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형 연출가의 생존기: 장르는 넘으라고 있는 것>
9월의 이야기: 소리극
2009년 2월, 연극 연출가로 데뷔한 이기쁨은 올해로 16년째 ‘창작집단 LAS’를 이끌고 있다. 연극, 국악 극, 아동극, 뮤지컬, 콘서트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을 만들어온 그는, 그 어떤 한 분야로도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연출가다. 이기쁨 연출이 이처럼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생계형 연출가’로서의 현실 때문이다. 생활인으로서의 생존, 극단 대표로서의 책임, 그리고 연출가로서 작품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삶이 얽히고설켜 고단한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주어진 작업을 하나하나 해나가다 보니, 어느새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필모그래피가 쌓여갔다. 화려한 능력으로 쌓아 올린 결과라기보다는,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행보였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성격은 이런 여정을 가능하게 했고, 그 속에서 이기쁨만의 배짱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지금부터, 이렇게 고군분투하며 버텨온 이기쁨 연출가의 ‘생존기’를 매달 장르별로 하나씩 살펴보자.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무장애 공연’이다. 이야기에 앞서 일단 ‘무장애 공연’의 사전적 정의에 대해 알아본다. 국어사전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다. 방향을 바꿔 ‘베리어 프리(barrier free)’로 검색한다. ‘고령자나 장애인과 같이 사회적 약자들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물리적이며 제도적인 장벽을 허물자는 운동’을 뜻한다. 또다시 검색창을 바꿔 찾아본다. “무장애 공연은 장애인 관객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공연을 동등하게 즐길 수 있도록, 물리적·감각적·정보적·제도적 장벽을 최소화하거나 제거한 공연을 의미한다. 즉, 무장애 공연은 특수한 배려가 아니라, 모든 관객이 차별 없이 즐길 수 있는 기본권 보장을 전제로 하는 문화예술적 접근 방식이며 최근에는 단순한 접근성 제공을 넘어서 관객 경험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예술적 시도로도 발전하고 있다.” 한마디로 “모든 관객이 차별 없이 공연을 즐기자!”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가치를 내세운 공연이 점차 늘고 있다. 나 역시 무장애 음악극 <나는 재미있는 낙타예요>를 통해 이 명제에 깊이 다가가 본 적이 있다.
여성 서사에 대한 고민도 마찬가지였지만, 모든 배움은 무지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 위인전 속 헬렌 켈러는 시청각 장애를 극복하고 희망을 보여준 인물로만 그려졌지, 그녀가 여성 참정권론자이자 급진적인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았다. 부끄럽게도 다 큰 성인이 되어서야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언젠가 ‘헬렌 켈러’를 공연으로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무려 7~8년은 훌쩍 지난 얘기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정지혜 소리꾼과 대화를 나누다 그 역시 헬렌 켈러 이야기를 판소리로 풀어내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판소리로 풀어낸다?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이야기가 조금 선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2023년 초, 국립극장에서 무장애극 시리즈 연출 제안을 받았다. 오! 이것은 ‘헬렌 켈러’ 이야기를 하라는 계시 아닌가! 나는 홍단비 작가에게 글을 요청하고, 정지혜 소리꾼이 작창을 하고, 배우 한송희, 음악감독 김솔지와 심준보까지 한 자리에 모았다. 내가 좋아하는 창작자들과 오랫동안 꿈꿔온 이야기를 공연으로 구현할 수 있다니, 나는 정말 복이 차고 넘치는 놈이라며 흥분에 가득 찼다! 그게 머리를 쥐어뜯을 고통의 시작점인 줄 모르고.
헬렌 켈러(이하 헬렌)에 대해 깊이 알아갈수록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는 시청각 장애인이었다.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는 것이고 그러니 언어를 쓰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에 대한 여러 자료를 읽으며, ‘언어’라는 세계를 마주하기 전의 헬렌은 흡사 본능만이 남아있는 동물의 모습으로 상상되었다. 어떤 규칙도 없는, 본능과 욕망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생명체. 그런 헬렌에게 ‘언어’라는 세계를 열어준 사람이 바로 ‘앤 설리번(이하 애니)’이었고, 단비 작가는 애니과 헬렌 사이의 같지만 다른 모습을 찾아내었다. 헬렌은 뇌수막염으로 시청각 장애를 얻었고, 애니 역시 어린 시절 감염병으로 시력을 잃었다. 헬렌은 부유한 가정에서 관심과 보호를 받으며 자랐지만, 애니는 가난한 아일랜드인의 딸로 부모와 남동생을 모두 잃고 홀로 살아남아야 했다. 아동보호소를 거쳐 퍼킨스 맹학교에서 점자와 철자법을 배우고 개안수술까지 성공한 애니는 헬렌의 가정교사가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은 50년에 가까운 세월을 함께 했다. 이 만남에서 출발한 공연이 바로 <나는 재미있는 낙타예요>였고, 이것은 ‘애니와 헬란의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질문들이 우리를 끊임없이 고민에 빠트렸다. 앞서 말했듯, 모든 것은 무지함에서 시작되었다. 예컨대 헬렌 켈러는 미국인인데, 우리는 한국 배우들과 한국인 관객을 대상으로 공연을 한다. 그렇다면 수어는 한국 수어를 쓸 것인가, 미국 수어를 쓸 것인가? ‘WATER’의 표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수어는 단순 기호가 아니라 음성 언어와 마찬가지로 청각 장애인들의 제1언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던 무지에서 비롯된 오류였다. 