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창작자 최초로 토니상을 수상한 <어쩌면 해피엔딩> 박천휴 작가가 금의환향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언론 앞에 선 그는 “토니상 트로피의 무게만큼 더 열심히 하는 창작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지난 시간의 소회와 더불어 창작자로서의 생각을 꺼내놓았다.
지난달 24일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토니상 6관왕을 기념하는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박천휴 작가와 한국 공연 제작사인 NHN링크 한경숙 프로듀서가 참석했다. 앞서 <어쩌면 해피엔딩>은 지난달 9일 열린 미국 토니어워즈에서 작품상부터 연출상, 극본상, 음악상, 남우주연상, 무대 디자인상까지 총 6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한국을 기반으로 하는 작품, 한국인 창작자의 확실한 쾌거이자 한국 뮤지컬 계에 길이 남을 경사다.
박천휴 작가는 ”(창작 파트너인) 윌 애런슨과 저는 기대를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성격의 사람이다. 기대를 했다가 안 될 경우의 실망감을 두려워하는 편이다. 사랑의 아픔이 두려워서 사랑에 빠지지 않기로 약속한 <어쩌면 해피엔딩>의 클레어처럼 말이다. 그래서 토니상 후보 발표가 났을 때도 정말 기뻤지만, 기대하지 말자고 다짐했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시상식 당일은 정말 정신이 없었다. 기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내가 이렇게 상을 받아도 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복잡미묘한 기분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지난 2016년 한국에서 초연됐다. 영어 버전 공연도 같은 시기에 함께 개발되어 2016년 뉴욕에서 리딩 공연을 진행했고, 당시 브로드웨이의 거물 프로듀서 제프리 리처즈를 만나 본격적인 개발에 돌입했다. 2020년 애틀랜타에서 트라이아웃 공연을 올린 후, 지난 2024년 10월 브로드웨이에 입성했다.
뉴욕에서 유학 생활을 한 박천휴 작가에게도 브로드웨이 시장에서 자리를 잡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뮤지컬을 만드는 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야 하는 일이다. 행성이 오랜 시간이 걸려 제 자리를 찾아가듯 많은 노력이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 그 과정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기 마련인데, 특히 미국에서 저는 이민자 아닌가. 다른 문화, 다른 언어 속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저들의 일부가 될 수는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런 순간을 견뎌내고 나니 이렇게 큰 기회를 얻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저에게는 공연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교육의 과정이었다. 여러 스탭이 세분화 되어 있어서 조심스러운 부분도 많았고, 어디까지가 나의 역할인지 생각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브로드웨이 공연은 한국 공연과는 차이가 있다. 등장인물이 3명에서 4명으로 늘었고, 공연장 규모가 커지면서 무대 디자인 및 연출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으며, 새로 추가된 장면, 넘버도 있다. 다만 여전히 한국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 극 중 일부 단어가 한국어 자막으로 표현되는 점, 올리버의 반려 식물인 ’화분‘을 영어로 번역하지 않고 한국어로 그대로 부른다는 점 등 한국적인 설정은 그대로 가져간다. 원작의 한국적인 감성을 지키기 위해 제작 과정에서 윌휴 콤비가 타협하지 않은 결과물이다. 박천휴 작가는 “한국 관객분들이 한국 공연에 충분히 공감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덕분이다. 그때의 경험이 쌓여있기 때문에 작품의 설정을 바꾸지 않을 수 있었다. 제가 고집을 부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한국의 관객분들”이라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브로드웨이 관객은 <어쩌면 해피엔딩>의 어떤 점에 마음이 끌렸을까? 박천휴 작가는 ”정말 모르겠다“고 웃으면서도 ”결과가 좋으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처음에는 이 작품이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하지 못할 이유라고 꼽혔던 부분을 사랑해 주셨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것, 한국의 로봇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 유명한 원작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오리지널 스토리라는 점 등 말이다. 박천휴 작가는 “한국 팬덤은 ‘헬퍼봇‘, 미국 팬덤은 ’반딧불이‘라고 부른다. 브로드웨이 공연 개막 초기부터 응원해 주신 관객분들의 응원이 저희에게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이번 6관왕 기록을 두고 ’K-뮤지컬의 쾌거‘라 일컫는 이들이 많다. 이에 대해 박천휴 작가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K-뮤지컬이라는 용어는 전 세계적으로 쓰이고 있지는 않다. 다만 개인적인 해석으로는, 극장에서 관객분들이 ’한국에서 온 뮤지컬이야, 한국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이야‘라는 말을 할 때 뿌듯함을 느낀다. 배우들도 대기실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저를 붙들고 ’밥 먹었어요?‘라고 묻는다. (웃음) 이민자로서 ’나의 문화’가 어느 순간 ’사람들과 공유하는 문화‘가 된 거다. <어쩌면 해피엔딩>도 한국이 기반이 되어 사람들이 더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작품이 된 건데, 그럼 K-뮤지컬이라고 해도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생각을 전했다.
