모양의 은빛 손전등이며 금을 새겨 넣은 고풍스러운 만년필이며, 무엇이건 눈부신 빛을 발하는 것은 모조리 몸에 지녔다. 이러고서 나는 참으로 얌전하게 조모의 방으로 들어갔다. 미칠 듯한 기쁨과 웃음을 미처 억누르지 못한 채로. - 미시마 유키오, <가면의 고백> 중에서

 

 

<가면의 고백>의 소년은 어머니의 화려한 기모노를 차려입고 기쁨으로 얼굴이 달아오른다. 극장에서 여자 마술사를 보고 매료되어 그녀처럼 분장을 한 것이다. 이에 질세라,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등장하는 미소년은 “아름답지 않으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라고 말한다. <헤드윅>의 주인공도 거울 앞에서 공들여 화장하고 여장을 한다. 이들의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망은 생물학적 성에 구애받지 않는다. 여성/남성으로 양분되는 단성의 불완전함을 분장으로 극복하고 더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닌 양성적 존재로 거듭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단성인 상태에서는 ‘완전하게’ 아름다울 수 없다고 느끼며, 아름답지 않은 존재는 하울의 말대로라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게 되는 것일까? 잃어버린 반쪽으로 인한 결핍감 때문일까.


카를 구스타프 융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원래 남녀 양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수 있지만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자신의 성과 반대되는 성적 특성이 내재돼 있다는 얘기다. 즉 남성의 내면에는 여성적 속성이, 여성적 내면에는 남성적 속성이 있는데, 남성에 잠재된 여성적 요소는 ‘아니마’, 여성에 잠재된 남성적 요소는 ‘아니무스’라고 한다. 아니마는 남성들의 감성적이고 예감을 잘하는 능력으로 나타날 수 있고 아니무스는 여성들의 사고하는 힘과 지혜로운 특성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처럼 내적 인격인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자아를 좀 더 깊고 넓은 정신으로 이끄는데,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인식하면서 인격을 통합시키는 것은 자기실현의 과제가 된다. 자기실현은 무의식에서 나오는 자기(Self)의 목소리를 의식의 자아(Ego)가 감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나’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율성을 지닌 인격체이며, 외적 인격, 즉 집단이 개체에 요구하는 도리, 본분, 역할, 사회적 의무와는 상반되는 인격인 셈이다. 그래서 외적 인격의 억압을 덜 받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아니마나 아니무스를 발견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런데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여성적 속성’이나 ‘남성적 속성’은 전통적 여성관이나 남성관과는 차이가 있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도 단계에 따라 발달하는데, 아니마는 생물학적, 충동적인 여성▶미적, 낭만적 여성▶영적 어머니▶지혜의 여신의 순으로, 아니무스는 신체적인 힘▶계획적인 행동▶말씀의 사자▶지혜로운 안내자 순으로 발달해 간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실현이 중년 이후에 시작된다는 말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 내적 인격은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발견해야 하기도 하지만 중년에 이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외적 인격에 한계를 느끼고 참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간다는 의미다.

그런데 애초에 외적 인격의 억압을 덜 받는 남성이나 여성은 자기 안의 상반된 성적 특성을 잘 살려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자기실현을 한다. 앞에서 언급한 ‘아름다운 남자’들이나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에 속하지 않을까 한다. 전통적인 남자다움, 또는 여자다움에 대한 강박이 없는 사람들은 자유롭다.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많은 예술가들이 남성성과 여성성이 통합된 인격을 보여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에게 부족한 반대 성을 보완해 영혼의 균형을 이루려고 한다. 다른 성으로 분장하고자 하는 욕구도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여성이 ‘아니무스’의, 남성이 ‘아니마’의 존재를 인식해 가면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추구해 가는 것이다. 잃어버린 반쪽은 내 안에 있는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불완전하고 불안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에 귀 기울이는 습관이 필요하다. 사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우리가 그 존재를 인식하지 않고 방치해두면 미숙한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이때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부정적인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데 남성에게서는 변덕스럽고 짜증스러운 성격으로, 여성에게서는 융통성 없이 따지는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그러니 양성적이라는 의미는 단지 ‘여자 같은 남자’나 ‘남자 같은 여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양성성을 구현하려면 더 성숙한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인식해야 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위는 대부분 양성성을 꿈꾼다. 회화나 조각 등 많은 예술 작품이 남성의 몸은 여성적으로, 여성의 몸은 남성적으로 만들어서 양성적인 아름다움을 담아낸다. 프랑스 루브르 미술관에 있는 헤르마프로디토스 조각상은 상체에는 여성의 젖가슴이, 하체에는 남성의 성기가 달려 있다.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신들의 전령인 헤르메스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그의 모습에 반한 님프 살마키스는 애정 공세를 펼쳤지만 거절당하게 되고, 헤르마프로디토스가 호수에서 물놀이를 하는 틈을 타 몰래 그의 몸을 껴안고는 한 몸이 되게 해 달라고 신에게 빌었다. 결국 둘의 몸은 하나가 되었고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남녀의 성을 함께 지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신화나 예술의 원형은 남녀 양성으로, 자웅동체의 창조물에는 완전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염원이 담겨있다.


아이들의 성 역할 또한 타고난다기보다 문화적인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은 자신의 성 역할을 부모나 다른 성인들의 행동을 통해 배우며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면서 학습하게 된다. <가면의 고백>의 주인공 또한 ‘사내아이이기를 요구받으며’ ‘ 마음과는 동떨어진 연기’를 하기 위해 사촌들에게 “전쟁놀이 하자!”고 말한다. 남자아이이기 때문에 장난감 총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장난감 총을 좋아하는 아이로 길러지는 것이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양성적 인간은 전통적인 성 역할에 갇혀있는 이들보다 지능도 높고 창의력도 풍부하다고 한다. 서로 다른 성의 조화가 이루어질 때, 더 완전하고 안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는 셈이다.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된’ 사람만이 아름다울 수 있고, 그렇게 발현되는 아름다움은 힘이 세다. 무의식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내적 자아와의 만남을 시도해보면 분명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내가 단지 남자 또는 여자이기만 했을까?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2호 2011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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