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연 뮤지컬 평론가가 매월 주목할 만한 뮤지컬계 이슈를 심도 있게 들여다봅니다.
‘동시대성’은 익숙한 것을 질문하고 성찰함으로써 현재와 소통의 통로를 만드는 가치라 할 수 있다. 동시대성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지금 이 시대’의 특성과 경향, 그리고 문제의식과 감수성을 복합적으로 품고 있는 개념어로 인식된다. 철학자 아감벤은 “현재의 어둠 속에서 우리에게 도달하려 애쓰지만 그럴 수 없는 빛을 지각하는 것”이 동시대인이 되는 의미라는 메시아적 관점을 보여주기도 했다.
공연에서 동시대성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가능하게 하는 지렛대와 같다. 뮤지컬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 극장에 올려져 있는 작품들은 거시적 관점에서 모두 뮤지컬이 현재의 관객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물이다. 2023년의 <지하철 1호선> 공연과 2025년 <사랑을 비를 타고> 30주년 기념 공연에서 유독 도드라지는 ‘1990년대의 풍경’도 당대의 리얼리티를 다룸으로써 작품의 뮤지컬사적 가치를 조명하려는 의도의 반영일 수 있다. 두 공연은 1990년대를 ‘지금 이 시대’에서 마치 만화경으로 들여다보는 듯 아카이빙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파편처럼 튀는 햄릿의 내면
이런 점에서 이모셔널씨어터의 <보이스 오브 햄릿>(2025. 5. 16~6. 28, 국립극장 하늘극장)은 AI를 뮤지컬 창작에 활용함으로써 ‘대본과 음악(score) 개발의 층위’에서 동시대성을 추구한 작품으로 주목된다. 공연은 80분 동안 햄릿의 내면을 ‘록 콘서트’ 형식의 1인극으로 펼쳐놓으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원작에서 햄릿은 전쟁이 발발할 듯한 정치적 긴장과 흥청거리는 덴마크의 궁정 문화 속에 놓인 비텐베르크 대학 유학생으로 그려진다. 노르웨이의 왕은 햄릿 선왕과의 전쟁에서 패해 땅을 빼앗겼고, 왕의 조카이자 젊은 왕자 포틴브라스는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덴마크에 서신을 보낸 상태다. 이 와중에 햄릿의 삼촌 클로디어스는 형을 죽인 후 왕비 거트루드와 결혼하여 자신의 왕위 계승을 공고히 한다. 근대적 지성을 추구하는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유학하다 본국 덴마크로 돌아와 아버지의 장례식과 어머니의 결혼식에 참석한 햄릿은 본국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이면에 클로디어스의 왕위 찬탈이 있었음을 알고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고뇌에 빠진다. 아버지 유령이 내린 ‘복수의 명령’은 지성인 햄릿의 고뇌를 심화시키고, 복수를 위한 그의 계획에 광기와 우울을 스며들게 만든다. 우발적인 폴로니어스 살해와 오필리어의 죽음은 햄릿의 내면을 더욱 뒤흔든다.
<보이스 오브 햄릿>은 위와 같은 갈등 상황과 대결 국면에서 억압된 햄릿의 내면을 다룬다. 공연은 햄릿의 내면을 ‘악몽 속에 갇힌 상태’로 규정하고 행동보다 사색에 능했던 햄릿의 ‘이면’에 집중한다. 상황에 반응하는 햄릿을 넘버별로 조명함으로써 직설적이고 직관적으로 표현되는 햄릿의 이면은 낯설지만 강렬하다. 무대 위 배우는 형체 없는 햄릿의 기억 덩어리로 등장하여 점차 우리가 아는 햄릿으로 구체화 되고, 최후에는 죽음으로 파멸하고 영혼으로 기화함으로써 또다시 형체를 상실한다. 따라서 배우는 햄릿 자체라기보다 햄릿의 기억이 만드는 환영에 가깝다. 상황에 대한 그의 반응은 분절되어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중첩되어 무대 위에 가라앉아 하나의 ‘이미지’로 전달될 뿐이다. 무대 위에 극적인 명암을 만드는 조각난 LED 패널과 수십 대의 무빙라이트는 햄릿 내면의 이미지를 총체적으로 시각화한다.
총 21개의 넘버를 기능으로 나눠보면 공연의 콘셉트는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먼저, 전체 넘버 중 예외적으로 햄릿의 외부를 향하는 5개의 넘버는 햄릿이 처한 극적 상황을 간단하고 빠르게 구축한다. 가령, 삼촌 클로디어스의 대관식 풍경을 비판하는 2번 ‘축배를 들어’, 유령을 만나 복수를 다짐하는 5번 ‘가까이, 더 가까이’, 오필리어에게 진심을 전하는 6번 ‘그날들은 우리의 것’, 햄릿의 복수를 지연시킨 클로디어스의 기도 12번 ‘속죄’, 어머니를 배신자로 규정하고 정죄하는 13번 ‘돌이킬 수 없는 배신’이 그것이다. 핵심은 이러한 극적인 전제 위에서 나머지 넘버들이 만드는 ‘흐름’이다. 햄릿의 상태는 그의 내부로 향하는 넘버의 흐름 속에서 맥락을 취한다. 우울감에 빠져 현재 처한 상황을 회의하고 질문하다 복수와 혐오의 정서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워하던 햄릿은, 클로디어스를 죽인 이후 스스로 복수의 대상-살인자가 되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다. 레어티즈와의 결투로 소멸한 이후 결국 남는 것은 햄릿의 ‘파괴된 영혼’과 ‘사라진 꿈’이다. 격앙되었던 배우의 마지막 호흡이 허무함 속에 떨어지는 아이러니가 무대에 가득하다.
