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더 크리처>는 메리 셸리의 고전 『프랑켄슈타인』의 마지막 장, 북극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박사와 괴물의 이야기를 새롭게 쓴 작품입니다. 소설 속 비극적인 결말과 달리, 뮤지컬은 두 인물의 북극에서의 재회를 새로운 시선으로 해석해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안깁니다. 젊은 감각의 연출을 선보이는 김지호 연출가와 함께, <더 테일 에이프릴 풀스>의 김지식 작가, 유한나 작곡가가 다시 한번 의기투합한 작품입니다.
박사와 괴물, 두 캐릭터를 통해 신과 인간, 더 나아가 존재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작품을 한층 입체적으로 만드는 것은 정교한 무대와 조명 연출입니다. 심장과 혈관, 나무와 덩굴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무대는 ‘생명 창조’의 의미를 강조하고, 북극의 서늘함을 표현하는 차갑고 건조한 색감의 조명은 관객의 몰입을 돕습니다. 작품의 시각적인 매력을 담당한 박연주 무대 디자이너, 정구홍 조명 디자이너에게 몇 개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두 사람이 정성스레 전해 온 답변을 통해 <더 크리처>의 매력을 확인해 보세요. <더 크리처>는 오는 8월 31일까지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공연됩니다.
박연주 무대 디자이너
심장과 핏줄&나무 덩굴&스테인드글라스 구조물이 얽혀있는 무대 디자인이 눈에 띕니다. 전체적인 무대 디자인 콘셉트에 관해 설명해 주세요.
이번 무대 디자인은 ‘북극’이라는 공간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더 이상 인간이 나아갈 수 없는 세상의 끝이자 시작점으로 상상하며 출발했습니다. 이곳은 금기를 어긴 인간에게 내려지는 시험의 길, 불완전함을 감수한 채 삶을 택한 선택의 길, 그리고 결국 책임을 함께 짊어지는 길이 교차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런 길 위에서, 버려진 채 박사를 기다리는 괴물은 어디에 있을까 고민하다, 북극의 끝 어딘가, 얼어붙은 동굴 속 공간을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이 공간은 괴물이 상처를 어루만지며 기다리는 ‘실낙원’이자, 두 인물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주하는 장소입니다. 그만큼 외부로부터 차단되고, 내면에 집중되는 구조를 원했고, 그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스테인드글라스로 가득한 교회당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배경 위에 세 가지 상징을 녹였습니다.
#심장과 핏줄
중심 구조물인 얼어붙은 심장과 그것에 연결된 핏줄처럼 뻗은 붉은 뿌리는 생명의 근원과 흐름을 상징합니다. 차가운 동굴 속에 드리운 이 뿌리들은 마치 혈관처럼 연결돼 있고,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붉은 조명이 더해져 생명이 깨어나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구현합니다.
#나무 덩굴
무대를 뒤덮은 넝쿨은 나무의 뿌리인 동시에 혈관과도 같아 보이도록 디자인되었습니다. 이는 창조와 생명의 근원,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의 유기적인 연결성을 상징합니다. 얼어붙은 뿌리가 세상의 끝을 뒤덮은 형상이 마치 낙원의 이면, 혹은 우리가 잃어버린 에덴의 잔재처럼 느껴지기를 바랐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
닫힌 동굴 같은 공간 안에서, 빛은 매립된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해 선택적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이는 신성한 공간에서의 계시과 구원, 그리고 피조물이 창조자를 마주치는 순간의 존엄한 감정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는 장치입니다. 빛은 공간 전체를 덮지 않지만, 필요한 순간에만 찬란하게 드러내며 감정을 집중시킵니다.
결국 이 무대는 인간과 신, 창조자와 피조물, 부모와 자식 사이의 끊을 수 없는 연결성을 시각화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얼어붙은 뿌리와 흐르는 피, 닫힌 동굴과 비치는 빛 - 그 모든 것들이 ‘책임’과 ‘기다림’, ‘탄생’의 순간을 동시에 품고 있기를 바랐습니다.
