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영 문화 칼럼니스트가 한 편의 뮤지컬을 심층 분석하는 리뷰를 연재합니다.

장영실과 세종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노비 출신의 천재 과학자와 그를 알아본 성군, 신분의 벽을 넘어 세상을 이롭게 하려 했던 연대의 서사는 영화 〈천문〉(2019)과 드라마 〈장영실〉(2016) 등을 통해 대중적 인기를 쌓아 왔다. 장영실과 세종을 다시 주인공으로 불러낸 창작 초연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이상훈 원작, 권은아 극작·작사·연출, 이성준 작곡·음악, EMK 제작)가 관객과 만나는 지금, 질문은 하나다. 여러 매체에서 수없이 반복된 이 이야기가 다르게 수용될 여지가 있을까?
이 작품은 ‘새로운 정보’가 아닌 ‘다른 구조’를 통해 역사적 인물들과 관객들 사이의 교감과 사유를 끌어내는 방식을 취한다. 15세기 조선·명나라·유럽, 21세기 한국·유럽을 불규칙하게 오가는 시공간 중첩을 시도했다. 주·조연에 대부분 적용된 1인 2역은 특정 인물의 전기가 아니라 하나의 질문이 여러 시대를 유영하는 서사임을 시사한다. 장영실을 설명하기보다 그가 남긴 ‘의문’ 혹은 ‘공백’을 반복 호출해 질문을 지속적으로 끌어내는 방식이다. 연대기적 전개 틈새를 점유한 시공간 중첩 장면들은 호불호가 갈린다. 원작을 읽은 관객에게는 축약이 아쉽고, 장영실·세종 서사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다빈치와 만나는 지점들이 어색하다. 그럼에도 1막 세종 솔로 넘버 ‘너만의 별에’와 2막 후반 장영실의 솔로 넘버 ‘그리웁다’와 ‘사라지기에’, 대단원 넘버 ‘비차 리프라이즈’는 이 균열을 성찰의 언어로 수렴하며 작품에 존재 이유를 부여한다.
단순화하면 1막은 한국 관객에게 각인된 역사적 정서를 계승한 연대로, 2막은 장영실과 다빈치의 만남이라는 판타지를 성찰의 계기로 삼는 작품이다. 2막 중반 피렌체에 홀로 남기를 택한 장영실이 텅 빈 무대에서 고향과 사람을 떠올리며 부르는 넘버 ‘그리웁다’ 이후 이어지는 장면들은 생을 회고하며 깨달음과 내려놓음을 담은 독백이다. 라이브 오케스트라에 스민 한국 전통 민요 가락과 루벤스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한복의 질감, 설명되지 않기에 더 선명해지는 여백이 관객의 심연을 붙들어 잡아 긴 여운을 남긴다. 대극장 뮤지컬에서 보기 드물게 장치와 군무를 걷어내고 조명디자인만으로 고독을 시각화 한 장면들이다.
물론 창작 초연답게 정리해야 할 부분도 분명하다. 시공간 전환은 속도감과 리듬감의 조절이, 1막의 정보량과 2막의 공허함은 좀 더 유기적인 연동이 필요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작품이 애초부터 완성된 답을 내놓지 않는 태도를 세계관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장영실과 세종을 ‘위대한 과거’로 봉인하지 않고, 지금도 유효한 질문으로 열어 두는 선택은 상업 대극장 뮤지컬에서 드문 도전이다. 장영실이 소년 다빈치와 만나 조선의 과학적 상상력을 유럽에 전파한다는 설정은 사실 핵심이 아니다. 이 신비로운 접점을 통해 조선과 유럽의 과학사를 병치하면서 한국적 대극장 창작 뮤지컬이 시공간을 아우르는 지구사와 접속하는, 보편적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1인 2역과 시공간 중첩의 구조
드라마·영화가 장영실을 ‘억울하게 사라진 천재’로, 세종을 ‘그를 알아본 유일한 지도자’로 그려 왔다면, 〈한복 입은 남자〉는 이 ‘역사적 상식’을 전제로 변주한다. 한국적인 리듬과 서양의 오케스트라가 융합한 오프닝 넘버 ‘한복 입은 남자’는 21세기 현재 서울을 기점으로 한다. 다큐 PD 진석(세종 1인 2역, 카이‧신성록‧이규형 분)과 숲속 은둔 연구자 강배(장영실 1인 2역, 박은태‧전동석‧고은성 분)가 엘레나(정의공주 1인 2역, 이지수‧최지혜 분)의 비망록을 해독하는 과정이다. 강배가 비망록을 펼쳐들고 읽기 시작하면서 15세기 장영실의 유년기로 장면이 전환된다. 세종과 장영실, 정의공주 등이 등장하는 자격루·신기전·혼천의 발명 서사 틈새로 21세기의 진석·강배·마교수(정화대장 1인 2역, 민영기‧최민철 분), 엘레나가 반복 소환되면서 ‘장영실은 왜 기록에서 사라졌는가, 그 이후의 삶은 어디로 향했는가’를 되새긴다.
