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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리뷰]무대로 간 센과 치히로…전통과 현대의 조화

글 |나혜인(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토호 주식회사 2024-06-03 2,292

“치히로, 건강하게 지내 또 만나자” 덜컹거리는 차 안, 분홍색 꽃다발에 꽂힌 카드가 흔들린다. 꽃다발을 두 손에 꼭 쥔 소녀는 속상한 기색이 역력하다. 도시에서 시골로 원치 않는 이사를 해야 하는 탓에 마음이 퍽 불편한 탓이다. 그 속내를 모르는 야속한 차는 빠른 속도로 길을 내달린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포장도 되지 않은 산길이 나온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더욱 심해지고 몸은 마구 흔들린다. 비명까지 새어 나온다. 그러다 곧 연극의 제목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せんと千尋ちひろの神隠かみかくし)>이 스크린을 수놓는다. 제목은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센과 치히로에서 ‘千’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렇게 남겨진 두 개의 ‘千’은 하나로 겹쳐져 일본 근대 건물 형태를 띤다.

 

이어 갑작스럽게 등장한 거대한 구조물에 세 사람의 몸이 앞으로 확 쏠린다. 멈춰선 차 앞에는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는 터널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으슥한 분위기에 안절부절못하는 소녀와 달리 부모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한 채 터널 내부로 향한다. 소녀는 애타게 부모를 불러보지만 겁쟁이 취급을 받을 뿐. 결국 소녀 ‘치히로’도 터널 입구에 발을 들여놓는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그 시기를 가득 채운 영화가 재생된다. 나에게 있어 그 시절은 지브리 스튜디오로 가득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모노노케 히메>, <고양이의 보은>, <천공의 성 라퓨타>, <하울의 움직이는 성>, <마녀 배달부 키키>, <벼랑 위의 포뇨> 등 미야자키 하야오만의 상상력은 많은 이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를 번복하고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질문했을 때는 그와 함께 나이를 먹은 이들이 80대 노인의 삶과 자신의 삶을 겹쳐봤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모두가 ‘대표작’으로 꼽힐 만큼 흥행력과 작품성 고루 갖췄지만 가장 성공적인 작품 하나를 택한다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2020년 인기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의 극장판인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 편>이 개봉하기까지 약 20년간 역대 일본 영화 흥행 수익 1위(316억8,000만 엔), 글로벌 수익 1위(3억9,558만 달러)를 지켰다. 2001년 개봉 후 23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TOP2를 유지하고 있다. 국내 개봉 당시에도 큰 사랑을 받고 현재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한국 흥행 6위를 기록 중이다. 제75회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 제5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 등을 거머쥐며 작품성 또한 전 세계의 인정을 받았다.

 

무대화가 결정된 것은 개봉 2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일본 최대 콘텐츠 제작사 토호가 창립 90주년을 기념한 연극 제작을 공표했고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다. 여기에 ‘천년돌’이라 불리는 일본 최고 청춘스타 하시모토 칸나가 주인공인 치히로 역을 맡는 소식이 더해져 일본 전역이 술렁였다. 유바바/제니바 역은 원작 성우 나츠키 마리를 캐스팅해 높은 싱크로율을 기대케 했다. 연출은 국내에서도 유명한 뮤지컬 <레미제라블> 연출가 존 케어드가 이름을 올렸다. 거장과 거장의 만남으로 기대를 모은 공연은 초연 당시 단 4분 만에 모든 좌석이 동났다. 이후 싱크로율을 향한 극찬이 쏟아지며 재공연까지 전국 공연 전 회차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일본 공연사를 담아낸 정교한 현대극

공연은 1막 85분, 2막 75분 총 160분(인터미션 제외)으로 진행된다. 원작 러닝타임 126분에 비해 약 30분 길어진 셈이다. 원작의 흐름을 유지하면서 몇몇 새로운 장면을 추가하다 보니 장장 3시간에 이르는 작품이 탄생했다. 공연은 연극 장르로 구분하기는 하지만 일본 연극 특성상 음악극에 가깝다. 배우들은 클라이맥스와 감정이 부각되는 부분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1막 말미 치히로가 오물신을 해방하는 장면은 <레미제라블> 못지않은 뮤지컬 모멘트가 펼쳐진다. 환희의 부채춤을 추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덩달아 자리를 박차고 춤추고 싶어진다.

 

작품에는 일본 전통극의 특징이 곳곳에 드러난다. 여러 성인들을 표현하는 데는 흔히 이야기하는 인형극, 퍼펫극과 동일한 일본의 꼭두각시극 ‘분라쿠’가 주로 사용되고, 무대 장치 이동과 꼭두각시 움직임 등 다양한 연출을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코우켄’이 그림자처럼 무대 위를 누빈다. 배우들이 등장하는 측면 무대는 대기실과 무대를 잇는 다리인 ‘하시가카리’, ‘하나마치’를 연상케 한다. 퍼펫과 일본의 가면극 ‘노’를 접목한 장면들도 눈길을 끈다.