공간감을 확장한 곡선 무대, 무대 양쪽에 놓인 촛불, 무대 중앙에 위치한 단상 등 무대 구조물 및 소품에는 어떤 의도를 담고자 했는지 이러한 요소가 관객에게 어떤 인상을 주길 바랐는지 궁금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전체 무대는 동굴이라는 큰 구조적 이미지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천장에서부터 무대를 감싸듯 내려오는 구조와, 함께 뻗어 내린 뿌리의 방향성이 더해지며 자연스럽게 곡선이 강조된 공간으로 발전하게 되었어요. 직선적인 구조보다 감정의 결과 생명의 흐름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형상이기도 했고요. 무대 양옆에는 글로시한 재질의 반사 벽을 사용했습니다. 구조적으로는 극장의 전폭을 다 쓰기보다는 집중도와 시선 흐름을 유지할 수 있는 범위로 공간을 조정하고자 했고, 단순한 블랙 막 대신 반사 재질을 선택한 것은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공간감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빛이 스쳐 갈 때마다 어딘지 모를 분위기를 더해주는 역할을 기대했죠.
그리고 그 공간 안에 배치된 촛불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첫째는 괴물이 박사를 오랜 시간 기다려온 시간의 무게를 담기 위해서입니다. 소품 팀에서 정성껏 만든 촛농의 층층이 쌓인 질감은 그런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도와줍니다. 둘째는, 신의 존재가 드러날 때 성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장치로도 활용됩니다. 조명이 촛불과 만나며 공간이 바뀌는 느낌을 주고, 관객이 감정적으로 더 몰입할 수 있도록 이끕니다. 마지막으로 무대 중앙의 단상은 기능적인 구조물입니다. 특별한 상징보다는 배우의 액팅을 보조하기 위한 위치와 높이로 설계했어요. 다만 동굴이라는 전체 공간에 어울릴 수 있도록 자연석 같은 질감과 비워진 구조를 고민했고, 무대가 답답해 보이지 않도록 시야를 고려해 디자인했습니다. 사실 작업을 하다 보면 머릿속에 수많은 이미지와 감정들이 동시에 떠올라 ‘이게 맞는 것 같아’라는 감각에 이끌려 손이 먼저 움직일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질문을 통해 다시 정리하다 보면, 저 스스로도 제 작업을 되돌아보게 되는 좋은 시간이 되네요.
이번 <더 크리처>의 무대 디자인을 구상하기 위해 대본을 본 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무엇이었나요. 또, 이러한 생각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무대로 완성되었나요.
저는 작업을 하며 처음 대본을 읽을 때는 분석을 위한 독해보다는 감정적으로 그냥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싶어 합니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님의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였습니다. 괴물이라는 존재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그 감독님 특유의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색감, 그로테스크하지만 아름다운 분위기가 이 작품과 어딘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시 영화를 찾아보기도 했고, 디자인 초반에 그 기묘한 감정을 참고하고 싶었어요. 본격적인 디자인 구상에 들어서면서는 그런 감각적인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작품만의 주제를 어떻게 시각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됐어요. 그러다 자연스럽게 ‘뿌리’라는 키워드에 도달했고, 생명의 근원, 피와 심장, 존재의 연결 같은 상징들을 중심으로 지금의 무대 구조가 만들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더 크리처>만의 이야기와 정서에서 출발했지만, 그 안에 담긴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이나 인간적인 슬픔과 따뜻함 같은 감정들이 제 작업에 큰 영향을 주었고, 델 토로 감독님의 작품 역시 그런 감정을 확장시키는 좋은 출발점이 되어준 것 같아요.
사진: 박연주 무대 디자이너 제공
이번 작업 과정에서 특별히 영감을 받은 대상이 있나요?