이를 깨닫고 대본을 전면 수정했다. 또 다른 예로는, 사람들은 헬렌 켈러를 흔히 ‘장애를 극복한 여성’이라 부른다. 하지만 과연 장애는 극복해내야 하는 대상인가? 헬렌 켈러는 시청각장애인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교육을 받은 후 비장애인처럼 육성으로 말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밀라노 선언’의 영향 때문이었다. 당시 농사회에서는 농인들의 제1언어인 수어로 교육할 것인가, 청인들의 언어인 음성 언어를 배워서 수어가 아닌 음성 언어로 교육하는, 즉 입술을 읽고 스스로 말하는 구화로 교육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일었고, 농학교 교사들의 밀라노 국제회의에서 구화주의 교육을 채택하며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수어보다 말이 우수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논쟁할 필요조차 없으며, 농인들을 사회생활에 복귀시키기 위해 농교육과 수업에서 말을 가르치는 것이 수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이런 기조의 교육을 받았던 헬렌 켈러는 말하기에 대한 훈련을 거듭했지만 비장애인과 똑같은 음성 언어를 구현할 수는 없었고, 오늘날 농사회에서는 이런 헬렌 켈러의 시도가 구시대적 시도로 비판받는다. 장애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닌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그 단순하고도 당연한 진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나는 또 한 번 머리를 쥐어뜯을 수밖에 없었다. ‘장애’에 대한 창작진들의 새로운 시각이 열리며 여러 가지 시도를 할 수 있었다. 시각 장애인을 위한 음성 해설을 대체할 수 있도록 배우들의 행동 지문을 대사화시키는 작업을 시작으로,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기본 폰트로 제작하는 자막 해설을 넘어 극 중 상황에 맞는 폰트로 디자인하여 다양한 크기와 속도로 배역의 감정과 상태를 전달할 수 있는 자막 디자인도 함께 진행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헬렌 켈러의 목소리를 판소리로 표현하는 것에도 규칙을 만들 수 있었다. 경계는 분명했다. 언어를 알기 전의 헬렌과 언어라는 세계를 맞이한 이후의 헬렌. 배움 이전의 헬렌에게도 사유와 욕망, 기쁨과 슬픔은 분명히 존재했으나 그것은 아직 말이라는 옷을 입지 못한 원초적 울림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그 시간을 ‘구음’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구체적인 ‘말’은 없지만 숨결과 감정이 얽혀 음으로 존재하는 순간들. 그리고 애니를 만나 세상의 문을 열고 언어를 손에 쥔 헬렌은 비로소 자신의 소리에 ‘말’을 붙이게 된다. 그때부터 판소리가 그녀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다. 단순한 음이 아닌, 의미와 이야기로 이어지는 소리. 그렇게 우리는 헬렌의 세계를 두 겹의 목소리로 노래할 수 있게끔 구성하였다.
이렇듯 무장애 공연은 배움의 연속이자 새로운 시도의 장이었다. 몰랐던 것들,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 다시 바라보게 된 것들. 이 배움은 나에게 자괴감과 반성의 시간을 안겨주고 새로운 세상을 알려주었다. 무장애 공연에는 자막 해설, 음성 해설, 수어 통역이 필요하다. 청각 장애인을 위한 자막과 수어, 시각 장애인을 위한 음성 해설, 그리고 지체 장애인을 위한 휠체어석과 무장애 동선, 점자 프로그램북까지. 작은 것 하나하나가 무장애 공연을 만드는 필수 요소였다. 일상을 보내며 무심코 지나치게 되는 점자블록이나 장애인 화장실도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극장에서의 리허설 때는 이 모든 과정을 겪어 얻은 배움이 결과물로 나타났어야만 했다. 우리 공연의 정체성은 무장애 공연이었으니 장애인이 공연을 관람하는 것에 아무런 불편감이 없어야 하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이었으나, 이 모든 요소가 새로운 무대 미학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게끔 조율해내야 했다. 그림자 통역을 해준 수어통역사님들의 위치와 자막의 사막지대가 생기지 않도록 위치를 조정하고, 음성 해설과 자막의 속도에 맞춰 배우들의 연기 속도를 조정하고, 시각 장애인인 마림바 연주자의 안전하고 편안한 연주를 위해 등‧퇴장 동선을 바꾸고, 조명의 밝기와 음향의 크기까지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 수없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조정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모든 사람, 장애인과 비장애인, 그리고 시각, 청각, 시청각 장애인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공연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 인공 와우를 사용하는 청각 장애인에게 적정한 주파수와 비장애인에게 적정한 주파수가 다른 것처럼, 장애 유형별로 필요한 것이 다르고, 이를 완벽하게 충족하려면 더욱 세분화된 제작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
<나는 재미있는 낙타예요>는 내가 연출했던 어떤 공연보다 어려웠고, 어떤 공연보다 많은 반성을 안겨줬으며 동시에 가장 빛난 공연이었다. 헬렌 켈러가 ‘언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났듯, 나 역시 무장애 공연을 통해 전혀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 판소리와 전자음악, 소리꾼과 연극배우, 라이브 연주자와 수어통역사, 음성해설사와 접근성 매니저, 이 모든 파트의 창작자들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지 않을까. 이 세계를 알고 나니 더욱 쉽게 대할 수가 없다. 또다시 이런 공연을 맡는다면 내 머리카락은 정말 남아나지 않겠지만, 그보다 더 값진 배움을 얻을 것이라 확신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장애 공연을 위해 애쓰는 모든 분들께 마음 깊은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