전반적으로 이미지로 감각되는 햄릿은 인더스트리얼 록으로 편곡된 넘버와 결합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인더스트리얼 록은 공연의 관점을 드러내는 통로와 같다. ‘인더스트리얼 음악’은 1970년대에 독일을 중심으로 ‘노이즈’와 같은 실험적 요소를 강조한 뉴웨이브계 록으로서, 구체음악과 전자 기술의 발전이 열어놓은 음악적 가능성에 기반을 두고 악음악(樂音樂)을 넘어 노이즈의 인공성을 음악 안에 포괄했다. 노이즈의 사용 외에도 짧은 라인 및 사운드의 반복, 신시사이저의 사용 등이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특징이다.1) <보이스 오브 햄릿>은 베이스와 일렉트릭 기타, 드럼, 키보드와 무그(Moog) 그리고 첼로로 구성된 밴드를 온스테이지 상태로 두고 사운드스케이프를 만든다. 특히 신시사이저 ‘무그’는 강렬한 파편처럼 튀어 오르는 햄릿의 내면을 인더스트리얼 록 사운드로 표상하는 핵심 도구다. 반대로 햄릿이 가장 순수한 상태로 존재하는 넘버 6번은 후반부 첼로 솔로로 진행되는 왈츠 구간이 핵심이며, 넘버 12번은 클로디어스의 속죄의 기도를 오르간 사운드의 챈트(chant)로 담는다.
이처럼 공연은 관점과 스타일 면에서 통합되어 있다. 사실 이는 모든 뮤지컬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바이므로 특별히 새롭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이스 오브 햄릿>의 ‘통합’이 유달리 낯설어 보이는 것은 ‘AI 뮤지컬’이라는 점 때문이다. ‘인간’의 프롬프터 엔지니어링과 음악 수퍼바이징이 창작을 완성시켰지만, 공연 전체가 마치 ‘언캐니 밸리’로 보일 정도로 AI의 작업은 착시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착시 효과는 공연 창작에서 인간 중심의 창의성이 효율성에 밀릴 수 있다는 공포에 근거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지식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과 저작권(Copyright)이 어디에 어떻게 귀속되는가의 문제도 간단하지 않다.
HAMLET.AI
따라서 초점을 조금 바꿔볼 필요가 있다. AI 뮤지컬이 지향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더 근본적으로, 한국 시장에서 AI 뮤지컬 작업은 꼭 필요한 것일까? 이 작업은 어떤 ‘가치’를 내포할 수 있을까, 혹은 내포해야 하는 것일까? 이 거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4차 산업, 기술과 예술 같은 화두로 돌아가는 것은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지점에서 논의를 맴돌게 할 수 있다. 촛불에서 가스등, 전기로 기술이 변화하는 동안 공연의 무대와 연출 역시 지속적인 변화를 거듭하며 여러 미학적 논의를 낳았음은 주지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수행되고 있는 해외의 프로젝트는 실질적인 측면에서 논의를 진전시키는 하나의 참고 사항이 될 수 있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씨어터 & 퍼포먼스 학과(TAPS) 교수이자 2019년에 설립된 스탠포드 인간 중심 인공지능 연구소(Stanford Institute for Human-Centered Artificial Intelligence/HAI) 겸임 교수인 마이클 라우(Michael Rau)의 작업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2) 그는 연극, 오페라, 디지털 미디어 프로젝트를 전문으로 하는 라이브 퍼포먼스 연출가로서 퍼포먼스 메이킹(Performance-making) 분야를 연구하며 가르치고 있다. 현대 삶의 복잡성을 연극 무대에 반영하는 방법을 오랫동안 탐구해 온 그는 현재 세 가지 층위에서 AI를 연극에 활용하는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다.