창작의 원동력에 대해 묻는 질문에 박천휴 작가는 “제일 어려운 질문이다. 그걸 안다면 앞으로도 히트작을 계속 쓸 수 있을 것”이라며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저와 윌은 정말 치열하게 작업한다. 한 글자를 두고 며칠씩 싸우기도 할 정도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게 결국 진심이더라.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겠지’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우리가 서로에게 창피하지 않은 무언가를 만들어 내면 그게 관객분들에게도 납득되는 것 같다”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한국에서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작사가로 활동하다가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난 박천휴 작가. 그 후 광고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뮤지컬 작업을 병행했다. 그는 “어렸을 때는 내가 방황한다고 생각했다. 이러다가 아무것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면 어떡하지 걱정됐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의 다양한 방황의 경험이 공연을 만드는 일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느낀다”고 털어놨다.
앞으로 박천휴 작가는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까. 그는 ”부담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제 식탁 위에 놓인 토니상 트로피를 보면서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부담감에 눌리다 보면 자연스럽지 못한 작품을 쓰게 될 것 같다. 저에게는 다행히 윌 애런슨이라는 창작 파트너가 있으니, 앞으로도 서로 보완해 가면서 작업할 생각“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일단 <일 테노레>와 <고스트 베이커리>가 다시 한국 관객을 만날 수 있도록 작업하고 싶고, 추후 미국에서도 두 작품을 선보이고 싶은 욕심이 있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또 “오리지널 스토리를 쓰는 것에 욕심이 있어서, 앞으로도 마음을 헤집고, 들여다보면서 글을 쓰게 될 것”이라면서 ”저는 외로움에 천착하는 사람이다. 그 외로움에 공감할 수 있는, 위로를 줄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다. 슬픔의 정서에 함몰되지 않는 작품을 쓰고 싶다“고 했다. 그의 꿈은 “이 일을 더 즐기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작업을 하다 보면 외롭거나 슬플 때가 많다. 작가로서 테크닉을 더 발전시켜 슬픈 얘기를 쓸 때도 슬퍼지지 않는 것이 제 꿈”이라고 말했다.
오는 10월에는 한국에서 <어쩌면 해피엔딩>을 만나볼 수 있다. 10월 30일부터 2026년 1월 25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한국 초연 10주년 기념 공연이 열리는 것. 10년 전 <어쩌면 해피엔딩>의 시작을 함께했던 한경숙 프로듀서는 “10주년 기념 공연은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아쉬웠던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계획 중”이라며 “한국 공연은 브로드웨이 공연의 지침서 같은 공연이라고 생각한다. 대본과 음악 자체가 완벽한 공연이다. 두 창작진이 지문 하나하나 섬세하게 담아냈고, 무대에서 구현되어야 할 장면을 디테일하게 적어놨다. 한국 공연은 그러한 감성과 감정을 유지한 채 보완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봐주신 분들에게는 익숙하면서도 반가운 무대가 되고, 이번에 새롭게 보시는 분들에게는 신선한 감성을 드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브로드웨이 버전은 2028년 국내 공연을 목표로 준비 중”이라고 귀띔했다.
박천휴 작가는 “대본이나 음악이 바뀌는 부분은 없다. 10년째 하고 있는 이 공연을 브로드웨이 공연이 호응을 얻었다고 굳이 바꾸고 싶지 않다. 우리의 감수성을 지키면서 다시 한번 한국 관객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설렌다“고 작품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