2막에서 장영실은 정화대장과 함께 로마로 향하고, 질문은 15세기 로마·피렌체와 21세기 서울·피렌체에 걸쳐 수렴된다. 위인을 현재로 ‘소환’하는 1막을 지나 현재의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하는가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는 ‘참여’의 구간이다. 2막의 개연성은 창작‧출연진들과 관객이 함께 버무려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어지는 넘버들은 “나에게 진정한 별은 무엇인가”, “죽을 만큼 괴롭다면 내려놓아도 되는가” 등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이끈다. 각자의 경험치와 맞물리며 공감의 회로가 작동하고 어느새 이 작품은 역사 인식과 동시에 성찰적 치유극으로 향한다. 제대로 공명하면 울림이 남지만 이야기만 쫓으면 혼돈의 연속일 수도 있다.
원작 소설 『한복 입은 남자』(2014)는 기록에서 사라진 장영실 이후의 삶을 상상력으로 복원하며 “왜 사라질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서사의 동력으로 삼는다. 뮤지컬은 이를 계승하되 방법론을 바꾸었다. 소설이 한 인물의 궤적을 따라갔다면, 무대는 질문을 시공간 전체로 확장한다. 15세기와 21세기의 병치, 그리고 전 배역에 가깝게 적용된 1인 2역은 문제의식을 당시의 사회구조, 시대적 변화를 통찰하게 이끄는 장치로 작동한다. 그 결과 장영실은 ‘사라진 천재’ 한 사람이 아니라 시대마다 반복 호출되는 질문을 대변하는 상징이 된다. 소설의 ‘각색’이라기보다 질문의 좌표를 옮기는 ‘재배치’에 가깝다.
이 작품에서 1인 2역은 동일 인물의 다른 얼굴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와 위치의 인물들이 하나의 질문을 공유하도록 만드는 형식적 선택이다. 장영실/강배, 이암/교황(1인 2역, 김주호‧김대호 분) 같은 병치는 혁신과 억압, 배제와 권위가 시대를 달리해 반복되는 방식을 드러낸다. 원작을 읽지 않았다면 관계를 빠르게 파악하기 어렵고, 설명없이 빈번한 전환이 혼돈스러울 수 있는 이 작품은 바로 이런 불친절함에서 우러나오는 질문들을 채집한다. 그리고 2막 중반 이후부터는 관객들에게 “따라오라”가 아니라 “멈추어 보라”로 이끈다.
21세기의 우리는 15세기와 비교해 얼마나 달라졌는가? 우리는 반복되는 불합리한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가? 부지불식간에 그러려니 ‘감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론 이런 문제의식이 항상 동일한 밀도로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1막 초반의 빠른 장영실 생애 통과는 정보 전달이 앞서고, 2막에서도 조선/유럽·과학/종교 권력 대비가 충분히 분화되지 않아 집중을 분산시키는 순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가장 불안정해 보이는 지점에서 유의미한 장면들을 드러낸다. 1막 초반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를 무용수의 신체로 재현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림과 같은 조선 초기 한복을 한 겹 한 겹 ‘입는’ 퍼포먼스를 통해 시간·계급·침묵의 층위를 드러내며 인물을 그 시대의 표상으로 이끈다. 단순한 회화의 재현이 아니라, 그림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시간과 망각을 무대 언어로 치환한 순간이다. 이 작품의 세계관에서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는 다빈치가 그린 장영실을 루벤스가 모사했다는 설정이다. 한마디 설명 없이 관객들이 감각하게 이끄는 이 퍼포먼스는 관객들의 호기심을 확장한다. 이 장면에서 우러나오는 여러 감각들의 정체가 궁금해 원작 소설을 들춰보거나 검색하게 이끈다.
