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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번지점프를 하다> 강필석 [NO.106]

글 |이민선 사진 |박진환 2012-07-23 5,043

 

 

무대 위에서 살아 숨 쉬는 기쁨

 

의지하고 싶은 오빠 또는 선배 같다고만 생각했는데, 금요일 정오를 함께 맞은 그는 들뜬 소년처럼 가벼워 보였다. 자신이 하는 말 하나하나를 머릿속에서 타자 치듯이 이야기하다가도, 문득 눈을 돌려 주위의 싱그러움에 감탄하거나 제가 내뱉은 말에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돌려 웃곤 했다. 생각하고 느끼는 대로 말하는 듯했지만, 그는 단번에 판명하고 잡을 수 없도록 말갛고 희부연 안개 뒤에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를 잡으려고 애쓰진 않았다. 그 안개를 걷어낸다고 해서 그 모습이 진짜 그의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때 그 시간에 머물렀던 강필석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만 자신 있게 전하겠다.

 

 

삶을 움직이는 힘이 사랑이라면


지난 겨우내 무거운 코트를 입고 러시아를 누비다 돌아오자마자, 강필석은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우산을 받쳐 들었다. 겨울과 여름 사이에서 사라져버린 봄처럼, <닥터 지바고>와 <번지점프를 하다>에 참여하는 사이, 그는 쉴 틈이 없었다. 일주일만 쉬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솔직한 마음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금요일 오후에 카페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그는 연신 미소를 지으며 카페와 테라스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예요. 여행 온 것 같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렇게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만 해도 좋잖아요.”


봄이 사라졌다는 아쉬움의 말들이 많아도 누구에게나 봄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듯이, 그 역시 그만의 봄을 흘려보내지 않고 있었다. “쉬면서 대본을 다시 천천히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사실, 지금 그런 시간을 갖고 있는 셈이에요. 연습 초반부터 모든 에너지를 다 쏟고 있진 않거든요. 아직까지는 조금 떨어져서 한 발짝씩 들어가고 있어요.” 과거에 연기했던 인물이지만(강필석은 <번지점프를 하다>의 창작팩토리 시범 공연에 참여했다) 반 년 동안 극단적이고 무자비한 혁명군의 외피를 입었던 그가 순수하고 애틋한 사랑을 간직한 국어 교사로 돌아오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의 몸 안엔 아직 파샤나 스트렐리코프의 피가 남아 있는 상태, 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인우를 다시 만나고 있다. 장기간 공연했던 전작에 대한 아쉬움도 클 텐데, “워낙 좋아하는 캐릭터가 기다리고 있어서 쿨하게 보내줬다”며 수줍게 웃었다.


<닥터 지바고>의 파샤와 <번지점프를 하다>의 인우는 겉으로 보기엔 굉장히 다른 캐릭터다. 하지만 그 둘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오는 것이 사랑이라는 점이 공통적이다. 그간 강필석이 쌓아온 이미지를 고려할 때, 그의 인상은 운명적인 사랑을 믿고 따르는 인물에 무난히 겹쳐진다. 그러니 제작진들은 그런 역할에 그를 캐스팅하고, 관객들 역시 그의 연기를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강필석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했다. “본인이 생각할 때는 이런 역할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어울리는 것 같아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껄껄껄 웃으며 다시 한 번 반복해 답했다. 질문을 바꾸어 공감하냐고 묻자, 역시 분명하게 말했다. “네, 공감해요. 극중 인우도 스스로에게 놀라지만, 어떤 확신이 들었을 때 모든 걸 다 제쳐놓고 그 길을 가잖아요.”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도 그럴 것 같아요.” 그 다음에는 “모든 사람의 인생은 다 사랑과 맞닿아 있어서, 모든 감정은 다 거기서 나오는 것 같아요”로 운을 떼며, 스스로 “너무 사이비 종교인 같다”면서도 삶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마지막엔 “나,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라며 수줍게 발뺌을 했지만, “운명을 믿으세요? 저는 믿거든요”라며 인우를 변호하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나와 상대의 인연에 대해 생각해봤을 것이다. 강필석은 <번지점프를 하다>를 통해 운명적인 사랑을 있게 한 인연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연기하는 배우의 믿음이 이리 강할진대 관객들은 마치 독실한 신자처럼 그의 무대에 빠져들 수밖에.