첫째, 이미지 생성(Image generation)이다. AI 기반 이미지 생성기로 라이브 공연의 영상 피드를 받아 특정 프롬프트를 해석해 배우들의 영상을 변형한다. 이렇게 조정된 AI 영상은 실제 공연에 투사되어 마치 꿈속 장면이나 대체 현실, 혹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만드는 시각적 효과를 창출한다. 둘째, 대규모 언어 모델(LLM) 실시간 대본(Live-scripts)이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 서 있는 상태에서 AI가 실시간으로 생성한 대사를 이어폰을 통해 전달해 주는 방식이다. 이는 작가가 쓴 대본을 배우들이 암기하고 연습해서 여러 번 반복 공연하는 전통적인 방식에 유연성과 즉흥성을 더할 수 있다. 반복 속에서 일관성을 추구하던 연극이 매 공연, 매 리허설마다 ‘바뀔 수 있는 연극’이 된다는 개념이다. AI가 생성한 대본은 관객이 LLM에 제안한 내용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공연이 고정된 위계 구조에서 벗어나 그 순간의 네트워크나 관계성으로 구성된다는 의미로 더 확장될 수 있다. 셋째, 포즈 분석(Pose analysis)이다. 이는 일종의 학술 분석 도구로서, AI 알고리즘을 이용해 녹화된 공연의 모든 프레임에서 배우들의 신체 동작을 3D 이미지로 시각화한다. 산출된 결과는 영화 연구자들이 배우의 안무나 움직임을 정밀하게 분석하거나 정치학자들이 연설 중인 정치인의 제스처 및 비언어적 표현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라우 교수가 AI 연극을 시도하는 이유는 그가 생각하는 ‘좋은 연극’의 개념 때문이다. 그는 좋은 연극이란 지금 현실의 삶을 반영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현재 인간의 경험이 기술에 의해 크게 매개되는 만큼 무대 위에서 그러한 현실을 실제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이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탐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무대 위에서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연극과 기술을 통합하는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작업의 핵심은, 공연 창작의 중심에 언제나 인간이 있으며 AI는 인간의 작업을 향상시키거나 흥미롭고 새로운 요소를 더하는 교차점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AI 기술을 통해 특정한 감정, 아이디어, 혹은 정서를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그의 AI 연극 모델은 극작가 마이클 예이츠 크롤리(Michael Yates Crowley)와 함께 독일 도르트문트에 위치한 ‘연극과 디지털 연구소(Akademie für Theater und Digitalität)’에서 수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 HAMLET.AI >를 통해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이 연구소는 국제적인 예술 연구 기관이자 네트워킹 허브로, 디지털 혁신, 예술적 연구, 기술 중심의 교육 및 연수를 통해 공연예술의 미래를 실험하고 개발하는 공공기관이다. 두 사람은 연구소의 펠로우로서 ‘울프 359’를 설립하여 서양 연극 중 가장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햄릿>을 실시간으로 운영되는 AI 도구와 접목시켰을 때 어떤 충돌(friction)이 일어나는지 실험하고 있다.
이들은 AI를 <햄릿> 제작에 활용하되 특히 선왕의 유령 캐릭터에 주목하여 AI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지 탐구한다. 크롤리는 철학자 길버트 라일의 ‘기계 속의 유령(ghost in the machine)’ 개념을 작업에 활용하여, 인간이 물리적인 법칙에 따라 작동되는 뉴런과 근육의 결정론적 기계인지 아니면 인간 안에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비물질적 존재-유령이 있는지를 사유한다. 반면 라우 교수는 <햄릿>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축적된 공연과 해석, 관련 담론을 하나의 거대한 ‘유령’으로 보고 이 유산이 AI 알고리즘과 어떤 방식으로 접목될 수 있을지에 관심을 두고 있다. 어찌 되었든 < HAMLET.AI >의 방점은 고전(classic)과 첨단 기술 그리고 인간의 의식과 감정이 서로 접촉하면서 일으키는 충돌과 긴장, 그리고 미적인 아름다움을 포괄하는 데 주어져 있다.
AI 기술과 한국 뮤지컬의 미래
최초로 AI를 뮤지컬 창작에 적용한 이모셔널씨어터의 작업은 레퍼토리 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하기 위해 ‘콘텐츠 생산 방식’을 실험한 결과물이었다. 이모셔널씨어터는 <보이스 오브 햄릿>을 포함하여 캐릭터의 내면을 음악으로 펼쳐 보이는 AI 뮤지컬을 ‘보이스 시리즈’라는 테마로 계속 이어갈 예정이다. 이미 AI는 일상에 깊이 들어와 있고 가상은 더욱 정교해지고 있는 시점에서, <보이스 오브 햄릿>은 앞으로 국내에서 수행될 AI 뮤지컬 작업에 방법론과 내용적 층위 모두에서 기준점으로 작용할 것이라 예상된다. 현재 우리는 AI의 도입으로 확장되고 축소되며 수정되고 재통합될 인간의 역할을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 시대적 과제 앞에 놓여 있다.
1) 이세호·이철희,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의 장르별 영화 음악 특징–인더스트리얼 음악적 관점을 중심으로-」, 『한국엔터테인먼트산업학회논문지』, 한국엔터테인먼트산업학회, 2024, 99~101쪽 참고.
2) Stanford HAI, “AI brings new potential to the art of theater”, Stanford Report, 2025. 1. 15. https://news.stanford.edu/stories/2025/01/ai-brings-new-potential-to-the-art-of-theater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