2막 후반의 넘버 ‘사라지기에’ 또한 그러하다. 노년의 장영실이 제자 다빈치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에 탄사를 보낸 후 이어지는 장면이다. 장영실이 품에 간직한 등롱을 무대 한 가운데 놓는다. 조선에서 생을 함께 한 지기들의 기억이 가득하다. 1막에서 모두 다뤄진 내용들이 한 폭의 민화로 표현되었다. 영상디자인과 조명디자인을 통해 이 작은 등롱은 무대 전체로 확대되고 영실은 ‘사라지기에’를 부르며 고독과 회환 속에서 내려놓음을 성찰한다. 수묵화를 확대한 영상은 어느새 별자리가 되고 이어서 자개를 박은 조각처럼 형언하기 어려운 한국적 이미지를 새롭게 형성하다 사라진다.
군무와 도구를 덜어낸 독백은 장영실을 위대한 과학자에 박제하지 않는다. 그의 제자(?) 다빈치가 그러했듯이 장영실은 철학적인 깨달음을 거듭하는 선지자로 환원된다. 장영실 역 배우들은 이 장면을 각자의 해석으로 다양하게 표현하는데 고은성은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 그 자체이다. 그림 속 한복을 재현한 의상의 넓은 소매통에 두 손을 넣고 허허실실 구부정한 뒷모습을 객석으로 향하는 순간 무대와 객석은 영원의 시간 속에 융화된다. 이 작품의 실증적인 자료가 루벤스 그림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박은태는 다 내려놓은 선지자의 모습으로 의연하게, 전동석은 연민이 묻어나는 성찰로 이 장면을 소화한다. 많은 관객이 이 대목을 백미로 꼽는 이유다. 장영실이 겪은 파란만장한 시간들이 관객 각자의 역사로 등치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설득력을 획득하는 지점은 역사적 개연성이나 서사의 정합성이 아니다. 설명이 가장 필요한 곳에서 설명을 최소화하는, 응축된 퍼포먼스와 감각적인 무대미학, 그리고 이를 관객 각자의 감각으로 수용하게 돕는 여백에 있다.
‘사라지기에’는 애도 서사라기보다 기억의 서사다. 여기서부터 장영실의 이야기는 21세기 현재로 이월된다. 공항에서 진석이 장영실의 영혼과 나누는 대화는 거창한 선언 대신 “누군가의 시각을 아주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충분하다”는 고백을 견인한다. 진석이 부연하는 별의 밝기(겉보기 등급과 절대등급의 차이)는 관점에 따라 편차는 무의미함을 깨닫게 한다. 멀리 있어 희미한 별도 조건이 바뀌면 태양처럼 빛난다. 장영실이 어린시절부터 언급하고 만들고자 했던 비차는 하늘을 나는 기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각자의 삶이 이미 충분히 빛난다는 사실을 돌아보게 하는 상징이자 관점을 전환하는 매개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차 리프라이즈’는 과거를 향한 노래가 아니라 현재의 관객에게 건네는 인사로 들린다. 넘버 ‘그리웁다’에서 실현되지 못한,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는 삶으로, 다시 각자의 길로 돌아가도록 이끄는 깨달음의 언어이다.

모든 중첩이 ‘사라지기’로 향하는 이유
반복되는 시공간 중첩은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선언이 아니라,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사실을 관객이 체험하도록 견인하는 장치같다. 1막 중반, 15세기 복식 그대로 21세기 서울에 등장하는 강배와 진석, 엘레나 장면처럼 ‘생뚱맞음’은 시공간 중첩의 균열을 스스로 낯설게 만든다. 이 작품의 서사에 몰입하기 보다는 이 작품의 여러 시도와 장치를 관람하는 관객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장치들이다. 이런 소격효과와 질문의 축적은 후반부에서 정서적 결론으로 수렴된다.