위의 질문들에서 말씀드린 모든 것들이 특별하였는데요. 마지막까지 키 포인트로 남은 영감은 역시 뿌리였던 것 같아요. 우리 무대에서 보이는 모습이 아래로 자라 나온 낙원의 이면이라면 반대편은 어떤 모습일지도 문득 궁금해지네요. 제가 생각한 무대 콘셉트와 무대를 준비하며 영감받은 대상들이, 공연을 보신 관객분들에게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구홍 조명 디자이너
서늘하고 어두우면서도 날카로운 느낌의 조명이 인상적입니다. 전체적인 조명의 톤을 어떤 느낌으로 잡고자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괴물은 인간과의 다름을 알고 인간이 없는 곳을 찾아 떠났고, 그 괴물을 창조해 낸 박사는 책임감과 두려움, 연민으로 인해 그를 찾아 북극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세계가 북극이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감정까지도 차갑고 서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야 인간의 숨겨진 내면부터 차가운 공기, 긴장감, 악에 받친 숨소리까지 시각적으로 보이며 관객의 깊은 몰입을 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차디찬 인간의 내면, 악에 받친 대립을 표현해야 하고, 움직임이 한정되어 있는 무대이기에 시간의 흐름과 주인공들의 감정 변화를 살리기 위하여 최대한 차가운 색으로 터치를 했고, 날카롭고 서늘함이 쭉 이어지도록 톤앤매너를 유지했습니다.
조명을 적재적소에 사용해 캐릭터를 강조하고, 인물 간의 긴장감을 강조하는 점이 돋보였습니다.극 중 조명이 어떤 역할을 하길 바랐나요.
작품의 날카로움, 차가움을 유지하고, 공연의 스토리가 입체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조명을 설치했습니다. 더 나아가 조명을 통해 판타지한 장면의 매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와 작품의 분위기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빛의 색감을 그대로 유지하는 등 방향성을 잃지 않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고 디자인했습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박사와 괴물의 신경전,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자책, 측은함, 상처에 빛을 더해 관객이 빠져들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것이 조명의 역할입니다. 관객분들이 공연을 통해 상상 속의 세계를 눈으로 마주하는 그때, 조명 역시 빛으로 인물의 감정을 나타내고,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무대에서의 빛은 또 하나의 해설입니다. 저는 이 해설을 관객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관객분들이 눈여겨 봐주었으면 하는 장면과 그 이유를 소개해 주세요.
M4 신이시여! 1
박사와 괴물의 만남 속에서 둘의 첫 대립이 잘 보이는 장면이라 생각합니다. 박사는 자신이 살아갈 의미가 없어 죽길 바라지만 괴물은 본인이 만들어진 이유를 듣기 위해 죽길 원하는 박사를 방해합니다. 신이라는 보이지 않은 존재가 세트 뒷부분에서 빛으로 보이길 원했고, 그래서 빛의 방향과 밝기로 표현하였습니다. 강한 라이트의 빛의 선으로 괴물의 힘을 보여주고 박사가 괴물에게 제압되는 장면을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M7 실험일지
박사가 실험을 통해 생명 창조를 하는 장면입니다. 레이저의 사각 틀을 사용하여 실험 장면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조명 틀 안에서 안무를 하고, 실험일지 속의 내용을 표현하는 등 마치 영화처럼 프레임 속에서 장면을 연출하고자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박사가 자신의 피를 괴물에게 보내는 안무에서 피가 괴물에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도록 레이저 조명을 활용했습니다.
M8 참된 기쁨이여, 더 없는 행복이여!
M7 ‘실험일지’에서 바로 이어지는 넘버이자 괴물의 탄생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심장 박동 소리와 함께 심장이 뛰고, 그 힘으로 (나뭇가지로 표현된) 혈관들이 피로 물들어 가는 이 장면을 이 작품에서 가장 공들인 장면으로 꼽고 싶습니다. 구체적인 영상 없이 피가 흐르는 느낌을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무대의 콘셉트와 조명이 어우러지면 무대 위에 새로운 공간과 분위기가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작품의 매력이 극대화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M15 고해
박사는 자신의 오만과 욕망으로 만들어진 괴물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깨닫고 북극의 어느 공간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괴물에게 가려고 합니다. 이때 신이 박사를 따뜻하게 안아주는데, 세트 사이에서 나오는 빛들이 박사를 안아주는 느낌으로 표현되기를 바랐습니다. 빛들이 하나하나 살아나며 북극을 채우는 장면은 차갑게만 보였던 조명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M16 나아가자
에필로그 조명이 켜지며 또 다른 북극의 장소가 배경이 됩니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만나 둘만의 행복이 머무를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합니다. 극장 공간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빛의 방향성과 색감으로 두 사람이 이동하는 공간과 시간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둘만을 비추고 있는 랜턴의 빛을 강조해 서늘한 배경 속에서도 따뜻하고 행복한 느낌을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