 

 

무대를 움직이는 힘은 불안함이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강필석의 연인으로 출연하는 전미도는 전작에서도 그와 함께 호흡을 맞췄다. 반년이 넘도록 동고동락하고 있으니 끈끈한 찰떡 호흡이 기대된다. “미도랑 연습할 때, 우리가 극중 상황과 대사를 알고 있으니, 생각해서 움직이지 말고 그냥 해보자고 하곤 해요. 매번 새로운 무언가가 발생해요. 그것들 중에 좋은 것은 기억하려고 하고요. 그런데 연출가인 아드리안도 이런 걸 좋아하더라고요.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싶지 않대요. 항상 무대 위에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 조금씩 달라지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요.”


배우는 작품을 충분히 분석하고 연구한 후에 머리로 이해한 것을 표현해낼 수도 있고, 그 순간의 감각과 감정에 충실하게 연기할 수도 있다. 개인의 성향 차이 때문일 수도 있고, 작품의 성격에 따라 다른 방식의 연기가 요구될 수도 있다. 굳이 따져본다면, 강필석은 생각하고 분석해 연기하는 유형처럼 보였다. 그 스스로도 예전에는 그러했다고 고백했다. “뭐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좋은데, 제 스스로 (그 흐름을) 막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느 한 쪽으로 보내려고 (의도하고 연기)하지 않았나.” 지난해에 강필석은 휴식기를 가졌고, 연극 <레드>로 무대에 다시 돌아왔다. 그 작품에 참여하는 태도는 전과는 조금 달랐다. 한 장면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만 파악하고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지 않은 채 그 순간의 판단에 맡겼다. 그러던 중 우연히 <레드>의 연출가 인터뷰 기사를 읽게 되었단다. 연출가에게 ‘당신이 작품 활동을 계속하도록 만드는 힘은 무엇이냐’는 질문이 주어졌고, 그는 ‘불안함’이란 답을 돌려주었다. “어, 이게 무슨 말이지? 생각했어요. 그는 안정적인 상태는 재미없다며, 항상 불안함을 즐긴다고 했어요. 무대 위의 배우가 어디로 튈지 몰라야 한다고요. (말 그대로) 불안하다는 게 아니라, 무대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배우조차 모르고 그 순간을 살아야 한다는 거죠. 그러고 나니 제 연기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상대에게 집중하게 됐어요.”


우리가 무대에서 볼 작품이 어떻게 흘러서 결국 어디로 가닿을지는 이미 텍스트가 말해주고 있다. 강필석은 텍스트가 말하는 것을 관객에게 강요해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공연을 보면서 느끼는 재미는, 희곡의 온전한 재현이 아니라 희곡에 더해진 불안함을 보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보았다. 완벽한 한 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라면 희곡을 읽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니까. “뭐가 좋은지 모르겠어요. 또 생각이 바뀔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래요. (웃음) 그 순간, 순간에 집중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강필석은 지금 ‘불안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중이다. 무대에서 살아 있다는 기쁨은 그의 것인 동시에 관객의 것이 될 것이다.


그날의 첫 손님으로서 카페의 주인인 양 그 공간을 홀로 누렸던 그는 조금씩 늘어가는 손님들을 보며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손님이 많아지기 시작했어요. 여기도 결코 우리만의 공간이 아니에요.” 그의 휴식 또는 여행을 온전히 책임지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해지려 했다. 그는 이야기를 숨기려 하지도 않았지만, 우리가 모든 말을 다 나눌 수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그를 다 알지 못했다. 하지만 두 시간여의 인터뷰보다 그를 더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무대 위에서가 아닐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6호 2012년 7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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