1막의 혼란은 해소되지 않은 채 2막으로 넘어가고, 중첩은 외부 구조가 아니라 노년의 장영실 내부 기억으로 수렴된다. 넘버 ‘사라지기에’를 통해 장영실은 시공간 중첩의 순간들까지 포괄하며 “잊혀지게 두어라…모든 건 사라지기에 우리의 오늘이 이토록 귀한 법”임을 설파한다, 과학의 성취도 권력의 판단도, 시공간을 넘나들며 당시를 복원하려는 이 작품의 안간힘도 영원하지 않음을, 부질없음을 환기한다. 작품 서사 안에서도, 작품의 프로덕션 자체에서도, 관객들의 삶에서도 내려놓음의 철학을 공유하는 대목이다.
객석이 어린이부터 노년까지 폭넓게 채워지는 이유는 명확하다. 장영실·세종의 연대와 다빈치의 접속은 다양한 소구점을 만든다. 불호가 갈리는 것은, 익숙한 연대기 대신 중첩과 분절로 감각의 층위를 구성하는 방식이 관객에게 각기 다른 난이도로 체감되기 때문이다. 비차가 날아오르듯 자유롭게 곡선을 이루는 겹겹의 궁전 지붕 이미지부터 교황청을 상징하는 스펙터클한 미카엘 석상, 자격루·혼천의·신기전 등을 섬세하게 재현한 장면들은 15세기를 상징하는 장영실과 세종, 다빈치의 흔적을 시각화한 무대미학의 절정이다. 어느 시공간인지 불명확한 의상으로 시공간의 중첩 사이에서 자주 등장하는 앙상블 군무는 고래로 늘 존재해온 혼돈의 상징으로 읽힌다. 1막에서 명나라 입장에 서는 병조판서 이암이 세종의 개혁에 맞서는 넘버 ‘말세’에서 등장한 사대부 군무 장면이 한 예이다. 일괄적인 거대한 관복의 형상에서 빠져나와 현대적인 검은 의상으로 변복하고 군무를 추는 이 장면은 이 작품이 단순한 연대기적 서사도, 역사 뮤지컬도 아닌 새로운 창의적 변주임을 선언한다.
〈한복 입은 남자〉는 앞으로 개발과 수정이 더해질 창작 초연 작품이지만 한국적 대극장 창작 뮤지컬의 새로운 이정표로 자리매김할 것은 분명하다. 화려하고 섬세한 무대미학과 한국 전통의 무용과 음악을 접목시킨 프로덕션 디자인 때문만은 아니다. 위인을 찬양하지 않고 그가 남긴 질문을 오늘의 관객에게 되돌려주는 방식은 역사와 위인을 다룬 뮤지컬의 새로운 방향성이기도 하다. 장영실 영혼과 현대 진석의 이중창 ‘비차 리프라이즈’ 무대에서 객석으로 확장되는 별자리 프로젝션은 영화 〈천문〉에서 장영실과 세종이 창호지와 촛불로 비추던 소박한 우주의 거대한 확장으로 읽힌다. 1막 말미, 장영실을 유럽으로 보낸 세종의 애절한 넘버 ‘너만의 별에’서 반복되는 “하늘이 정한 너의 길을 가/훨훨 날아 닿아 널 위해/찬란히 빛나는 너만의 별에”와 수미상관한다. 전통 민요를 변주한 한국적 오케스트라 라이브 연주가 겹쳐지며, 작품은 과학·역사·상상을 넘어 문화적 자의식의 자리에 도달한다.
장영실과 세종이 함께 바라보았던 하늘은 이제 장영실과 다빈치, 그리고 21세기의 관객에게 이어진다. 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바라보는 이들이 바뀔 뿐이다. 〈한복 입은 남자〉는 장영실을 기리는 대신, 별을 바라보는 자리, 즉 질문의 좌표를 관객에게 재배치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결국 우리에게 돌아온다.