 

 

가장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가오나시의 움직임이다. 극 중 가오나시는 자아 없이 타인에게 의존하는 현대인을 상징하는 캐릭터다. 탐욕을 미끼로 타인을 삼킨 가오나시는 모든 것을 뱉어낸 뒤 깨달음을 얻는다. 애니메이션이 물 위를 떠다니는 가오나시를 통해 이를 표현한다면 무대 위 가오나시는 무용으로 자신의 고통과 허무를 드러낸다. 검은 천에 갇힌 손과 발이 허공을 가르는 모습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를 극대화한다. 이러한 가오나시의 움직임은 가부키, 노, 현대무용이 합쳐진 일본의 전위 예술 ‘부토’가 엿보인다. 국립극장에서도 선보인 적 있는 ‘부토’는 1960년대에 등장해 전 세계 찬사를 받은 일본의 현대무용 장르 중 하나로 죽음을 주제로 한다. 기나긴 전쟁이 가져온 정신적 황폐가 몸짓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담긴다.

 

‘부토’는 원작의 배경과 엮어 볼 수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탄생한 시기는 일본 대공황이었다. 버블 경제 부모 밑에서 자란 젊은이들이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다. 이런 시기에 등장한 가오나시는 관객의 공감을 끌어냈다. 최선을 강요받는 젊은이들의 지친 마음을 거울처럼 비췄고, 이들은 가오나시에게 순수한 친절을 베푸는 치히로를 보며 일상의 고통을 치유했다. ’부토‘로 구현된 가오나시의 한은 1960년대 청년과 2000년대 청년, 팬데믹 이후 혼란을 겪고 있는 2020년대 청년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분라쿠’는 영국의 퍼펫과 만나 현대적으로 재해석된다. 퍼펫 디자인은 <동물 농장><인어공주><피노키오> 등 ‘탈인간 장르’를 무대화한 퍼펫 디자이너 토비 올리에가 함께했다. 유바바의 분노를 표현하는 거대한 얼굴, 치히로가 쫓는 푸른 용, 치히로 무릎까지 오는 작은 개구리 직원, 고이노보리가 연상되는 하늘을 가르는 신과 용들까지. 해체와 결합을 반복하는 퍼펫들은 유연하게 움직이며 극의 판타지적인 분위기를 배가한다. 그중 클라이맥스를 담당하는 푸른 용은 길이만 4M에 이르고 머리에서부터 시작해 척추 전체를 뒤덮는 털은 4000여 개에 달한다. 토비 올리에는 용의 관절을 세밀하게 조각내 실제 용이 움직이는 것 같은 부드러운 움직임을 선보인다.

 

 

고증과 모방 딜레마

원작이 있는 작품을 무대화하는 데 있어 연출가의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다. 원작을 그대로 따를 것인가. 원작을 새롭게 꾸밀 것인가. 소설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공백이 많아 후자를 택하기 쉽다. 그러나 영상 매체는 이미 형성된 기조를 해체 및 재조립하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기존 팬덤을 만족시키는 선택지인 전자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팬덤은 원작 고증이 잘 될수록 만족하지만 연출가 입장에서는 ‘재생산’이라는 딜레마가 남는다.

 

존 케어드가 몸담고 있는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RSC)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이웃집 토토로>를 무대화한 경험이 있다. 펠림 맥더모트가 연출, 히사이시 조가 작곡, 톰 모튼 스미스가 각본을 맡은 뮤지컬 <이웃집 토토로>는 일본 문화와 타국 시각이 적절히 섞인 각색으로 호평받았다. 반면 존 케어드의 선택은 ‘원작’이었다. 애니메이션의 대사를 빠짐없이 차용한 것은 물론 시시각각 변화하는 배경, 인물의 동선, 인물 관계에서 나오는 감정 등 모든 부분을 원작에 기댔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현대극인 <이웃집 토토로>와 비교해 뼈대부터 살갗까지 동양 문화가 깊숙이 박혀있어 타국의 연출가가 색다른 시도를 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일본의 목욕 문화가 대표적으로, 해외 창작진들은 공연 제작에 앞서 일본 목욕 문화를 이해하는 과정을 가져야 했다. 이에 존 케어드는 원작을 새롭게 꾸며내는 대신 공백으로 남아있는 시작과 끝에 변화를 줬다. 이는 관객을 단번에 무대로 끌어들이고 강력한 여운을 남기는 장치로 사용된다.

 

원작을 재현한다는 약점은 오히려 강점을 낳기도 한다. 애니메이션 한 컷 한 컷에 집중한 연출 덕에 눈을 뗄 수 없는 장면들이 만들어지는 것. 회전 무대와 세트 피스, 앙상블을 이용해 장면 변화가 잦은 원작 설정을 획기적으로 표현하고 무대를 2~3층 객석까지 확장해 깜짝 놀랄 만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영상 사용을 최소화하고 배우와 소품만으로 원작을 재구성하면서 연극의 기원을 꿰뚫기도 한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와닿는 순간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성공적인 일본 공연을 통해 런던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런던 공연은 지난 4월 2,300여 석 규모의 런던 콜로세움에서 개막했다. 일본어(영어 자막)로 진행되고 있음에도 대부분의 회차가 매진에 가까운 티켓 판매를 기록해 8월 24일까지 5주 연장을 결정했다. 일본 현대극이 5개월간 해외 상연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일본 공연도 계속된다. 6월에는 오사카 우메다 예술극장, 삿포로 문화예술극장 히타루 순회공연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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